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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지 제출자료---김지(1455-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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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13 19:17 조회1,556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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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齋先生集卷之十三 

墓碣銘 

通政大夫前文義縣令金公墓碣銘

    公諱?。字次軒。安東金氏。新羅敬順王之後。敬順十八世孫曰方慶。高麗僉議中贊。封上洛公。勳業冠世。公之九代祖也。曾祖。司憲府監察諱遇周。祖。承文院判校諱丸。考。贈通政大夫戶曹參議行司憲府監察諱宗孫。?光州金氏。龍奮侍衛司大護軍諱虛之女。公生景泰乙亥。二十中司馬試。後累擧不第。絶仕宦意。弘治甲寅。以薦調恭陵參奉。累陞歷長興庫奉事,敦寧府直長,主簿。遷掌隷院司評。出爲靈山縣監。以憂去職。免喪後。歷司憲府監察,唐津縣監,義盈庫主簿。陞司饔院判官。屢轉軍資濟用兩監判官,忠翊儀賓兩府都事。最後。拜文義縣令。正德辛巳。以事罷。退居于淸州之吾根村。?閑十四載。嘉靖甲午。公年八十。國家推養老恩命。陞通政堂上官階。是年九月壬申。以疾卒。明年二月。?于居里鶩嶺西北原。公寬和淸儉。治邑。務恤民隱。家居。常以孝悌訓子孫。性疾惡。不能容人之過。必面責之。篤於睦族。閑日令辰。輒召親戚置酒。少長咸集。?歡而罷。好學居德。壽考康寧。品?高顯。慶延于後。子公藝登第宦貴。榮養備至。爲鄕黨所欽慕。世之享福如公者。寧有幾人哉。夫人柳氏。晉州望族。僉知中樞府事諱塾之女。少公三歲。與公偕老。享遐壽。氣尙康泰。能守公喪盡禮。亦世間所希有。生四男一女。長公傑。忠武衛副司直。先逝。次卽公藝。承政院同副承旨。次公?。東部參奉。次公衍。將仕郞。女適宣務郞金增壽。公與我先人。年契義重。世好應篤。而安國早孤零丁。及出仕途。亦多違阻。竟不及拜公之門。以修通家子弟之禮。常以爲恨。今因承旨君之請。不可以文拙辭。謹次來狀。略敍刻文。庶以補其慢罪。銘曰。

孰爲福基。積德之厚。孰爲福首。八?之壽。位雖未充。榮又發後。天報不?。昭告永久。



번역 : 국역 모재집

윤문 : 김주회 (2004.11.12)


통정대부문의현령김공묘갈명

공의 휘(諱)는 지(?)이며 자(字)는 차헌(次軒)이다. 안동김씨로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경순왕의 18세손 방경(方慶)은 고려조에서 첨의중찬으로 상락공(上洛公)에 봉작(封爵)되고 세상에 훌륭하였으며(勳業冠世) 공의 9대조이다. 증조는 사헌부 감찰인 휘 우주(遇周)이며 조(祖)는 승문원 판교로 휘는 환(丸)이며 고(考)는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 행 사헌부 감찰 휘 종손(宗孫)이다. 비(?)는 광주김씨이니 용분시 위사 대호군 휘 허(虛)의이다.


공은 세조원년 경태 을해에(1455년) 출생하여 20세에(147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는 여러번 낙제하여 벼슬할 의욕을 잃었는데 성종25년 홍치 갑인에(1494년) 천거(薦調)로써 공릉참봉이 되어 여러번 승진하여 장흥고 봉사, 돈녕부 직장 주부, 그리고 장예원 사평으로 옮겼다가 지방으로 나가서 영산 현감이 되었는데 상(喪)을 당하여(以憂) 퇴직하였다가 탈상(免喪) 후에 사헌부 감찰, 당진 현감, 의영고 주부 역임하고 사옹원 판관으로 승진하여 여러번 전직하여 군자와 제용 양감의 판관, 충익과 의빈 양부의 도사 그리고 최후에 문의 현령을 하였으나


정덕 신사년에(1521년, 중종16) 사건으로 퇴관해서 청주 오근촌에서 한가로이 살기를 14년 동안이었으며 가정 갑오년에(1534년) 공의 나이 80이 되니 국가에서 양노(養老)하는 은명(恩命)으로 통정대부 당상관으로 승계(陞階)하였다. 그런데 동년 9월 임신일에 질환으로 졸하여 이듬해 2월에 그 동리(洞里) 목령 서북원에 장사(葬事)하였다.


