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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님과 진안 마이산 이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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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4-11-12 12:08 조회1,759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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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묘(馬+耳 山廟)

보국안민(報國安民)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실천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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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산이 지닌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이 고장과 결부된 정신적·상징적 바탕이 모두 마이산의 남부지역에 산재되어 있다. 이산묘와 금당사, 나옹암, 은수사, 돌탑군 등 용바위로부터 시작하여 두 봉우리 중간인 천황문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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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묘는 국조 단군왕검을 비록하여 四聖位, 40賢位, 34烈士位를 봉안한 사당이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호남지방은 본격적으로 의병운동이 없던 즈음 당시 유림의 태두(泰斗)였던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선생과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선생이 이 곳에 와서 분연히 민족혼을 일으켰다.
  이에 주변 지역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쇠미해가는 국운을 다시 세우고자 조선 태조가 머물렀다는 이 곳에 황단을 쌓아 위업을 기리는 한편 친친계(親親契)와 현현계(賢賢契)를 조직하여 창의(倡義)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고
호남 최초의 의병봉기가 여기서 출발하게 되었으니
바로 1907년 8월에 정재 이석용, 해산 전기홍(海山 全基泓)(장수군 번암의 전해산 장군) 등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우국 동지들이 의병 창의 동맹단(義兵 倡義 同盟團)이라는 의병대를 조직하여
이 곳 '용바위'위에 제단을 마련하고 소를 잡아 천지신명께 고한 뒤 거병하여 진안읍으로 진격한 것이 호남 의병의 효시(嚆矢)가 된 것이다.
  이런 중에 고종황제는 '비례물동(非禮勿動)'이라는 어필을 내려 격려하였다.(회덕전 소장)


isan3.jpg   이 뜻을 받아 양계(친친, 현현)의 유지들은 결사동맹의 의지를 더욱 굳히고자 1924년 3월 산벽(山壁)에 이름을 각자(刻字)하고 이산 정사(精舍)와 회덕전(懷德殿)을 짓기로 결성 이듬해 완공하였다.(회덕전 ▶)
isan1.jpg   이후 이 곳에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려 하였으나 일제 강점의 암흑기라서 여의치 못하다가 광복후 1946년 회덕전에 단군왕검과 세종대왕을 더 봉안하고 1947년에는 개국 이래의 충신·현유(賢儒)를 모시기 위하여 영모사(永慕祠)를 건립하였고, 을사조약 이후 항일 순국하신 34열사 위(位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영광사(永光祠)를 건립하였다.

  이산묘에서는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산묘 건너편 암벽에는 고종황제의 어필과 白凡 金九 선생의 대형 친필 '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 大韓乾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산묘의 현판은 성제 이시영(李始榮, 임시정부 부통령) 선생의 휘호이며 영모사의 현판은 해공 신익희 선생의 휘호이고 영광사 현판은 백범 선생의 친필이다.
  초대 대통령이던 이승만의 광복기념비도 남아있다.

  이로써 이산묘는 가히 이 고장 민족광복의 성지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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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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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백범 선생의 필적은 무궁무궁하네요.
<필적으로 본 백범의 행적과 사상> 책자가 나와야 할텐데...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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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백범 선생의 새 자료를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