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方慶 열전 10 (원종복위와 반역 저지② : 58-5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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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16 01:51 조회1,734회 댓글0건본문
2002년 1월 27일 모임을 대비해서 충렬공 휘방경 할아버지의 행적을 고려사열전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근거자료는
1300년 이진 찬 [김방경 묘지명]
1350년 안진 발 [김방경 행장]
1392-1454년 김종서, 정인지 등 편수 [고려사 김방경열전]
안동김씨 대동보 (초보 : 1580 경진보)
김방경 연구 석사학위논문 3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기타 자료를 참고로 하고 있습니다.
金方慶 열전 10 (원종복위와 반역 저지② : 58-59세)
1269년 (원종10, 58세) 入元하여 원종폐위 표문 바침 (★2차 入元). 동지樞密院사, 御史臺부
▣ 김방경 연구 (이상철, 1986, 청주대)
그러나 김방경이 뒷날 최고의 권력자로 대두하는 것은 이후에 작용하는 몇가지 중요한 계기와 여건에 크게 힘입은 때문이다. 그것은 임연의 원종 폐위사건과 최탄의 반란사건때 몽고와 고려왕실 및 세자 심(뒤의 충렬왕)과 밀착된 관계를 맺음으로써였다.
고려와 몽고와의 새로운 관계가 수렵될 무렵 김방경이 몽고와 관계되는 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원종원년 (1260) 출배별감이 되면서부터였다. <고려사 세가 권25 원종원년3월 戊辰조>
이보다 앞서 태자 전은 몽고에 강화를 맺기 위해 가 있었고 (고종46년 1259) <고려사 세가 권24 고종46년하4월 甲午조> 6월에 고종이 승하하자 태손 심이 국사를 권람하였는데 <고려사 세가 권25 원종조> 이등해 3월 태손이 개경으로 환도하기 위하여 대장군 김방경을 출배별감으로 삼았다.
여기서 뒷날의 충렬왕과 김방경과의 연관관계를 볼 수 있으며, 또 원종5년 (1264) 국왕의 친조가 실현되어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5년8월 癸丑조> 양국의 친선관계는 더욱 친밀하게 되었으며, 원종은 몽고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동년 12월에 귀국하였는데, 이듬해 김방경을 사은사로 몽고에 보냄으로써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6년춘정월 乙未조> 몽고와 김방경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고려는 왕실의 주도 아래 몽고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지만 김준, 임연 등 무신집권자가 몽고와의 화친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여 복잡한 정정 속에 쌓여 있었다. 원종9년 (1268) 12월에 임연은 김준을 제거하고 새로운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였고 이듬해 1월 고려는 이 사실을 몽고에 알리고 이어 4월에 세자 심이 몽고에 입조하였다.
그런데 왕권과 임연의 권력이 서로 대립하는 마당에서 6월에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왕제 안경공 창을 받들어 왕으로 삼았다. <고려사 세권 권26 원종10년6월 乙未조>
이 사실이 귀국중이던 세자 심에게 알려지자 심은 몽고로 되돌아 갔으며, 이에 몽고가 폐위사건을 상문하자 임연이 추밀원부사 김방경을 몽사와 함께 몽고에 가게 하였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0년 9월 庚戌조>
그러나 결국 임연은 몽고의 간섭으로 원종을 11월에 복위시킬 수 밖에 없었다. <고려사 권26 원종10년 11월 甲子조>
이에 원종은 복위하자 원에 두 번째로 입조하여 세자 심의 혼인을 요청하고 세자와 함께 귀국하였다. 이제 원종과 몽고 왕실과의 유대는 더욱 굳어지고 고려 국왕의 지위는 몽고의 지원을 받아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정치적으로 복잡한 사건이 전개될 때 김방경은 왕실과 더욱 깊게 밀착될 수 있었다. 앞서 김방경이 원에 가 있을 때 임연의 배반 소식을 들은 세자가 몽고에 청병하므로, 몽고가 몽가독에게 군사를 주어 임연과 내통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떠나게 하므로 세자가 어렵게 김방경을 인선하여 몽가독과 함께 가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18 원종11년 춘정월조>
이렇게 하여 김방경은 뒷날 충렬왕이 될 세자와 더욱 가까워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정국이 소란한 틈을 타서 서북면 병마사영의 기관인 최탄 등이 임연의 반역에 편승하여 임연을 평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0년 동10월 乙亥조>
그러나 내심 그가 노린 것은 몽고에 항부하여 서북면 일대의 지역을 바치고 여기에 몽고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일종의 독립정권을 수립하여 그 실권을 장악하자는 것이었다. 최탄의 이 계획은 성공하여 몽고는 이 지역에 대한 특권을 인정해 주고 병력을 주둔시켜 그를 보호하였다.
