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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 1773년부터 10년간, 연경 유리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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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07 22:55 조회1,6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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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당평전1 (2002, 유홍준, 학고재)

p.72

 

<사고전서> 편찬과 조선 북학파 학자들

---특히 이들이 연경을 드나들 때는 연경의 유리창이 최고로 번성할 때였다. 홍대용이 귀국한 지 8년이 되는 1773년(건륭 38) 부터 중국에서는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이라는 경이적인 대사업이 시작됐다. 이 사업은 "건륭 황제가 필생의 힘을 기울인 군신(君臣) 공동의 문화사업이었다." 10년간 361명의 석학을 동원하여 총 3만 6000책을 4질(秩) 제작하여 네 곳의 서고에 보관케 했다.

 

<사고전서>의 편찬은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본래 건륭제가 이 편찬사업을 벌인 목적은 금서(禁書)를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미증유의 이 학술사업으로 전국의 학자들이 연경에 모여 학술을 번창시킨 것이었다.

 

북학파들이 만난 학자들은 대개 <사고전서> 편찬위원들이었다. 박제가와 친했던 기윤(紀윤)은 <사고전서> 편찬의 총책임을 맡은 학계의 거물이었으며, 추사의 스승이 된 옹방강을 비롯하여 우리 학자와 긴밀하게 교류했던 이정원(李鼎元), 대심형(戴心亨) 등이 이 편찬사업의 담당자였다.

 

<사고전서>의 편찬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자연히 전국의 책들이 연경의 유리창 고서점가로 쏟아져 들어왔다. 엄청난 양의 책들이 배에 실려 연경에 들어오면서 유리창은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유리창에는 수십 개의 서점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는데 그중 조선 학자들의 단골서점은 오류서점으로 이집 주인 도상정은 조선 학자들에게 많은 책을 구해주고 정보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후지츠카는 조선북학파의 성장에는 오류서점 도씨를 마땅히 은인으로 기록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 학자들은 조선의 학문에 대해 대단히 어두웠다. 거의 무식하다고 할 정도로 무지했다. 여기서 잠깐 <사고전서>에 실린 조선 서적을 보면 사부(史部)에 정인지의 <고려사>,  필자 미상의 <조선사략> <조선지> <조선국지>등 4권, 집부(集部)에 서경덕의 <서화담집> 1권 등 5권밖에 실려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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