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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김방경) 4 - 박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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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4-11-05 06:49 조회1,44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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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측근정치와 여원관계


전쟁 이후 김방경의 정치적 지위는 절정에 달했다. 1276년(충렬왕 2) 김방경이 원나라에 갔을 때 충렬왕은 원나라 중서성에 글을 보내 김방경의 공로를 포상해 호두금패(虎頭金牌: 원나라에서 장수에게 주었던 호랑이 머리 형태의 금으로 만든 패)를 지급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김방경은 원에서 상당한 예우를 받았는데 귀국했을 때도 충렬왕이 직접 맞이했다. 이러한 김방경의 성장은 강화파의 정치적 성장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고려 전기와 같은 사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므로 충렬왕의 입장에서도 이들과 힘을 합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방경은 무고 사건을 당한다. 1276년(충렬왕 2) 다루가치 석말천구(石抹天衢)의 관사에 익명서가 날아들었다,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사랑을 받지 못하자 무녀를 시켜 제국대장공주(帝國大長公主)를 저주했다는 것과, 김방경이 제안공 숙, 이창경,이분희, 박항, 이분성 등 43명과 함께 반란을 도모해 강화로 들어가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정화궁주는 김방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원래 정화궁주는 충렬왕의 왕비였는데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결혼 관계가 맺어져 충렬왕이 공주와 결혼하자 밀려난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국대장공주와 정화궁주 사이에 긴장이 없을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정화궁주가 제국대장공주를 저주했다는 익명서가 날아들자 정화궁주를 가두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근거 없는 무고임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김방경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도 근거가 없어 사건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다.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된 인물들은 정치적 입장이 상당히 다른 사람들이어서 이들이 반란을 목적으로 규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더구나 이 사건은 익명서로 고발된 것으로 고발자 조차 알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타격을 입은 것은 김방경 같은 강화파 신료였다. 이때 유경이 제국대장 공주를 찾아가 눈물로 탄원해 사건이 해결된 것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국내 정치를 주도하려 하던 충렬왕이나 고려 전기의 사대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강화를 추진했던 강화파로서는 일본 침략 이후 고려에 남아 있던 원나라의 원수부나 다루가치 그리고 고려인 부원배를 몰아내는 것이 고려의 국가적 독자성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충렬왕도 이 사건의 국문을 맡은 다루가치가 국내 정치의 주도권을 차지할까봐 염려스러워 사건을 조기에 종결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1277년(충렬왕 3)에 김방경은 또다시 무고 사건을 겪었다. 이번에는 전대장군 위득유(韋得儒), 중랑장 노진의(盧進義), 김복대(金福大)가 김방경이 반란을 계획한다고 흔도에게 고발한 것이다. 충렬왕은 무고하고 생각했지만 고발장이 들어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경, 원부 등에게 명령해 흔도, 석말천구와 함께 국문하게 했다.

국문 과정에서 위득유 등의 고발은 무고임이 밝혀졌다. 사실 이들 고발자들은 삼별초 난과 일본 침략에 참여했다가 김방경의 지휘와 논공에 불만을 품고 무고한 것이었다. 충렬왕은 한희유(韓希愈) 등 12명이 무기를 반납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 곤장을 때리고 모두 석방해 사건을 종결지었다. 처음부터 무고였으므로 다른 죄목을 찾을 수 없었다. 이번 사건도 흔도와 석말천구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염려한 충렬왕에 의해 조기에 종결되었다.

하지만 1278년(충렬왕 4) 사건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비화되었다. 부원배 홍다구(洪茶丘)가 김방경 사건을 듣고 중서성(中書省)에 요청해 직접 와서 국문을 맡은 것이다. 또 흔도 역시 위득유의 입장에 근거해 아뢰니 황제가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함께 국문하라고 명령했다. 국문은 봉은사에서 이루어졌는데 특히 홍다구의 심문이 매우 잔혹했다.

홍다구가 개입한 뒤 이 사건의 본질은 분명해졌다. 홍다구는 김방경이 원나라에 모반하려 했다는 진술을 하게 해 고려를 위기에 빠뜨려 국가의 독자성을 침해하려 했던 것이다. 김방경도 이러한 속셈을 알고 있었기에 결코 거짓 자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건은 뜻밖에도 고려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 되었다. 쿠빌라이는 홍다구를 원나라로 소환하고 충렬왕이 직접 와서 사정을 아뢰도록 명했다. 이에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 세자 등과 함께 원나라로 갔고, 이어 김방경도 명령을 받고 노진의, 위득유 등과 함께 대질심문을 받기 위해 원나라로 갔다. 그런데 노진의는 연경(燕京)으로 가다가 죽었고, 위득유는 원나라 중서성의 심문을 받았으나 조리가 맞지 않아 웃음거리가 되어 무고가 명백해졌다. 위득유도 며칠 있다가 죽었다. 또다시 김방경은 무고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충렬왕과 고려 지배층에게 원수부, 다루가치 그리고 특히 부원배가 고려 국정에 개입하는 상황을 계속 용납하면 고려의 독자성이 큰 침해를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인식시켜주었다. 그래서 충렬왕은 쿠빌라이를 만나 이러한 여원 관계의 외교 현안에 대한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일본 정벌을 자청했다. 이어 홍다구 군대의 소환 및 고려의 내정을 다른 간섭 없이 자이 직접 관장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뜻밖에도 쿠빌라이는 흔도의 군대도 소환하고 다루가치도 파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다루가치의 소환은 매우 획기적인 조치로, 이는 그동안 원나라가 강요해오던 6사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즉 고려왕이 원나라의 직접적인 간섭 없이 내정을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쿠빌라이가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은 고려가 더 이상 원나라에 반역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원나라 세력과 부원배의 직접적인 국정 간여를 막고자 했던 충렬왕의 외교적 목적이 달성된 셈이었다.

그런데 국내 정치 상황은 김방경 같은 강화파의 멋대로 되지 않았다. 충렬왕이 정치를 주도하기 위해 측근세력을 양성하고 그들을 통해 정치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충렬왕은 즉위하기 전에 원나라에 있을 때 함께 따라갔던 신료들을 중심으로 측근세력을 형성했다. 즉위 뒤 홀치(忽赤:왕실을 호위하는 일을 담당한 군사 조직)라는 친위군 조직을 성립하고 시종(侍從)했던 신료들을 배치했다. 특히 시종 신료 중에는 역관이나 내료(內僚)들이 많았는데, 충렬왕은 통문관(通文官)을 설치해 역관을 양성하고 또 원래 7품까지만 관직을 받을 수 있도록 제한된 내료에게는 고위 관직을 주어 이들을 측근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원나라에 바칠 중요한 공물인 매 사육을 담당한 응방(鷹坊)의 인물이나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를 따라온 공주의 비서격인 게링구(怯怜口)도 측근세력이 되었는데, 특히 이들 게링구는 공주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충렬왕은 이들 측근세력에게 고위 관직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패(賜牌)를 주어 많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원래 사패는 전쟁 이후 황무지가 되어버린 토지를 경작할 목적으로 지급한 것이었는데 충렬왕은 이것을 측근세력에게 줌으로써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해주었다.

그런데 여원 외교의 성과를 바탕으로 정치 주도권을 확보한 충렬왕은 측근정치를 한층 강화해갔다. 이번 행차에 따라갔던 신료들 가운데 신분에 흠이 있는 자들과 내료들이 한품(限品)을 뛰어넘어 벼슬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비칙치(必?赤)와 신문색(申聞色)이라는 측근 기구까지 두었다. 이렇게 되자 국정 운영 방식을 놓고 다른 신료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계속되는 연재 잘 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