이로써 서경에 동녕부가 설치되고 장관인 총관에 최탄이 임명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7 P378-379 탐구당> 한편 동녕부의 설치로 사태가 매우 긴박해지자 당시 대도에 체재하고 있던 원종은 서경을 회복하여 주기를 청하고 최대한으로 몽고와의 친선과 유대를 강화하여 그 비호 아래 국왕으로서의 자기권력을 옹호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세자 심의 혼인을 청하고 임연을 제거하기 위한 원병을 요청하고 귀국하였음은 전술한 바 있다.
이에 앞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임연등은 사태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몽고와 싸워 대결할 결의를 정하고 있었다. 이때 김방경이 몽가독과 더불어 서경에 이르니, 최탄이 임연의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몽가독과 함께 비밀리에 사냥을 구실로 왕경을 취하고자 하였으나, 김방경은 이를 저지하여 고려를 보호할 수 있었다. <고려사절요 권18 원종11년 춘정월조>
세자 심이 몽고에 입조한 동안 발생했던 임연의 원종 폐위사건은 세자의 적극적인 대몽활동으로 환원된 셈이며, 이를 계기로 고려 왕실은 몽고세력을 등에 지고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고려 왕실은 외세를 배경으로 아직까지 대립적인 위치에 있던 무신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와같이 무신정권 퇴조기에 고려 왕실이 외세를 등지고 그 권위를 회복하려고 하는 동안 무인으로서의 김방경은 왕실의 측근으로 부상하여 크게 출세할 수 있게 되었으며, 최탄 등이 반란을 일으켜 왕경을 치고자 할 때 이를 저지함으로써 고려를 보호하고 나아가 자신의 출세 기반을 마련하였다.
▣ 김방경 연구 (윤애옥, 1992, 성신여대)
김방경은 그후 형부상서 추밀원부사를 역임하였으며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임연의 원종폐위 사건때는 충렬왕을 도와 원종 복위에도 노력하였다. 김방경은 주지하듯이 삼별초의 진압과 일본원정에서 무공을 세움으로써 충렬왕 원년 (1274)에는 마침내 수상인 첨의중찬에 임명되었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그러나 그가 이렇듯 최고의 관직에까지 진출하는 것은 삼별초, 일본원정의 대공도 고려되었지만, 왕실 특히 충렬왕과의 관계가 크게 작용하였다고 보여진다. <김광철, 고려 충렬왕대 정치세력의 동향, 창원대논문집 7-1, 1985>
김방경은 앞서 말하였듯이, 원종10년 (1269) 임연의 원종폐위 사건때 세자 심(뒤의 충렬왕)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원종9년 (1268) 12월 임연은 당시 집권자인 김준을 제거하고 새로운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였다. 다음해 1월 고려는 이 사실을 몽고에 알리고 이어서 4월에 세자 심이 몽고에 입조하였다.
그런데 6월에 임연이 왕을 폐하고 왕제 창을 옹립하는 정변이 발생하였다. <고려사 권26 세가 원종10년6월 乙未조> 이 사실은 귀국 중이던 세자 심에게 알려졌고, 이에 세자 심은 몽고로 되돌아가 원병을 요청하는 등 원종 복위를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세자 심은 병사를 이끌고 고려로 돌아올 계획을 세우고 군사를 지휘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에 김방경이 발탁되어 임연 토벌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이때 김방경은 임연의 원종폐위 사건의 연유를 물으러 왔던 元使와 함께 원에 와서 충렬왕과 만나게 된 것이다.
