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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김방경)3 - 박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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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4-11-04 08:49 조회1,443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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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원종은 몽고에 친조해 폐립사건의 전말을 보고하고 자신이 직접 몽고군을 대동하고 가서 권신을 제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겠다고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연이 죽고 그 아들인 임유무(林惟茂)가 교정별감이 되었지만 실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에 원종은 두연가(頭輦苛)의 몽고군을 대동하고 국경을 넘어오면서 황제의 명이라 하며 출륙을 명했다. 다급해진 임유무는 입보책을 명령하면서 야별초를 보내 두연가의 몽고군을 막게 했다. 원종은 임유무의 매부 홍문계(洪文系)를 회유하고 홍문계는 송송례(宋松禮)와 상의해 임유무를 제거했다. 재추들이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논의하고 날짜를 정하자 이에 반발한 일부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김방경의 생애에서 삼별초와의 관계는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고려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활동해 정치 군사의 중심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삼별초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할 것 같다.

알다시피 삼별초는 최우가 나라 안의 도적을 잡기 위해 야별초를 설치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정권의 수탈에 저항했던 백성들이었다. 이들이 최우에게 위협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농민들의 반란을 사병으로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개경 수비와 경찰 임무를 맡고 있던 경군(京軍)이 와해된 상황이어서 이 임무를 수행할 군사력이 필요했고 이에 야별초를 설치했다. 그러므로 야별초가 치안을 담당하는 공병으로 창설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때의 치안은 최씨 정권에 저항하는 백성에 대한 진압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최우가 처음부터 사적인 의도로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몽고가 침략하자 야별초는 몽고에 대한 항전이라는 새로운 임무를 맡았다. 항전이 정권 연장에 필수적인 전술임을 생각한다면 야별초의 항전 영시 최씨 정권의 이해와 관련 있는 황동임을 알 수 있다.

야별초와 달리 신의군(神義軍)은 1254년(고종 41) 이후에 설립되었다. 당시는 강화론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최항이 무리하게 입보책을 고집하던 때였다. 수세에 몰린 최항은 몽고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군사들을 모아 신의군을 결성하고 항전의 고삐를 당겼다.

이처럼 삼별초는 치안과 항전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가의 공병이면서 동시에 무신 정권의 사적인 목적에 기여하던 삼별초가 어떻게 최의, 김준, 임유무 등과 같은 무신 집권자들을 제거하는 데 동원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는 삼별초의 지휘체계와 관련이 있다.

삼별초의 단위부대 지휘관은 도령과 지유인데 이들은 대부분 낭장과 별장으로 임명 되었다.즉 삼별초는 20명 단위의 단위부대들로 구성된 군대였다. 중요한 것은 삼별초가 공병이었기 때문에 지휘관이 무신 정권과 밀착하면서도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 단위부대는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실제로 최의, 김준, 임유무 등을 제거할 때 동원된 삼별초는 삼별초 부대전체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임유무를 제거할 때 참여했던 삼별초는 송송례의 아들 송분이 지휘자로 있던 신의군 부대와 일부 야별초였다. 당시 이들과 달리 몽고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임연이 경상도에 보낸 삼별초 부대와 임유무가 교동에 파견한 삼별초 부대가 따로 있었다.

이로 본다면 삼별초의 난에 참여한 부대도 삼별초 전부는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별초의 난이 평정된 뒤의 포상 기록에는 역적을 토벌한 경별초(京別抄), 곧 삼별초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보아 삼별초의 항전이 삼별초 전체의 입장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된 것은 전쟁 말기에 더 이상 대책 없는 정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강화파의 입장을 삼별초 부대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강화가 체결되고 전쟁이 끝난 뒤 독자적으로 몽고에 항전한 삼별초 부대가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일부 삼별초가 갑자기 항전을 표방한 것은 원종이 삼별초를 해산시키고 명부를 압수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런데 당시 원종이 삼별초를 해산한 것은 그들이 몽고에 항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원종의 입장에서 볼 때 삼별초가 임연 정권의 수족이 되어 왕권 확립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부를 압수한 것이 실수였다. 삼별초는 오랜 기간 항전을 이끌어왔던 그들의 명부가 몽고에 알려질까 두려웠다. 당시 몽고군은 고려와 전쟁을 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몽고의 힘을 빌려 임연 정권을 몰락시키려 했던 원종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삼별초는 이것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1270년(원종 11)의 일이다.

그들의 구호는 “오랑캐 군사가 크게 도착해 백성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자는 모두 모이라”는 것이었다. 삼별초는 몽고에 항전하자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 나라가 잿더미가 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강화를 체결했는데. 전쟁이 끝난 지 11년 만에 다시 항전을 표방하며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결코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강화를 추진했던 고려 왕실과 관료들, 특히 또 다른 상당수의 삼별초 부대가 항전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들은 강화가 몽고의 정치·경제·군사적 압박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강화의 역사적 의미를 손상시키려 하지 않았다. 몽고와의 강화는 전쟁 말기에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당시 김방경은 무신 정권 휘하의 장수 출신이 아닌 인물의 대표적인 존재로 원종 폐립 사건으로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고려군의 지휘관으로는 적임자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강화론을 지지해온 김방경의 입장에서 삼별초의 난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고 이는 강화파 전체의 입장이기도 했다.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데 김방경의 활약은 매우 컸다. 송만호(宋萬戶)의 몽고군 1천 명이 강화를 떠나는 삼별초를 쫓아가자 원종은 김방경을 역적 추토사로 삼아 길을 안내하게 했다. 삼별초가 영홍도에 정박하는 동안 김방경은 그들을 공격하려 했으나 송만호는 1천여 척의 삼별초 함대를 보고 겁을 먹고 말렸다. 그동안 삼별초는 진도로 내려갔고, 송만호는 삼별초의 협박에 못 이겨 끌려갔던 1천여 명의 백성들이 도망해 나오자 이들을 적당이라고 끌고 귀환했다.

