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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김방경) 1 -박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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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4-10-30 15:34 조회1,44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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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우선생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편 | 돌베개 | 2003년 12월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에 충렬공 전기를 쓰던 서울대학교 박재우교수의 김방경(삼별초 평정과 일본 정벌을 이끈 고려군 최고 지휘관) 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몇 회에 걸쳐 나누어 소개합니다.

 

김방경

삼별초 평정과 일본 정벌을 이끈 고려군 최고 지휘관


                           박재우(서울대학교 규장각 신임연구원)


머리말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은 안동 김씨로 경순왕(敬順王)이 후손이다.
증조 김의화(金義和)는 사호(司戶), 즉 읍사의 호장으로서 향리였는데, 할아버지 김민성(金敏成)이 장야서승 직사관을 지내면서 중앙관료로 진출했고 아버지 김효인(金孝印)은 병부상서 한림학사가 되었다. 더구나 큰아버지 김창(金敞)은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가 되었으니 김방경은 무신 정권기에 향리에서 성장해 중앙관료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셈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장한 김방경은 삼별초(三別抄) 난(1270~1273)을 평정하고 원나라의 일본 침략에 동원된 고려군 최고 지휘자관으로 활약했고, 이를 발판으로 성장해 원나라의 간섭이 시작된 충렬왕 초반에는 수상이 되어 정치를 이끌어갔다. 그리고 김방경의 출세를 계기로 그의 가게는 많은 재추(宰樞)를 배출해 권문세족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므로 김방경은 무신들의 지배와 몽고의 침략, 당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던 강화, 예상했던 원나라의 간섭, 그리고 측근정치가 행해졌던 시대를 두루 거치면서 형성된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좋은 사례가 된다.

김방경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열전과 연대기 기록이 있고, 안동 김씨가 편찬한 족보에 「김방경 묘지명」과「김방경 행장」이 있으며,『양촌집』(陽村集)의「동현사략」(東賢事略)에 열전이 있다. 문집은 남기지 않았지만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에 편지가 한 통 남아 있고,『동문선』(東文選)에 시가 한편 수록되어 있다.


1. 성장과 정치적 입장


김방경은 삼한공신(三韓功臣) 일긍(日兢)의 음서(蔭敍)로 관직에 입문해 처음에 양온사동정이라는 산직(散職: 일정한 자리가 없는 벼슬)을 받았다가 차대정에 임명되어 정식으로 진출했고, 이러 태자부견룡·산원 겸 식목녹사를 차례로 역임했다.

이러한 성장 배경으로 김창과 김효인의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형제가1206년(희종 2)과 1208년(희종 4)에 차례로 과거에 급제했고 이를 계기로 최씨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최씨 정권은 문신 우대책을 시행하면서 자신들과 가까운 좌주(座主)를 통해 급제자들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여 이들의 행정 능력을 이용해 세력 기반을 넓히려 했다.

최씨 정권 때 좌주를 역임한 인물은 여럿 있었지만 특히 임유(任濡)와 금의(琴儀)가 이름을 떨쳤다. 임유는 문벌인 문하시중 임원후의 아들로 문하시랑평장사까지 올랐는데, 형 임부의 딸이 최충헌(崔忠獻)과 혼인했고 자신의 아들 임효명이 최충헌의 딸과 결혼해 최씨 정권과 중혼을 맺었고, 이를 계기로 네 차례에 걸쳐 좌주를 역임했다. 금의는 문벌 배경은 없었지만 최충헌에게 발탁되어 세 차례에 걸쳐 과거를 관장했다.

이들의 문생(門生)은 임유와 금의를 통해 최씨 정권과 연결되어 커다란 혜택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최씨 정권 당시에 과거를 관장해 다시 문생을 선발할 만큼 매우 번성했다. 그런데 김창은 임유의 문생이고 김효인은 금의의 문생이었다.