김방경의 발탁은 시중인 이장용이 "김방경은 두 번이나 북계를 잘 다스려서 그 지방 민심을 얻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 <고려사 권 104 김방경전> 라고 하는 건의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세자 자신이 "그것이 내 마음에도 맞는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라고 한 것으로 보면 세자는 김방경을 매우 신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세자는 김방경을 무반출신이면서도 反임연적인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김방경은 원종10년 (1269) 임연사건을 고비로 하여 원종 및 당시 세자인 충렬왕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으며, 왕실 및 왕권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때에 국왕의 대몽책에 항거하는 사건으로, 임연의 원종폐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세자와 김방경의 관계가 성립되었음은 앞에서 살펴 보았다.
당시에 서북면 병마사 기관인 최탄, 한신 등이 임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자비령 이북의 6성을 들어 몽고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여러 고을의 수령들은 죽였으나, 김방경의 매부들인 박주장관인 강분과 연주의 장관인 권천 드 사람만은 예의에 맞게 예우하였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최탄은 그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려의 경군이 침노하려 한다." 하고 원에 군사 2천을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원은 당시 임연을 응징하기 위해서 동경에 동원된 병력을 서경에 진주시켰다. 이는 최탄의 위세를 뒷받침해 주는 동시에 임연에게 위압을 가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상기, 고려시대사, 서울대출판부, 1985, p470-472>
이에 김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으로 오니 서경지방의 父老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와서 김방경을 대접하고 울며 말하기를 "공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어찌 최탄, 한신과 같은 자의 반란이 일어났겠습니까? " 하였으며 최탄 등도 조석으로 와서 김방경을 만나고는 하였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이는 김방경이 2번이나 북계에 진무해 선정을 베풀어 민신믕 얻었기 때문이다.
최탄 등은 몽고 군대를 이용하여 고려의 허술한 틈을 타 몽가독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면서 변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으나 김방경은 이때마다 계책을 써서 그 음모를 저지시켰다. 이에 몽가독도 김방경의 충직성은 하늘에서 받은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 크게 존경하고 존중히 여겼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이와 같이 김방경은 최탄의 음모를 저지함으로써 고려를 보호하였고, 자신의 출세기반을 마련하였다.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김방경은 고려측의 군사적 실권자로서 원종복위에 적극 협력하였다. 임연이 원종를 폐위했을 때 폐위표문을 바치기 위해 入元하였던 김방경이 세자에게 협력하여 원종복위를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삼별초의 난을 적극 진압함으로써 고려왕실을 개경으로 환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원종복위나 개경환도의 문제는 무인정권의 강화도 체제 연장 및 항몽으로의 복귀냐, 아니면 왕권이 부활하여 몽고와 화친하느냐의 갈림길이었다. 이러한 갈림길에서 김방경은 왕정복고와 친몽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원종폐위를 막기 위해 원에서 파병하였을 때 김방경은 원 군사의 대동강 이남 진출을 적극 제지하였다. 또한 최탄, 한신 등이 원의 군사와 연결하여 개경을 점령하려고 모의했을 때에도 그는 이것을 적극 막았다. 이러한 그의 노력들은 고려가 원에 직속되어 관할되는 위기를 면하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1269년 (원종10, 58세) 그는 임연이 원종을 폐위했을 때 폐위를 보고하는 표문을 바치기 위해 제2차로 入元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세자와 결탁하여 원종을 복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한편 개경환도 정책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실권자인 무장 임연등이 중심이 된 개경환도 반대파의 반발이 거세었던 것이다. 반대파의 반발은 1269년 (원종10) 6월 마침내 원종폐위 사건으로 나타났다.