삼별초가 진도에 거점을 정하고 전라도에서 활동하는 사이, 신사전(申思佺)을 보냈는데 그가 싸워보지도 않고 개경으로 돌아오자 다시 김방경을 보냈다. 김방경은 아해(阿海)의 몽고군 1천 명과 함께 내려갔는데, 마침 삼별초가 나주와 전주를 함락시키려 했으므로 단기(單騎)로 내려가면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전주로 가니 군량미를 준비하라는 첩문을 보내 전술상 전주를 안심시켜 삼별초의 공격을 막아내게 했다. 이후 아해가 겁을 먹고 돕지 않는 가운데 김방경은 삼별초와 전투를 벌였고, 비록 승패를 가늠하진 못했지만 전투 역량은 단연 돋보였다.

1271년(원종 12) 아해를 대신해 흔도(?都)가 파견되면서 삼별초에 대한 공격이 다시 시작됐는데, 당시 삼별초는 기세를 올리던 차에 수비를 소홀히 하다 흔도와 김방경이 이끄는 연합군의 전술에 말려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김통정(金通精)은 남은 삼별초를 데리고 제주로 도망했다. 김방경은 그 공로로 중서시량 평장사에 임명되었다.

제주에 들어간 삼별초는 전열을 정비한 뒤 다시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으로 영향력을 확장했다. 이러한 활동은 꽤 위협적이었지만 산발적인 공격에 불과해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1273년(원종 14) 원나라는 제주 공격을 명령했고 김방경은 중군행영병마원수(中軍行營兵馬元帥)로 참여했다. 연합군의 전술과 압도적인 화력에 삼별초는 버티지 못하고 패퇴했고 김통정은 부하를 데리고 산으로 도망했으나 결국 죽음을 당했다. 김방경은 중군(中軍)을 인솔해 승리로 이끈 공로로 문하시중이 되었다.

삼별초의 평정은 몽고와의 항전을 표방하며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이 사라지고 대신 강화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수용한 세력이 고려 사회를 주도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남은 과제는 원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동안 몽고는 고려에 정기적인 공물 외에 칭기즈 칸 이후 복속국들에게 강요해온 6사(六事)를 부담 시켰다. 6사란 첫째 인질을 보내고, 둘째 군사를 징발하고, 셋째 군량미를 보내고, 넷째 역참을 설치하고, 다섯째 호구를 조사하고, 여섯째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고려는 전통적으로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등과 사대 외교를 맺으면서 조공을 바쳐왔으나 그것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따르는 의례적인 것이었을 뿐 6사와 같은 요구를 받은 적은 없었다. 원종과 쿠빌라이 사이에 최종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 쿠빌라이는  “ 의관은 본국의 풍속을 따라 모두 고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몽고군과 다루가치를 철수시키자, 고려와 몽고 사이에는 고려 전기와 같은 사대 관계가 정착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일본 침략에 고려의 군사와 군량을 이용하려는 것이 몽고의 기본 입장이었으므로 파병에 대한 부담은 불가피했다.

사실 임연의 원종 폐립 사건과 삼별초의 난은 고래에 대한 몽고의 영향력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종 폐립 사건으로 몽고군이 들어왔고 삼별초 난이 몽고군의 개입으로 평정되었으므로, 이제 원나라는 일본 침략에 고려를 좀더 본격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1274년(원종 15)이 되자 원나라는 침략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침략군은 몽고군과 한군을 합쳐 2만 5천명, 고려군 8천 명 그리고 여진군 약간 명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몽한군이 주력군이었다. 그밖에 고려는 사공과 수수(水手: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의 선원)6천7백 명과 전함 9백 척을 부담했고 이들을 먹일 군량을 보급했다. 그러므로 제1차 일본 침략 때 고려가 전쟁 비용을 일방적으로 부담했음을 알 수 있다. 김방경은 고려군의 지휘관으로 중군 도독사를 맡아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은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자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쓰시마섬(對馬島), 이키 섬(壹岐島)을 거쳐 하카다(博多) 지역으로 진격해 승리를 거두었으나, 회군하자는 홀돈(忽敦)의 주장과 계속 싸우자는 김방경의 주장이 맞섰는데 유복형(劉復亨)이 부상을 당한 것을 계기로 회군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회군하다가 폭풍을 만나 전함들이 파손되었다. 이는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아니지만 커다란 손실이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박재우 교수의 김방경 전기!!!
이 많은 분량을 타이핑하느라 노고가 많으십니다.
동시에 수고하면서 느끼는 희열도 가득하시겠지요.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감사합니다.
다시한번 그 당시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입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엄청난 작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중요한 자료로 남을 것입니다. 끝나면 자료실에 게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