특히 김창은 최우(崔瑀) 정권 때 두드러졌다. 1225년(고종 12)최우는 처음 정방(政房)을 설치하고 김창에게 맡겼다. 정방은 인사기록부인 정안(政案)을 토대로 인사이동이 필요한 관직에 사람을 선발하는 기구로 최우가 인사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 설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담당자는 개인적인 역량이 뛰어나야 함은 물론 최씨 정권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인물이어야 했다. 김창은 수만 명에 달하는 인사 대상자에 관한 기록을 한번만 보면 모두 기억했고 또 인물을 선발할 때는 일일이 최우의 의견을 물어 결정에 따랐다고 하므로 적임자였음을 알 수 있다. 김방경은 이들 김창, 김효인의 정치적 진출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김방경이 이들의 후광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신은 최씨 정권과 밀착하지 많았다. 오히려 김방경은 무반 출신임에도 최씨 정권의 측근 무신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치 활동을 했는데, 이는 그가 최씨정권의 측근 무신들처럼 삼별초를 이끌거나 최씨 정권의 문객이나 가노(家奴) 출신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물론 김방경이 최씨 정권과 직접 연결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창이나 김효인을 통해 최씨 정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외가 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관직 생활 중에도 그러한 기회가 있었다. 특히 그는 식목녹사 시적에 식목도감(拭目都監)의 장관인 문하시중 최종준(催宗峻)에게 상당한 신임을 받았는데 최종준은 최우와 인척관계였다, 즉 최종준의 누이가 정숙첨(鄭叔瞻)의 부인인데, 정숙첨의 딸이 최우의 부인이었다. 그러므로 김방경은 최종준을 통해 얼마든지 최씨 정권과 연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김방경은 그러한 관계를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방경은 최씨 정권의 정치 운영에 비판적이었다. 김방경은 산원겸 식목녹사를 역임한 뒤 나가 서북면 병마녹사가 되었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별장(別將)이 되었다. 이어 낭장(郎將)으로 승진하면서 감찰어사를 겸했는데 이때 김방경은 우창(右倉)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우창은 국가 재정을 맡은 관부(官府)로서 미곡을 보관했는데 미곡을 지급하는 과정에서 부정이 많아 국고의 낭비가 심했다. 그런데 김방경은 우창을 감찰하면서 청탁을 들어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한번은 어떤 재상이 청탁을 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최우에게 “이번 어사는 지난 번 어사만큼 일을 잘 처리하지 못 합니다”하며 호소했다. 마침 김방경이 오자 최우가 김방경을 꾸짖었다. 그러자 김방경은 “지난번 어사처럼 일을 하려고 한다면 저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국고를 든든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지 못 합니다”라고 하여 최우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 일화는 단순히 김방경이 강직한 인물이었음을 뜻한다기보다 그가 최씨 정권의 재정 운영 방식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향은 견룡행수(牽龍行首) 시절에도 확인된다. 김방경은 서북면 병마판관을 지내고 국왕의 측근 무반인 견룡행수가 되었다. 무신난 이후 집권자들은 사병집단인 문객(門客)을 형성했고 최씨 정권도 무반이나 군인들을 끌어들여 도방을 만들었다. 특히 이들 무반은 중앙군의 장교로 근무했을 뿐만 아니라 최씨 정권의 이해에 따라 도방(都房)의 지휘를 맡았다. 그 결과 이들의 지휘는 최씨 정권과 연결되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무반과 군인들이 최씨 정권과 연결하기 위해 애썼고 이러한 사정은 금위군(禁衛軍)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김방경이 견룡행수로 재직했을 당시 왕실을 호위하던 무반들은 대부분 최씨 정권과 연결되어 사병활동에 주력함으로써 원래의 직무를 등한시했다. 이는 금위군을 약화시켜 왕권을 무력하게 만들고자 했던 최씨 정권의 의도와 맞물려 생겨난 상황이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관행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신하 된 사람의 의리가 이럴 수는 없다”라며 동료 박기성과 함께 자신들만은 근무에 충실하자고 약속했다. 그러고는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비록 병이 나도 휴가를 내지 않을 정도로 근무에 열중했다. 이것 역시 최씨 정권의 군사기반이 중앙군 및 금위군을 무력화하여 결국 왕권이 약화되는 현실에 대해 김방경이 상당히 비판적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김방경이 비록 무반으로 진출하기는 했지만 최씨 정권의 측근 무신들과는 정치적 입장에서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 김방경은 좌금중지유 섭장군으로 승진하면서 급사중과 어사중승을 겸했다.『고려사』김방경전의 평가를 보면, “어사중승으로 옮겨 법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 풍모와 절개가 의연했다”고 하는데, 이는 감찰어사 시절의 태도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그가 최씨 정권의 정치 운영에 비판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최씨 정권의 정치 운영에 비판적이었던 김방경은 몽고와의 전쟁에서도 강화론을 견지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강화론이 등장하는 정황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살리타이(徹禮塔)의 1차 침략이 있자 최씨 정권은 정규군을 파견해 몽고군을 막으려 했으나 안북성 에서 패배함으로서 고려군의 열세가 확인되었다. 당시 최우는 자신의 안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몽고군이 개경 인근까지 진출하자 성곽을 방비하는 군사들은 늙고 약했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반면, 자신은 잘 훈련된 가병으로 호위하게 했다. 그리고 곧장 강화를 추진하고 다른 한편 천도를 준비했다.

