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여주군지 제출자료---화산군 연보2 (28-35세. 1539-1546년)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11-04 09:07 조회1,414회 댓글3건

본문

 

28세, 기해(己亥), 중종 34년(1539)

? 6월 6일, 동재(同齋) 유생 유례선(柳禮善) 등과 상소하여, 요승 보담(寶曇)행사(行思) 두 사람을 죽이고 봉선사(奉先寺)봉은사(奉恩寺)의 두 절을 훼철할 것을 청하였다. -----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소세양(蘇世讓)과 동지성균관사 김안국(金安國), 성세창(成世昌), 대사성(大司成) 김수성(金遂成)은 유생이 공관(空館 : 항의의 뜻으로 성균관을 비움)하였다고 입계(入啓)하니, 상께서 대신에게 의논토록 하여, 사장(師長)된 사람을 효유(曉諭)하여 성균관에 들게 하라고 하였다.

? 8월, 상감께서 태학(성균관)에 행차하여, 유생을 모아 경전을 펼쳐 놓고 난해한 곳을 물었다. 공이 ?주역(周易)?을 진강(進講)하였는데, 변론하고 대답하는 것이 정밀하고 상세하였다. 이에 상이 그 해 겨울의 별시(別試)에 직부(直赴)하는 것을 허가하도록 명하였다.

? 11월 24일, 광화문(光化門)의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제일인(第一人)으로 장원하였다. 논제(論題)는 장량이 항우를 추격하도록 권하다(張良勸追項羽論)였다. 모두 6인을 선발하였다. -----

? 공이 이미 별시에 응시하러 간 뒤, 집안에 있던 모든 유기(鍮器)가 홀연히 은홍색(殷紅色)으로 바뀌었다. 공이 쓰던 세숫대야가 홀연 회오리바람에 날려서 빙글빙글 돌면서 땅에서 서너 장(丈) 높이로 떴다가 내려왔는데, 상하거나 찌그러지거나 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겨,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얼마 있다가 여종을 부르는 소리가 문밖에서 왁자지껄하였다.

? 12월,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선보(選補)되었다.

?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관 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에 천수(薦授)되었다.



29세, 경자(庚子), 중종 35년(1540)

? 정월 10일,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에 배수되고, 다른 직은 이전처럼 겸직하였다.

? 정월 18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검토관(兼 經筵檢討官)에 제수되었다.

? 4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에 배수되었다.

? 6월 21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兼經筵檢討官 春秋館記事官)에 배수되었다.

? 6월 25일, 사간언 정원(司諫院正言) 지제교(知製敎)에 배수되었다.

? 6월 27일, 지평(持平) 이현당(李賢?)을 체직하고 왜관 별좌(倭館別坐) 한자(韓慈) 이부(李?),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 이백록(李百祿)을 파직시킬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

? 7월 5일, 지평 윤현(尹鉉)이 거취가 상도를 벗어나서 대관(臺官)으로서의 체통을 대단히 잃었으므로 체직할 것과, 부친을 죽인 호세장(扈世長)과 유석(劉石) 등은 모두 집을 허물어 못으로 만들 것을 계청하였다. -----

? 7월 12일, 내금위 장(內禁衛將) 유개(柳漑)에게 분수 이상으로 가자(加資)한 것을 환수(還收)하고, 전 첨사(前僉使) 김부(金溥)에게 가자(加資)한 것을 개정할 것을 계청하였다. 상께서 답하시길, “둘 다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 7월 25일, 다음과 같이 계청하였다. “육경(六卿)은 중요한 직임(職任)이니 아무에게나 함부로 제수해서는 안 됩니다. 홍경림(洪景霖)은 본래 명망이 없는데다 혼미하기까지 한데 ----- 김인손은 처신이 바르지 못하고 전에 평안 감사로 있을 적에도 근실치 못한 일이 많았었는데 -----

? 7월 23일, 근일에 연경에 가는 사신들이 무역을 금하는 법률을 어기고 있으니, 긴요하지 않은 잡물은 일체 무역해 오지 말며, -----

? 8월 2일, 황해도 도사(都事) 임수(林洙)는 어리석고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마정(馬政)을 맡길 수 없으므로 -----

?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30세, 신축(辛丑), 중종 36년(1541)

? 봄에 승훈랑(承訓郞)에 올라, 이조좌랑(吏曹佐郞)에 배수되었다.

