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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方慶 열전 12 (연해주현과 진도의 삼별초 토벌① : 59-6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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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18 17:10 조회1,7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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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27일 모임을 대비해서 충렬공 휘방경 할아버지의 행적을 고려사열전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근거자료는

1300년 이진 찬 [김방경 묘지명]

1350년 안진 발 [김방경 행장]

1392-1454년 김종서, 정인지 등 편수 [고려사 김방경열전]

안동김씨 대동보 (초보 : 1580 경진보)

김방경 연구 석사학위논문 3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기타 자료를 참고로 하고 있습니다.









金方慶 열전 12 (연해주현과 진도의 삼별초 토벌① : 59-61세)





1270년 (원종11, 59세) 逆賊追討使, 홍친 홍기의 무고로 (★2번째 무고) 삭탈관작되었다가 다시 上將軍이 됨



1271∼1272년 (원종12∼13, 60∼61세) 진도 삼별초 공격 및 평정, 그 공으로 中書侍郞 平章事, 中軍行營 兵馬元帥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이 해 여름에 삼별초(三別抄-좌우 별초와 신의군의 통칭)가 반란을 일으켜 인민(人民)들을 강제로 몰아서 바다로 나가 남으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왕이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파견하여 추토사(追討使)로 삼았고 또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군사 60여 명을 인솔하고 몽고의 송(宋) 만호 등의 군대 천여 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해중(海中)에 이르렀더니 반적들의 배가 영흥도(靈興島)에 정박하고 있는 것이 바라보였다. 김방경은 이것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송만호가 겁을 내어 말리었으므로 반적들이 달아나 버렸다.



반적들 가운데서 도망쳐 온 남녀 노소 천여 명이 있었는데 송만호는 그들은 역적의 무리들이라 하여 모두 포로로 하여 데리고 돌아갔다. 그 후에 행성(行省)에다 돌려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돌아오지 못한 자가 상당히 많았다.







반적이 진도에 들어가 여기를 거점으로 하고 여러 고을들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으나 신사전은 토벌에 뜻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이미 재상이 되었으니 반적들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 이상 또 무슨 벼슬을 얻어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사전은 나주에 이르러 반적들이 육지로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달아나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전주 부사(副使) 이빈(李彬)도 역시 전주성을 포기하고 도망해 버렸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모두 도망간 죄로 면직당하였다.







김방경이 신사전 대신에 추토사로 임명되었고 몽고 원수 아해(阿海)와 더불어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반적을 토벌하게 되었다.



반적들은 나주성을 포위하고 또 군사 일부를 보내 전주를 공격케 하였다.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더불어 항복할 것을 상의하였는데 전주 사람들은 결정적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김방경이 전주로 가는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혼자 말을 타고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남으로 달려 내려가면서 먼저 전주에 공문을 보내기를 “아무 날에는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입성할 것이니 빨리 군량을 준비하여 기다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전주 사람들이 이 편지를 나주 사람에게 보이니 반적들이 이 말을 듣고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가버렸다. 이로부터는 다시 제멋대로 노략질을 못하게 되었다.



김방경이 토적사(討賊使) 상장군 변윤(邊胤), 장군 조자일(趙子一), 공유(孔愉) 등이 반적들이 금성(錦城-나주)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도 구원하지 않았던 사실을 탄핵하는 글을 왕에게 올렸고 섬에다 귀양 보내자고 요청했으나 왕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만 철직만 시키었다. 공유는 환관들과 교제하고 결탁하였으므로 죄를 면하였던 것이다.







김방경이 아해와 더불어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하고 진도를 건너다 보면서 진을 치게 되었는데, 반적들은 약탈해 간 선박들과 군함들에다 모두 괴상한 모양을 한 동물들을 그리었으며 그 배들이 강을 덮을 듯이 많고 그 그림자들은 물 위에 비치어 얼른거렸고 게다가 움직이고 돌아가는 것이 날아다니는 듯 빨라서 힘으로는 당해 내기 어려웠다.



매양 싸울 때마다 반적들의 군사들이 먼저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면서 돌진해 오곤 하여 호상간에 승부가 거듭되고 여러 날 서로 대치해 있게 되었다.







때마침 반남(潘南) 사람 홍찬(洪贊), 홍기(洪機)가 아해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과 공유 등은 비밀리에 반적과 서로 내통하고 있답니다.”라고 하였다. 아해는 그들을 붙잡아다 가두고 달로화적에게 공문을 띄웠더니 달로화적이 김방경에게 돌아오라고 하여 홍찬 등과 대질을 시켰고 참지정사 채정(蔡楨)을 김방경의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아해는 김방경을 철쇠로 얽어 매게 하고 졸병 50명으로 하여금 서울(개경)에로 압송해 가게 하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원통하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슬퍼서 우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달로화적이 왕에게 말하기를 “홍찬 등이 말한 바는 허망한 일이니 이자들을 응당 감옥에 가두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김방경을 석방하여 주었다.