당시 개경을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 우세했으나 성을 지킬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 야별초(夜別抄) 지유(脂油) 김세충(金世沖)을 처형함으로써 반대론을 억누르고 천도를 단행했다. 이렇게 무리한 천도를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최우가 강력한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뒤 최우는 자신은 강화에 안전하게 있으면서 야별초를 보내 유격전을 펼치거나, 지방관이나 방호별감의 지휘 아래 군사와 백성들이 산성이나 섬에 들어가 성을 지키는 입보(立保) 전술을 쓰게 했다.

그런데 2차 침략 때 처인성(處仁城)에서 살리타이가 고려군의 화살에 맞아 죽고 또 강화에 궁궐과 관청이 조성되면서 최우는 강화 천도로 사직을 보호했다는 명분을 얻었다. 다시 탕구(唐古)가 3차 침략을 감행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고려가 국왕의 친조(親朝)를 약속해 강화가 이루어졌다. 이후 몽고 에서도 황위 계승 분쟁이 있어나 한때 고려 침략이 불가능해지자 그동안 최씨 정권은 강화 천도의 이익을 고스란히 누렸다, 아무간(阿毋侃)의 4차 침략이 있었지만 국면을 전환시킬만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우가 죽고 최항(崔伉)이 집권하면서 최씨 정권의 항전 정책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최항은 기생의 아들로 권력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항전 정책을 계승하기는 했지만 전처럼 강력할 수 없어 강화론이 다시 등장했다. 몽고의 헌종이 즉위해 개경 환도와 국왕의 친조를 요구해왔을 때, 재추와 문무 4품 이상이 모인 회의에서 이들은 국왕의 친조는 곤란하지만 태자의 친조는 가능하다고 입장을 피력했다.

당시 김방경은 좌중금지유 섭장군으로 급사중과 어사중승을 겸한 4품 관료였다. 그러므로 김방경도 이 논의에 참여해 강화론을 주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씨 정권의 정치 운영에 비판적이었던 김방경의 행보로 볼 때 무리한 추정은 아니다. 이는 최우 정권 당시 김방경의 행적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김방경은 전쟁으로 피해가 컸던 서북면에 두 차례 부임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재임한 시적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아무간의 몽고군이 침략하자 최우는 북계병마사 노연(蘆演)에게 백성을 이끌고 섬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고, 김방경 또한 명령에 따라 향리와 주민을 이끌고 위도(葦島)에 들어갔다.