공은 천성이 관화(寬和)하고 청검(淸儉)하여 현읍(縣邑)을 다스리는 데는 백성들을 무휼(撫恤)하기에 힘썼으며 거가(居家)해서는 언제나 효제(孝悌)로써 자손들을 훈계하였고 사람을 관용하지 않는 과실을 미워하여 반드시 면책(免責)하였으며 종족에게도 돈목(敦睦)하여 가절(佳節)에 한가가 있으면 문득 친척들을 소집하여 노소가 다 모이면 술을 나누고 환락(歡樂)했던 것이다. 호학(好學)하여 덕행(德行)하며 수고(壽考)하고 강녕(康寧)하여 관위(官位)도 고현(高顯)하여 후손에게 경사(慶事)가 내렸다.


아들 공예(公藝)가 급제하여 고위(高位)로 영달(榮達)하여 봉양을 극진히 하니 향당(鄕黨) 사람들의 흠모(欽慕)하는 바가 되었다. 세상에서 복을 누리는 자로서 공과 같은 가 몇이나 되리오.


부인은 류씨(柳氏)이니 진주의 명족(名族)으로서 첨지중추부사 휘 숙(塾)의 인데 공보다 3세가 적었다. 해로(偕老)하여 고수(高壽)이지만 기력이 항상 강장(强壯)하여 공의 상사(喪事)에 예를 다했으니 또한 세상에 희유(稀有)한 일이다.


4남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공걸(公傑)이니 충무위 부사직으로서 공보다는 먼저 죽었고, 다음은 공예(公藝)이니 승문원 동부승지였으며 다음은 공언(公彦)이니 동부참봉이고 다음은 공연(公衍)이니 장사랑이다. 딸은 선무랑 김증수(金增壽)에게 출가(出嫁)하였다.


공(=김지)은 나(=김안국)의 선인(先人, =참봉 金連))과 연배로서 우의(友義)도 두터웠으니 응당히 세의(世誼)가 돈독(敦篤)해야만 할 것이나 나는 조고(早孤)하여 가세(家勢)도 영락(零丁)해졌고 벼슬길로 나가서도 또한 어긋나서 마침내 공의 문(門)에 진배(進拜)하여 통가자제(通家子弟)의 예의도 닦지 못한 것이 항상 한이었는데 지금 승지군(承旨君, =김공예)이 청하는데 졸문(拙文)이라고 해서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행장(來狀)에 의해서 대강 비문을 지었으니 이것으로써 태만한 죄를 사(辭)할까 하나이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무엇이 복의 기(基)냐? 적덕(積德)이 후(厚)함이며

무엇이 복의 수(首)냐? 80의 수(壽)함이며

위(位) 비록 미족(未足)해도 영광은 후에 나니

천보(天報)는 어김없이 영구히 밝으리라



■ 이문건( )의 양아록 (1997, 이상주 역, 태학사)


<성주이씨>

(이문건 부) 이윤탁+고령신씨 (부 신회 + 모 ★안동김씨) ---3)이문건---이온---이수봉

이문건 + ★안동김씨 敦伊 (부 ★김언묵, 조부 ★김수형)

(이문건 자) 이온 +경주김씨 鐘金 (부 김증수 + 모 ★안동김씨=★김지의 딸)

(이문건 아들) 이수봉


<제학공파>

김수형

--김언묵

----김석, 女안동김씨 敦伊(+이문건---이온)

------김충갑, 김효갑, 김우갑, 김제갑, 김인갑


<안렴사공파>

김지

--김공걸, 女안동김씨(+김증수---여+이온), 김공예, 김공언, 김공연



양아록의 저자 이문건 3대(이윤탁-이문건-이온)는 우리 안동김씨 문중과 매우 밀접합니다.