임연은 원종의 정책에 반발하여 원종을 폐하기로 마음먹고 宰樞를 모아 의논하였는데, 이때 시중 이장용은 그것을 막을 수 없음을 알고 遜位할 것을 말하였으며, 임연은 원종을 폐하고 그 동생 창을 세웠던 것이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0년6월 임진 을미>
왕을 교체시킨 임연 등은 元의 질책을 염려하여 원종이 질병으로 인해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준 것이라고 表文을 작성하여 사신을 보내 알리게 하였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0년7월 신해>
그런데 몽고에 입조하였다가 마침 이때 귀국하던 세자 (뒤의 충렬왕)가 표문을 가져가던 告奏使를 잡아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0년7월 정묘>
세자는 다시 元으로 들어가서 대장군 정자흥을 고려에 보내 부왕을 복위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또 세자가 元 황제에게 주청함으로써 원은 사신을 파견하여 원종 폐위의 사실 여부를 밝히기를 요구하며 원종폐위 반대의 의사를 표명하였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0년8월 갑술 무술>
고려측에서는 그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해 원종의 병환과 선왕의 유지에 의한 양위임을 알리는 표문을 지어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당시 樞密院부사로 있던 김방경이 대장군 최동수와 같이 원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0년9월 경술>
표문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원에서는 이미 세자에 의해 임연의 원종폐위의 진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절은 효과가 있을리 없었다. 세자는 몽가독에게 청병하여 군사를 출병시키려고 하였다.
이에따라 몽가독이 군사를 출병시키려 하였는데 원 중서성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요구하였다. 즉 몽가독이 서경에서 군사를 주둔하고 대군이 오기를 기다리면 임연이 이미 배반하였기 때문에 군량을 주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세자가 임연에게 당여하지 않은 사람을 데리고 함께 가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세자는 그런 사람을 얻고자 하였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이때 김방경이 그 일의 적임자로 추천되었다. 즉 이에 앞선 8월 세자를 달래어 귀국시키라는 임연의 요구에 따라 節日使의 명목으로 원에 들어가 있던 시중 이장용등은 이미 세자의 편이 되었는데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0년8월 갑술 및 열전 이장용전> 이때 김방경을 세자에게 추천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김방경은 두 번이나 북계를 진수하여 유덕이 있기 때문에 김방경이 아니면 그러한 일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자 역시 자신의 뜻과 같다고 하며 김방경에게 그 일을 맡겼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여기에서 김방경이 세자에게 발탁된 것은 상황이 절박하다는 점도 있었지만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그는 서북면 병마판관, 북계 병마사, 서북면 병마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재임기간 동안에 이곳의 인심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서북지역의 인심을 얻었는가는 다음의 사료가 말해 준다.
김방경을 상장군에 ----- (생 략)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폄출을 당했던 김방경은 서북면 여러 성의 지지로서 얼마안 가 오히려 승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던 이장용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장용은 김방경의 처남의 장인이었다.> 등은 김방경만이 서북지방에서 군량을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김방경이 이미 왕실과 인연을 맺고 있었던 점도 작용하였다. 그는 세자에게 출배별감으로 개경환도 준비를 명받은 바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세자에게 발탁되었고, 그 또한 세자의 요청대로 원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원 군사와 같이 귀로에 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김방경은 몽고군사와 함께 고려로 들어오는데 한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다음의 사료에서 볼 수 있다.
방경이 계책을 말하기를 "관군(몽고군)이 서경에 이르러 만일 대동강을 건너면 서울이 저절로 혼란하여져서 장차 변이 있을까 두려우니, 황제의 명을 받아서 대동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모두 좋다고 말하고 황제께 아뢰니 황제가 윤허하였다. <고려사절요18 원종11년 1월>
김방경은 원의 군사가 대동강 이남으로 진입할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6차나 침입한 적이 있는 몽고병이 고려 영내로 무분별하게 진입했을 경우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혼란을 우려하여 그것을 막고자 하였던 듯하다.
