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의 일생과 시대적 배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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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1-19 18:25 조회2,109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의 일생과 시대적 배경 -2-
[2]위도(韋島)의 갯벌에서
몽고군은 이후로도 거의 매년이다시피 고려에의 침공을 자행하였다.
몽고군은 고려가 강도에서 개경으로 천도할 것을 요구하고 사신의 입조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려 조정과 무신집권자 최씨 일가는 몽고와의 강화를 극력 회피하고 계속 강경한
대항정책을 폈다. 이로써 내륙에서는 많은 재물, 보물을 약탈당하고, 대장경이 불타고,
황룡사 구층탑도 잿더미로 화해 버리고 말았다.
강도 정부에서는 몽고병의 침략에 대비하여 북계의 백성을 황해의 여러 섬으로
들어오게 하였으니, 이때 서북면 병마판관 김 방경은 35세였다. 그 동안 김 방경이 겪어낸
수많은 시련은 그 모두가 백성들과 함께 겪은 뼈저린 것이었다.
김 방경은 그 당시 황해의 위도(韋島; 지금의 정주군)에 있었다. 그는 위도의 지형이
평탄하여 당연히 경작할 수 있는 곳임에도 10여리나 해조(海潮)가 들어 개간할 수 없음을
알고 백성을 시켜 제방을 쌓게 하며, 거기에 곡식을 파종케 하였다. 백성들은 몽고병의
말발굽을 피해 위도로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애초에는 김 방경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엔 괴롭게 여겼던 백성들도 가을에 이르러 크게 수확을 거두자 이에
합심일치하여 개간에 힘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섬에는 우물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육지로 물을 길러갔다가 가끔 몽고병에게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김 방경이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드니 물 걱정도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서북면 병마판관으로서 김 방경이 수행한 일은 이와 같이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는 일이었다.
당시의 고려 무신 정부는 일반 백성들로부터 이완되어서 조국 강산이 몽고병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는데도, 매일 호화스러운 연회나 베풀고 학정을 펼 따름이었다.
김 방경은 서북지방 일대의 백성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당시의 부패한
관리들과는 달리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후일 김 방경이 좌천당했을 때에는 서북 여러 성의 백성들이 진정서를 올려서
그의 선정(善政)에 보답한 일도 있었다.
바로 이럴 즈음에 집권 30년 만에 최 이가 죽고 서자인 최 항이 뒤를 이었다.,
최 항은 탐욕적이고 시기심이 많고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많은 조신을 살해하거나
내 쫒고, 무뢰한과 악승(惡僧)들을 모아 문도(門徒)로 삼고, 화식(貨殖)을 업으로 하여
향민을 착취하고 관리를 능욕하였다.
한편 몽고 정부로부터 고려국의 입조를 촉구하는 사서(使書)가 잇달았으므로 형식적으로
왕족들을 왕자. 왕제라 하여 입조시킨 일이 있었고, 몽고의 사절단이 들어와서 재물을
요구하여 국고를 탕진케하는 사례가 생겼다. 그동안에도 몽고병은 수확기인 가을철이 되면
침입해 들어와 곡물을 약탈하고 양민을 죽였다.
최 항이 집권한 후 1250년 정월, 출륙의 태도를 표시하는 임시 방편으로써 강화의 대안에
있는 승천부(昇天府; 海倉浦부근) 백마산 아래에 새 궁궐은 짓기 시작했다.
1253년 몽고병은 에구(也古)를 주장(主將)으로 하여 4차로 침입해 왔다.
이때 고종은 야별초 80명을 거느리고 강화도 대안의 승천부 새 궁궐에서 개전(開戰) 이래
처음으로 몽고 사신을 접견하였다. 또한 몽고병은 충주성의 김 윤후(金允侯)의 끈질긴 항
쟁에 공략치 못하고 그 해 12월에 마침내 북상해 버리고 말았다.
몽고는 다시 1254년 7월 왕자 안경공(安慶公) 창( )의 내조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하여 5천의 군사로 제5차 침입을 해왔으니, 이해 몽고병에게 포로가 된 남녀는 무려 20만
6천 8백 명에 이르고 살육된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1255년 6월 제6차 침입이 있었고, 1257년 정월 제7차로 노략질을 해왔다.
그리하여 1259년 6월 30일 고종이 재위 46년 만에 승하할 때까지 몽고군은 파상적으로
고려 내륙의 산하를 짓밟았다. 섬으로 피난을 한 백성들은 양식이 떨어져 아사자가
길을 메웠고, 내륙에 남아 있던 사람은 처참하게 몽고병의 화를 당했다.