(이문건의 부)이윤탁의 처모가 안동김씨이고 ***정확히 누구의 딸인지 미확인


이문건의 배위는 안동김씨 敦伊로 (제학공파) 김언묵의 따님임. 즉 이문건은 김석의 매부이고, 김충갑 김효갑 김우갑 김제갑 김인갑의 고모부임


(이문건의 아들)이온의 배위 경주김씨 鐘金은 (안렴사공파) 김지의 딸임. 즉 이온의 처모가 안동김씨이고, 처 외조부는 현령공 김지임



p140 

世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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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봉 경무는 신해년(1551) 정월 초5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온은 자가 숙화이며 아명은 기성이다. 무인년(1518) 10월 23일 태어나서 정사년(1557) 6월 25일에 죽었다.

어머니는 김씨인데 이름은 鐘金이다. 병술년(1526) 6월 초6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증수요, 조부는 세균이다.



p133 

가족에 관한 글 - 아들 온과 손녀들

아들 기성은 이름이 온이며 자는 숙화이다. 정덕13년 무인년(1518) 10월 23일 인시에 주자동2)집 안방에서 출생했는데, 장모 김씨(=?김언묵의 배위) 와 여종 석금3) 등이 산관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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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수원의 내등촌에 사는 박옹의 딸에게 장가를 가서 딸을 낳았는데 곧 죽었으며 그 어미 또한 죽었다.


가정25년 병오년(1546) 가을에 청주 오근촌5)에 사는 김증수의 딸을 재취로 맞았는데, 그해 10월 그 어머니(=?)와 성주의 적소에 도착했다.

정미년(1547) 9월 18일 해시에 딸을 낳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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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6 

가족에 관한 글 - 자부와 손녀들

자부 김씨는 병술년(1526) 초6일 진사시에 태어났다. (한편 진시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할아버지는 김세균으로 계미년(1483)에 생원에 합격했으며, 돌아가신 나(=이문건)의 아버지(=이윤탁)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사삼품에 이르렀다.

아버지 증수는 자가 인보로, 청주(승지 김공예의 누이) 김씨에게 장가들어 가정을 이루니 자녀가 매우 번성했다. 자부 또한 혈기가 왕성하여 무병했다.





<디지털한국학>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1543(중종 38). 조선시대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연(連)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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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이듬해인 중종15년 이천 주촌(注村-지금의 부발읍 죽당리) <주질동(注叱洞-지금의 부발읍 줏골)>에 내려가 은일정(隱逸亭)과 동고정(東皐亭)을 짓고 후진들을 가르치며 은거하였다.


***1521년

김지는 정덕 신사년에(1521년, 중종16) 사건으로 퇴관해서 청주 오근촌에서 한가로이 살기를 14년 동안이었으며


이후 (1527년) /1528년(중종23) 여주 금사면 이포로 거주지를 옮기기까지 (8년) /9년간 이천에 살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성리학의 보급과 백성들의 교화에 노력하였다. 주고받은 많은 시와 문장이 모재집 속에 실려 있고, 이포에 있을 때도 이천을 자주 왕래하였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1537년(중종32) 20년간의 은거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벼슬길에 나가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좌참찬 대제학 판중추부사 세자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534년

공(=김지)은 나(=김안국)의 선인(先人, =참봉 金連))과 연배로서 우의(友義)도 두터웠으니 응당히 세의(世誼)가 돈독(敦篤)해야만 할 것이나 나는 조고(早孤)하여 가세(家勢)도 영락(零丁)해졌고 벼슬길로 나가서도 또한 어긋나서 마침내 공의 문(門)에 진배(進拜)하여 통가자제(通家子弟)의 예의도 닦지 못한 것이 항상 한이었는데 지금 승지군(承旨君, =김공예)이 청하는데 졸문(拙文)이라고 해서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행장(來狀)에 의해서 대강 비문을 지었으니 이것으로써 태만한 죄를 사(辭)할까 하나이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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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잘 공부합니다.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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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