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의 전고(典故)와 옛 예식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11-17 23:16 조회1,620회 댓글1건본문
충렬공께서는
전고(典故)를 많이 알고, 박식(博識)하고 규범(規範)이 있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차착이 없었다고 하고
옛 예식을 많이 알았다고 여러 기록에 보이고 있습니다.
*典故 : 典據(말이나 문장 따위의 근거가 되는 문헌상의 출처)가 되는 선례나 故事
*古事, 故事 : 옛적의 일, 옛적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일, 또 그것을 표현한 어구, 이전부터 전하여 오는 규칙과 定例
▶▶▶고려 인종(재위 1123~1146)때 엮어 1234년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하는 <상정고금예문>은 충렬공께서도 많이 보셨다고 생각되어 찾아 보았습니다.
상정고금예문 (詳定古今禮文)
고려 인종(재위 1123~1146) 때 최윤의(崔允儀) 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 고증하여 50권으로 엮은 전례서(典禮書). 이 책은 현존하지 않으나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의 해설에 의하면, 역대조종(歷代祖宗)의 헌장(憲章)을 모으고, 한국의 고금예의와 중국 당(唐)나라의 예의를 참작하여 왕실의 면복(冕服)·여로(輿輅)·노부(鹵簿) 등의 의례와 백관(百官)의 장복(章服)에 이르기까지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李奎報)가 진양공(晉陽公)에 책봉된 최이(崔怡)를 대신하여 지은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를 보면, 최윤의 등이 엮은 《상정예문》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사이에 책장이 탈락되고 글자가 이지러져 내용을 참고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최이의 선친인 최충헌(崔忠獻)이 2부를 만들어 1부는 예관에, 다른 1부는 자기 집에 두었다. 뒤에 몽골침입으로 인하여 최충헌 소장본만 남게 되자 주자(鑄字)로 28부를 찍어 여러 관사(官司)에 나누어 간직하였다고 한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상정고금예문》을 1234년에 활자로 찍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한국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추정된다.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박식(博識)하고 규범(規範)이 있어 일을 결단(決斷)함에 백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으며 서도(書道)는 가전(家傳)한 법(法)이 있고 시(詩)에도 또한 능(能)하여-----
▣ 고려사절요
경자 26년(1300), 원 대덕 4년
○8월에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졸하였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아 문제를 잘 처결하였고, 근검함으로써 자신을 단속하고, 옛 친구를 잊지 않았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제3권 p426<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
사람됨이 충직(忠直)하고 믿음성이 있으며 관후(寬厚)하여 작은 절차에 구애하지 않았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으며, 자신을 근검(勤儉)하게 다루었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
원종 4년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되었다. 이 시기에 좌승선(左承宣)으로 있던 유천우(兪千遇)는 오랫동안 정권(관리 임명권)을 잡고 있었다. 양반 관료들이 모두 그에게 아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번은 김방경이 길 가는 도중에서 유천우를 만나 말을 탄 채로 읍례(揖禮-두 손을 약간 올리고 고개를 숙이는 인사)를 하였더니 유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조삼 봉명이므로 3품 이하의 인원들은 모두 피마(避馬-말을 딴 방향으로 돌리어 경의를 표시하는 예식)를 하는데 그대는 어찌 그런가?”라고 따지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그대와 나는 다 같이 3품관이요 또 조삼 봉명이므로 나는 예식대로 인사하려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한참이나 따지고 책망하던 중에 김방경은 “시간이 많이 갔구만!”하고 드디어 결판도 내지 않고 먼저 가버렸다.
-----
2년에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왕이 중서성에 편지를 보내기를 “나의 신하 김방경은 귀국의 명령을 받들어 진도와 탐라를 공격하여 반적들을 격파하였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전함들을 수리, 건조하며 군사 위력을 떨침에 있어서도 참으로 그 공로가 많았다. 그러므로 호두 금패(虎頭金牌)를 주어서 일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격려가 되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폐백을 올리는 예식을 끝내고 궁전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망송유주(亡宋幼主)가 김방경의 뒤에 왔는데 두 사람이 유주의 소매를 붙잡고 인도하였다. 황제가 유주를 황태자의 아랫자리에 앉게 하였다.
예식을 맡은 관리가 김방경과 송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좌석 차례를 결정해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는 의리를 아는 나라요, 송나라는 반항하다가 힘이 모자라게 되어서야 항복한 나라이니 어찌 똑같이 취급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송나라의 복왕(福王)은 유주의 조부 항렬이며 또 나이도 늙었으니 김재상(방경)의 윗자리에 앉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김방경의 아랫자리에 앉히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김재상은 군공이 있으니 호두 금패를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동쪽 나라(고려) 사람으로서 금부(金符)를 차게 된 것은 김방경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귀국 후 다시 김방경을 중찬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은 10근을 주었다.
-----
26년에 그는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는 89세였다. 김방경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진실하고도 후하였으며 도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들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아들, 조카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예의에 맞게 언동을 취하였으며 옛 예식을 많이 알았으므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차착이 없었다. 자기 몸을 잘 거두고 근면하고 절약하는 기풍을 견지하였으며 대낮에는 드러눕는 일이 없었고 늙었으되 머리칼이 검은 채로 남아 있어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능히 견디어 내었고 병환이라곤 없었다. 또 옛친구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누가 죽었다 하면 곧 조상하러 갔으며 일평생 임금의 잘못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현직에서 물러가 한가롭게 된 이후에도 나라일을 집안일 근심하듯 우려하였고 무슨 중대한 문제를 의논할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김방경에게 물어 보았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 |
김항용 |
---|---|
작성일 |
충렬공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재조명 및 자료 정리, 감사합니다.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제안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