도병마사(都兵馬使)가 하루 쌀 한 되씩을 주었어도 아사자는 끊이지 않았고,
따라서 조부(租賦)는 감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경제는 산과 바다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피난소로부터 가까운 거리의 사람에게는 육지로
나가서 경작을 하고 들어오게 하는 통경(通耕)을 허가하고, 먼 거리의 사람은 섬
안으로 불러들여 개간을 장려하고 궁사원전(宮寺院田)의 특별 경작관계를 일시
개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몽고군이 해마다 가을이면 쳐들어와서 곡식을 모조리
베어 넘기니 이제는 백성도 성병(城兵)도 산 속에 숨는 길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이에 고려로서는 최후 수단이자 유일한 방편으로써 몽고와의 화친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1258년 주전(主戰) 강경파인 최 항이 죽고, 그의 비첩 소생인
최 의(崔 )가 뒤를 이었다.
이때 최항의 종이었던 별장 김 인준(金人俊) 등이 최 의를 죽였으니, 이로써 4대 60여 년에
걸쳤던 최씨 전정(專政)은 그 종막을 고하고, 고려 정부에는 비로소 새 기운이 조성되었다.
형식적이나마 정권을 고종에게 넘기니 왕정이 복고되었다.
이에 고려의 군신은 마침내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여 출륙친조(出陸親朝)하기로 결정했다.
1258년 겨울부터 1259년 봄에 이르는 기간은 고려로서는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렸던 때였다.
고려는 1258년 12월 29일 박 희실(朴希實) 등을 몽고에 사신으로 파견하였고, 1259년
4월21일 태자 전( )이 강화를 출발하여 몽고로 들어갔는데,
그 해 6월 30일에 고종이 승하했던 것이다.
또한 그 해 7월에는 몽고 현종이 진중에서 죽고, 쿠빌라이가 세조(世祖)가
되어 실권을 잡았다. 다음해인 1260년 태자 전은 귀국하여 즉위에 올라 원종이 되니,
이때로부터 고려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전란 속에서 민족과 함께 동고동락하였던
김 방경도 이로부터 어려운 시대의 지도급 인사로 가장 중요한 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3]편 계속 됩니다.
[2]위도(韋島)의 갯벌에서
몽고군은 이후로도 거의 매년이다시피 고려에의 침공을 자행하였다.
몽고군은 고려가 강도에서 개경으로 천도할 것을 요구하고 사신의 입조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려 조정과 무신집권자 최씨 일가는 몽고와의 강화를 극력 회피하고 계속 강경한
대항정책을 폈다. 이로써 내륙에서는 많은 재물, 보물을 약탈당하고, 대장경이 불타고,
황룡사 구층탑도 잿더미로 화해 버리고 말았다.
강도 정부에서는 몽고병의 침략에 대비하여 북계의 백성을 황해의 여러 섬으로
들어오게 하였으니, 이때 서북면 병마판관 김 방경은 35세였다. 그 동안 김 방경이 겪어낸
수많은 시련은 그 모두가 백성들과 함께 겪은 뼈저린 것이었다.
김 방경은 그 당시 황해의 위도(韋島; 지금의 정주군)에 있었다. 그는 위도의 지형이
평탄하여 당연히 경작할 수 있는 곳임에도 10여리나 해조(海潮)가 들어 개간할 수 없음을
알고 백성을 시켜 제방을 쌓게 하며, 거기에 곡식을 파종케 하였다. 백성들은 몽고병의
말발굽을 피해 위도로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애초에는 김 방경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엔 괴롭게 여겼던 백성들도 가을에 이르러 크게 수확을 거두자 이에
합심일치하여 개간에 힘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섬에는 우물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육지로 물을 길러갔다가 가끔 몽고병에게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김 방경이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드니 물 걱정도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서북면 병마판관으로서 김 방경이 수행한 일은 이와 같이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는 일이었다.
당시의 고려 무신 정부는 일반 백성들로부터 이완되어서 조국 강산이 몽고병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는데도, 매일 호화스러운 연회나 베풀고 학정을 펼 따름이었다.
김 방경은 서북지방 일대의 백성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당시의 부패한
관리들과는 달리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후일 김 방경이 좌천당했을 때에는 서북 여러 성의 백성들이 진정서를 올려서
그의 선정(善政)에 보답한 일도 있었다.