하지만 식량이 문제였다. 마침 위도는 바닷가에 넓고 평평한 땅이 10여리나 되었는데, 바닷물이 넘나들어 아무도 파종할 생각을 못했다. 김방경은 식량이 해결되지 않으면 입보책이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을 시켜 둑을 쌓고 개간하여 파종했는데 이런 김방경의 지략은 몽고군이 장기 주둔하면서 빛을 발했다. 위도의 향리와 백성들은 추수해 이를 식량으로 삼았으므로 장기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위도는 물도 부족했다. 김방경은 백성들을 시켜 제방을 만들어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빗물이나 이슬을 저장해 큰 연못을 만들었다, 그 결과 여름에는 급수를 할 수 있고 겨울에는 얼음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김방경은 서북면의 백성에게 상당한 신임을 얻었다.

이러한 김방경의 태도는 최씨 정건의 측근들이 백성들의 생계에 대한 아무런 대책 없이 입보책을 무리하게 추진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특히 최항 정권 이후 무리하게 입보를 재촉해 백성들이 굶어 죽는 일이 속출했는데, 이로써 볼 때 최항 정권의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해 김방경이 비판적이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재추 및 4품 이상의 관료들이 대책회의를 열 때마다 김방경은 강화론을 적극 주장했을 것이다.

김방경이 강화론을 주장했을 것이라는 또 다른 근거는 강화파(講和派)의 동향과 관련이 있다. 예꾸(也窟)와 자랄타이(車羅大)가 차례로 5차와 6차 침략을 감행해오자 고려는 커다란 곤경에 빠졌다. 특히 1254년(고종 41) 자랄타이의 공격으로 고려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해에 몽고군에게 끌려간 남녀가 무려 2만 6천8백여 명이나 되는데, 『고려사』에 “(몽고군이) 거쳐 간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군의 침입이 있은 뒤로 이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고 기록되었을 정도이다.

최항이 죽고 최의가 집권한 뒤에도 항전 정책은 계속되었지만 역량은 현저히 떨어졌다, 자랄타이의 파상적인 공격이 계속되어도 고려 지배층은 별 다른 대책이 없었다. “그때 안팎이 텅 비어 마무 계책이 없이 다만 부처와 신령에 기도할 뿐 이었다”는『고려사절요』의 기록은 당시의 절박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이때 몽고군이 국왕의 출륙(出陸)과 왕자의 조회를 요구해오자 재추회의에서 최자(崔滋), 김보정(金寶鼎) 등 강화파들이 고종에게 힘껏 건의해 왕자의 조회를 허락받았다. 그런데 최자는 이규보(李奎報)의 천거에 힘입어 최씨 정권과 연결된 인물로 전쟁 말기에 강화론을 주장했는데, 문제는 그라 김방경의 아머지 김효인과 함께 금의의 문생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효인은 비록 최씨 정권의 후광에 힘입어 성장했지만 최항 정권 이래로 강화론을 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방경도 강화론을 지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258년 (고종45) 최의의 측근 무신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김준(金俊)이 유경(柳璥)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왕정을 복구했다. 이때 그동안의 무리한 입보책에 대한 반발로 동북면의 조휘와 탁청이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항복하자 몽고는 이곳에서 쌍성총관부를 설치했고 고려는 영토를 상실했다. 이는 고려 지배층에게 더 이상 강화를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강화파의 지지를 받은 태자가 강화를 맺기 위해 몽고로 갔고 결국 쿠빌라이(世祖)를 만나 강화를 체결했다.

이러 출륙을 준비하면서 김방경이 대장군으로서 출배별감에 임명되었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그동안 김방경이 강화론의 입장을 견지해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는 고종이 사망한 상태에서 태자가 몽고에 있었으므로 후대에 출렬왕이 되는 태손이 김방경을 출배별감에 임명 한 것인데, 이는 뒤에 김방경과 출렬왕을 연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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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손가락 쥐 안나셨나요?
워낙 타자를 잘 하시니 괜찮으신가요..
편히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