?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천거로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독서당은 동호(東湖) 송월암(松月菴) 서쪽 기슭의 외지고 동떨어진 곳에 있으니, 곧 국가가 인재를 양성하는 곳으로서, 문학이 있고 중망(重望)이 있는 인사를 엄선하여 충원해서, 윤번으로 독서하게 하여, 내부(內府)의 서적을 임의대로 탐구하고 토론하게 하며, 옹인(饔人)으로 하여금 음식을 차리고 주인(酒人)으로 하여금 단술[예(醴)]을 차리게 하였다. 가구라든가 집기라든가, 지필묵(紙筆墨) 등의 물건들이 어느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며, 때때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황색으로 봉함한 진찬(珍饌)을 하사하여 각별한 은총을 보이셨다. 그 선발에 든 사람들은 영각(瀛閣)에 화상(畵像)이 오른 것처럼 영화롭게 여겼다. 하지만 선발된 사람들 대부분은 편안히 놀고 방만하였다. 공은 번(番)이 돌아올 때마다 반드시 독서당으로 갔고, 가서는 반드시 독서를 일삼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관물재(觀物齋) 민기(閔箕), 죽애(竹崖) 임열(任說), 국간(菊磵) 윤현(尹鉉) 등 여러분과 함께 남루(南樓)의 왼쪽 구석에 작은 누를 세워서, 이름을 문회당(文會堂)이라 하고, 수계(修?)하고 강독(講讀)하였다. 동호수계도첩(東湖修?圖帖)이 있다. 국간 윤현 공이 문회당기(文會堂記)를 지었다.

? 5월, 독서당에 있으면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在書堂聽鶯)시에, “청산에 가랑비 지난 뒤, 옛절에 석양이 비낀 때(靑山微雨後, 古寺夕陽時)”라는 구절이 있어서, 일시에 회자(膾炙)되었다.



31세, 임인(壬寅), 중종 37년(1542)

? 봄에 예조좌랑(禮曹佐郞) 지제교(知製敎)에 배수되었다.

? 4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공을 남교(南郊)에서 전송하였다. 회재는 당시 근친을 하기 위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32세, 계묘(癸卯), 중종 38년(1543)

? 가을 7월, 독서당에서 독서하면서, 소동파(蘇東坡)의 적벽(赤壁) 고사를 이용하여, 퇴계 이황, 관물재 민기(閔箕) 등 여러분과 앞강에 배를 띄우고 분운(分韻)하여 시를 짓고, 밤이 깊어서 돌아왔다.

? 경기도 도사(都事)에 배수되었다. 마전동헌(麻田東軒), 강화동헌(江華東軒)등의 시가 있다. 또 조강장인(祖江丈人)과 수창(酬唱)한 시가 있다.

? 8월 초길(初吉), 퇴계(이황) 임당(정유길) 금호(임형수) 등 여러 분과 압구정(狎鷗亭) 뒷산에 올라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종일토록 경치를 감상하며 놀았다. 마침 중사(中使)가 이르러 와서, 시문을 지어 올릴 것이 있다는  어명을 받들어, 마침내 입시(入侍)하였다.

? 8월 5일, 특지(特旨)로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지제교(知製敎)에 배수되었다.

? 8월 14일, 아뢰었다. “배릉(拜陵)할 때에 제관(祭官)의 공궤(供饋)를 각사(各司)의 노자(奴子)가 조촐히 마련토록 하고 -----

? 8월 25일, 아뢰었다. “전 승지(承旨) 김명윤(金明胤)과 안현(安玹) 등이  양사(兩司)의 직무를 오랫동안 폐기하였으므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게 하고, 도승지 홍섬(洪暹)은 장관(長官)으로서 규찰하지 못하였으므로 추고하여 죄를 다스리십시오. 또한 구수담(具壽聃)과 김천우(金天宇)는 징계하는 뜻이 없을 뿐더러 갑작스레 홍문관의 직책을 받았으니, 아울러 체차하십시오.” -----

? 9월 13일, 홍문관 부교리(弘文?副校理) 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에 배수되었다.