왕이 즉시로 달로화적에게 청하여 다시 김방경으로 하여금 반적들을 토벌하게 하고 그에게 상장군의 벼슬을 주면서 위로하여 보내었다.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니 반적들이 모두 배를 타고 기치들을 수없이 펼쳐 꽂았으며, 징소리와 북소리가 바다를 끓어 번지듯 요란하였다. 또 성 위에서는 북을 울리고 아우성을 치며 큰 소리를 내어 기세를 돋우고 있었다.



아해는 겁을 내어 배에서 내려서 나주에로 퇴각하여 주둔하려고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수가 만일 후퇴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약점을 보여 주는 셈이다. 적들이 승승장구하여 들여 닥치면 누구가 그 창 끝을 당해 낼 것인가? 또 황제가 이 사실을 듣고 책임을 묻는 날이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라고 하니 아해가 감히 퇴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김방경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 들어가니, 반적들은 전함으로 역습을 해왔는데 원군(몽고군)은 모두 퇴각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결승은 오늘 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적진에 돌입하니 적들이 그가 탄 배를 포위하여 사방에서 압박하면서 자기 진영 측으로 몰아 갔다.



김방경과 군사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화살도 돌도 다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 모두가 화살에 맞아 일어나지 못하였다. 김방경이 탄 배가 진도의 기슭에 닿게 되니 적의 한 군졸이 칼날을 번득이면서 배 안에 뛰어들었다. 김천록(金天祿)이 짧은 창으로 그를 찔러 넘겼다.



김방경이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반적들의 손에 죽겠느냐?”라고 하면서 바다에 몸을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위병이었던 허송연(許松延), 허만지(許萬之) 등이 그것을 말리었다.



이때 부상당한 군사들이 김방경이 위급한 것을 보고 소리를 내지르면서 일어나 급히 싸웠으며 김방경은 호상(胡床)에 앉아 군사들을 지휘하였는데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때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몽충(蒙衝-전함)을 타고 돌격해서 싸움이 조금 풀리게 되어 포위를 뚫고 나오게 되었다.



김방경이 장군 안세정(安世貞), 공유(孔愉) 등이 구원하러 오지 않았던 죄를 들어서 그들을 베려고 하였으나 아해가 말리었다.









이듬해에 왕이 안세정과 공유의 관직을 박탈하고 또 아해가 위축되어 비겁하게도 싸우지 아니 하였던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는 아해를 파직시키고 흔도를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으며 홍찬 등을 참형에 처할 것을 조서로 명령하였다.



김방경이 흔도와 더불어 전략을 토의하고 진도를 공격하게 되었다.

김방경과 흔도는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으로부터 쳐들어가고,

영녕공(永寧公)의 아들 왕희(熙)와 왕옹(雍) 및 홍다구(洪茶丘)는 좌군(左軍)을 거느리고 장항(獐項)으로부터 들어갔으며

대장군 고을마(高乙쬱)는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동면(東面)으로부터 쳐들어가니

군사들의 탄 배가 모두 백여 척이나 되었다.



적(賊)군은 벽파정에 모여서 중군의 진공을 막으려고 하였다. 홍다구가 먼저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협공(挾攻)하니 적군은 놀라서 붕괴하게 되어 우군이 있는 데로 물러갔는데 우군은 또 그것을 두려워하여 중군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때에 적군은 토벌군의 배 2척을 노획하여 탄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보다 앞서 관군은 적군과 자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므로 반적들이 관군을 경시하고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관군이 용감히 공격하게 되자 반적들은 모두 처자들을 버린 채 도망갔다. 그리하여 적들이 포로하였던 강도(江都-강화도)의 선비들과 여인들, 그리고 각종의 보물들 및 진도의 주민들이 몽고 군대의 포로로 된 자가 많았다.



김방경은 적군이 붕괴되는 것을 보고 그를 추격하여 남, 여 만여 명과 전함 수십 척을 획득하였는데 남은 적들은 탐라로 달아났다. 김방경이 진도에 들어가서 쌀 4천 석과 재물, 보배, 기구, 병기 등을 얻어 모두 왕경에로 운반해 가게 하였고, 역적들에게 강요당하여 항복하였거나 추종하였던 양민(良民)들은 모두 자기 생업에 다시 종사하게끔 하고 개선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게 하고 그의 공적을 평가하여 수태위 중서 시랑 평장사의 벼슬을 더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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