한편 원에서는 군사를 파견하는 동시에 다시 병부시랑 흑적 등을 보내어 직접 임연 등이 입조하여 진상을 밝혀야 하며 기한 안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군을 파견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이에 宰樞들이 임연의 집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으나 별다른 방법이 없었고 또 흑적도 원종을 복위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임연은 할 수 없이 다시 원종을 복위시켰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0년11월 임자 을묘 임술 갑자>
따라서 김방경과 원의 군사가 출병하여 오는 도중에 원종은 이미 복위되어 원에 입조하기 위해 들어오고 있었다. 임연 등의 원종 폐위사건은 5개월 만에 실패로 끝나고 원종은 복위하였는데 이러한 원종의 복위에 김방경은 군사적 실력자로서 세자를 도와 원종의 복위를 성공으로 이끄는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원종이 복위하여 입조하고 원제가 임연의 입조를 요구하자 임연은 이에 반기를 들었으나 이러한 와중에서 그는 등창이 나서 죽었다. <고려사 열전 권43 임연전>
복위한 원종은 원에 입조하여 원제의 신임을 더욱 두터이 한후 경자흥을 먼저 보내 개경환도를 지시하였다. 이것을 따르려는 것이 조정의 중신들의 대세였다.
그러나 임연의 뒤를 이어 권력을 계승한 아들 임유무는 조정의 대세를 막지 못하자, 제도에 수로방호사, 산성별감 등을 보내 백성들을 모으게 함으로써 개경환도를 막고 세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1년2월 을미>
그러나 이들은 지방의 안찰사등 왕명을 따르려는 세력의 반발에 부딪쳤다. 정국은 원종을 따라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세력과 임유무 등을 따라 이것을 막는 세력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원종이 귀국해 옴에 따라 김방경등 서북세력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서해도 안찰사 등이 원종을 추종함으로써 임유무를 세력을 잃고 급기야 살해되었다. <고려사 열전 권43 임연전> 이로써 정국은 원종과 김방경 등 개경환도파의 성공으로 일단락되었다.
한편 이때 권력장악을 둘러싼 한 차례의 모반사건이 발생하였다. 원종10년 10월 최탄, 한신 등이 임연의 원종폐위와 反元을 틈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고려가 땅을 휩쓸어 장차 깊이 해도로 들어가려 하므로 제성의 수령을 죽이고 上國에 들어가 고하고자 함"이라고 하면서 몽고에 투항을 내세웠다.
이들은 원종을 폐위한 임연을 주살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꾀했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세가 권26 원종10년10월 을해 경자> 그리고 서북면의 여러 성주를 죽이고 서북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김방경을 두려워하여 그의 妹壻인 박주수 강분과 연주수 권천만은 죽이지 못하였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리고 다음해 김방경이 몽고군과 함께 서경에 들어오자 최탄 등은 이들을 환대하였다.
더불어 최탄 등은 몽가독을 이용하여 권력을 쟁탈하려 했다. 그 자세한 전말을 아는데 다음의 사료가 도움된다.
연은 왕이 몽고 군사를 청하여 ----- (생 략) <고려사절요 권18 원종11년 1월>
최탄, 한신 등은 서북면병마사의 營吏로 있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몽가독이 세자의 요구에 의해 군사를 출정시켜 김방경과 같이 서북면에 주둔하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려 했다. 즉 이들은 몽가독의 군사를 빌어 反元을 꾀하는 임연을 제거하고 왕경을 점령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몽가독과 함께 있었던 김방경은 최탄, 한신의 반란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 살펴보자
오득공이란 ----- (생 략) <고려사절요 권18 원종11년 1월>
탄의 무리가 몽고 군사에 의지하여 ----- (생 략)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김방경은 몽고군이 대동강 이남을 넘어갈 수 없게 한 원제의 명령을 받아낸 것은 앞서 본 것처럼 바로 김방경 자신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이러한 몽고군을 이용한 변란을 미리 예측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몽가독이 최탄 등의 무리 외에도 왕경을 멸망시키려 하는 자들이 또 있다고 했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몽고군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무리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해 주기 때문이다. <이후 최탄 등은 임연 등을 제거하기 위해 서경을 진압해 줄 것을 몽고에 청하였다. 이로써 몽고에서는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최탄을 총관에 임명하여 자비령 이북의 땅을 몽고 영토에 편입시키고 말았다. <고려사절요 원종11년1월 및 고려사 열전 최탄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방경은 몽고의 침략을 막고 왕실을 보전하는 노선을 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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