? 10월 6일, 황해도 관찰사 조사수(趙士秀)에게 내리는 교서를 지어 올렸다.

? 퇴계 이황 공이 휴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므로, 공이 낙생역(洛生驛)에서 송별하였다. 증별시(贈別詩) 2장(章)이 있다. 퇴계는 차운(次韻)하여 답해서 말하길, “경치 좋은 곳으로 돌아가서 보배라 자랑코자, 그대 주신 여의주 한 쌍을 소매 속에 넣어간다오(絶境歸時堪?異, 驪珠雙贈袖中携)”라고 하였다.

? 12월 10일, 함경도 염찰어사(咸鏡道廉察御使)에 배수되었다. 상감께서 정원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셨다. “올해에는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



33세, 갑진(甲辰), 중종 39년, 인종 즉위년(1544)

? 정월 15일에 독서당에 있었다. 하서 김인후 공의 중시(贈詩)에 이르길, “임금을 요순 만들고 백성을 요순시대 사람 만들려 하니, 그대와 더불어 가히 담론할 만하구려(君民堯舜志, 與子可堪論)”라고 하였다.

? 2월 14일, 홍문관 교리(弘文?校理) 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편수관(兼春秋?編修官)에 배수되었다.

? 2월 29일,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배수되고, 겸직은 종전과 같았다.

? 3월 18일, 조강(朝講)때 입시(入侍)하여, 동궁(東宮)이 ?서전(書傳)?을 강하여 마친 뒤, 이 우부빈객(右副賓客) 허자(許磁), 사서(司書) 노소재 수신(盧蘇齋 守愼)과 함께 문장의 뜻을 해설하였다.

? 3월 27일, 조강에 입시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

? 3월 28일, 조강에 입시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 4월 3일, 세자시강원 좌문학(世子侍講院左文學)에 배수되었고, 겸직은 종전과 같다.

? 4월 23일, 석강(夕講)에 입시하여 ?강목(綱目)?을 강하였다. -----

? 4월 24일, 조강에 입시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 5월 5일, 조강에 입시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

? 5월 14일, 조강에 입시하여 ?서전?을 강하고, 요속(僚屬)과 시강원에 돌아와 한데 모였다. -----

? 5월 27일, 판서공(判書公)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송별하며 부의(賻儀)를 내리셨다. 성 안에서 상복을 입었는데, 중추에 퇴계 이황 공이 압구정 뒷산에 올랐다가 공을 추억하는 시를 지어, “지난해 등잔불 켜고 책상머리에서 벗하였더니, 책을 읽으려다가 그대가 도리어 곁에 있는 듯 생각이 드는구려. 미륵의 모습과 하해 같은 도량, 성안의 가까운 거리에서도 모습을 보기 어렵다니(去年燈火伴書床, 欲讀思君却置傍. 彌勒形貌河海量, 城中咫尺阻音光)”라고 하였다. 이 시의 세 번째 구절은 공의 참 모습을 그려내었다.

? 9월 17일, 모친 정부인(貞夫人)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또 부의를 보내었다.

? 10월 20일에 고(考)와 비(?)를 여주(驪州) 백양동(白壤洞) 선영 안 정좌(丁坐) 벌에 합장하였다.



35세, 병자(丙子), 명종 원년(1546)

? 8월 15일, 부모의 묘도(墓道)에 비갈(碑碣)을 세웠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판서가 명을 짓고, 동종(同宗)의 동고(東皐) 김로(金魯) 교리가 글씨를 썼다.

? 12월에 상기를 마쳤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화산군의 모든 것이 잘 정리되고 있습니다.

김용주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용주
작성일

  대부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