바로 이럴 즈음에 집권 30년 만에 최 이가 죽고 서자인 최 항이 뒤를 이었다.,
최 항은 탐욕적이고 시기심이 많고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많은 조신을 살해하거나
내 쫒고, 무뢰한과 악승(惡僧)들을 모아 문도(門徒)로 삼고, 화식(貨殖)을 업으로 하여
향민을 착취하고 관리를 능욕하였다.
한편 몽고 정부로부터 고려국의 입조를 촉구하는 사서(使書)가 잇달았으므로 형식적으로
왕족들을 왕자. 왕제라 하여 입조시킨 일이 있었고, 몽고의 사절단이 들어와서 재물을
요구하여 국고를 탕진케하는 사례가 생겼다. 그동안에도 몽고병은 수확기인 가을철이 되면
침입해 들어와 곡물을 약탈하고 양민을 죽였다.
최 항이 집권한 후 1250년 정월, 출륙의 태도를 표시하는 임시 방편으로써 강화의 대안에
있는 승천부(昇天府; 海倉浦부근) 백마산 아래에 새 궁궐은 짓기 시작했다.
1253년 몽고병은 에구(也古)를 주장(主將)으로 하여 4차로 침입해 왔다.
이때 고종은 야별초 80명을 거느리고 강화도 대안의 승천부 새 궁궐에서 개전(開戰) 이래
처음으로 몽고 사신을 접견하였다. 또한 몽고병은 충주성의 김 윤후(金允侯)의 끈질긴 항
쟁에 공략치 못하고 그 해 12월에 마침내 북상해 버리고 말았다.
몽고는 다시 1254년 7월 왕자 안경공(安慶公) 창( )의 내조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하여 5천의 군사로 제5차 침입을 해왔으니, 이해 몽고병에게 포로가 된 남녀는 무려 20만
6천 8백 명에 이르고 살육된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1255년 6월 제6차 침입이 있었고, 1257년 정월 제7차로 노략질을 해왔다.
그리하여 1259년 6월 30일 고종이 재위 46년 만에 승하할 때까지 몽고군은 파상적으로
고려 내륙의 산하를 짓밟았다. 섬으로 피난을 한 백성들은 양식이 떨어져 아사자가
길을 메웠고, 내륙에 남아 있던 사람은 처참하게 몽고병의 화를 당했다.
도병마사(都兵馬使)가 하루 쌀 한 되씩을 주었어도 아사자는 끊이지 않았고,
따라서 조부(租賦)는 감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경제는 산과 바다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피난소로부터 가까운 거리의 사람에게는 육지로
나가서 경작을 하고 들어오게 하는 통경(通耕)을 허가하고, 먼 거리의 사람은 섬
안으로 불러들여 개간을 장려하고 궁사원전(宮寺院田)의 특별 경작관계를 일시
개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몽고군이 해마다 가을이면 쳐들어와서 곡식을 모조리
베어 넘기니 이제는 백성도 성병(城兵)도 산 속에 숨는 길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이에 고려로서는 최후 수단이자 유일한 방편으로써 몽고와의 화친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1258년 주전(主戰) 강경파인 최 항이 죽고, 그의 비첩 소생인
최 의(崔 )가 뒤를 이었다.
이때 최항의 종이었던 별장 김 인준(金人俊) 등이 최 의를 죽였으니, 이로써 4대 60여 년에
걸쳤던 최씨 전정(專政)은 그 종막을 고하고, 고려 정부에는 비로소 새 기운이 조성되었다.
형식적이나마 정권을 고종에게 넘기니 왕정이 복고되었다.
이에 고려의 군신은 마침내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여 출륙친조(出陸親朝)하기로 결정했다.
1258년 겨울부터 1259년 봄에 이르는 기간은 고려로서는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렸던 때였다.
고려는 1258년 12월 29일 박 희실(朴希實) 등을 몽고에 사신으로 파견하였고, 1259년
4월21일 태자 전( )이 강화를 출발하여 몽고로 들어갔는데,
그 해 6월 30일에 고종이 승하했던 것이다.
또한 그 해 7월에는 몽고 현종이 진중에서 죽고, 쿠빌라이가 세조(世祖)가
되어 실권을 잡았다. 다음해인 1260년 태자 전은 귀국하여 즉위에 올라 원종이 되니,
이때로부터 고려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전란 속에서 민족과 함께 동고동락하였던
김 방경도 이로부터 어려운 시대의 지도급 인사로 가장 중요한 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3]편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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