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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의 문과 급제자(1) <정(좌)랑공 김구(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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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4-11-19 15:02 조회1,41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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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촌의 문과 급제자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가미실에 세거하고 있는 안동김씨(문온공파)는 족보상 문과 급제자를 4분 배출하였습니다. 역사자료로 확인되신 분이 <정(좌)랑공(김구 金?, 음성공(진강 震綱)의 손자)>, <승지공(김시경 金始慶, 음성공의 6세손)>, <지평공(김복인 金復仁, 음성공의 9세손)> 세분이시고, 미확인된 분으로 <참판공(김남구 金南龜, 음성공의 7세손)> 한 분이십니다.

  이에 그동안 모아오던 문과급제자 세 분의 자료와 기록을 소개합니다.


【김구(金?)】


  자는 방숙(方叔), 호는 청창(聽蒼), 본관은 안동, 문온공(文溫公) 척약재(척若齋) 구용(九容)의 9세손으로 1582년(선조15) 임오(壬午) 3월26일 생, 1627년(인조 5) 정묘(丁卯) 4월28일 향년(享年) 36세에 졸(卒)하시다. 1603년(선조 36) 계묘(癸卯) 생원, 1613년(광해군 5) 계축(癸丑)에 진사(進士), 1615년(광해군 7) 을묘(乙卯)에 식년시(式年試) 병과16(丙科16)에 합격, 승문참하(承文參下)를 하시다가 광해정란(光海政亂)으로 고향 충주(☞지금의 음성 감곡 상촌)로 물러나셨고 인조개옥(仁祖改玉) 후 예조정랑<禮曹正郞-문과방목 ☞壬申譜에는 예·형 양조좌랑으로 기록되어있고 구전으로도 좌랑공이라 하고 있다)·군수(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증조부(曾祖父)는 병사공(兵使公) 윤종(胤宗)·조부(祖父)는 음성공(陰城公) 진강(震綱)·부(父)는 상촌(桑村) 입향조(入鄕祖) 하양공(河陽公) 대하(大河)·외조부(外祖父) 이양형(李陽亨)이다.

  배(配)는 숙인(淑人) 상산김씨이다. 1586년(선조 19) 병술(丙戌) 7월28일에 나시어 1658년(효종 9, ☞壬申譜의 1958년은 오기이다) 무술(戊戌) 11월27일 수(壽) 73세(☞임신보의 63세는 오기이다)에 돌아가시다. 부(父)는 참의(參議) 김홍미(金弘微)이시고 처 외조부(妻外祖父)는 경북 안동 하회마을 서애 류성용 선생의 형님이신 겸암 류운용 선생이시다.

  후사(後嗣)가 없어 아우 계(棨)의 맏이 영희(永熙)에게 입후(立後)하였다.

  유고(遺稿) 2권이 집에 전하고 있다.

  묘(墓)는 음성공 묘역 우측(서쪽) 아래로 20m~30m를 내려가면 우측 하양공 묘역 뒤편으로 50m~60m 거리에 있는데 임좌(壬坐)이다. 석물은 옛 모습 그대로이고 봉분에도 호석이 없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배계절에는 망주석 한 쌍이 있다.

《參考文獻 : 壬申譜/1992·家譜·陰城郡誌/1979·디지탈한국학 조선조방목》

(묘)좌랑공(구)2.jpg

<정(좌)랑공 김구 묘소>

(상석)좌랑공(구).jpg

<정(좌)랑공 김구 묘소 상석>

[김홍미(金弘微)]

  조선 중기의 문신 김홍미<金弘微 ; 1557(명종12)∼1604(선조37)>의 자는 창원(昌遠), 호는 성극당(省克堂),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아버지는 옥과현감(玉果縣監) 범(範)이고 처부(妻父)는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이다. 조식(曺植)과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진사가 되고, 1585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발탁되고, 홍문관정자·저작(著作), 예문관검열 등을 거쳐 부수찬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형인 홍민(弘敏)과 함께 사림으로 영예를 누렸다.

  1589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그 뒤 복관되어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될 무렵에는 경상좌도도사가 되고, 이어 교리 겸 시강원문학을 거쳐 이듬해 경연관·응교·사간·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있을 때,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李舜臣)을 탄핵하여 파면하게 하고 원균(元均)을 통제사로 삼게 하는데 가담하였다. 그 뒤 좌부승지·훈련도감제조를 거쳐, 형조참의·대사간·이조참의·승문원부제조 등을 역임하다가 1598년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이듬해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를 거쳐 1604년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 큰 비가 내려 백성이 많은 재난을 당하였다. 이에 약한 몸을 이끌고 수재로 죽은 자의 조문과 굶주린 자의 진휼에 힘써 직무에 충실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상주(尙州)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고 문집 5권씩이 전해진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谿谷集, 德山師友淵源錄》


[겸암선생문집(謙庵先生文集)]

  柳雲龍(朝鮮)著. 6卷 年譜 4冊 木板本 31.3×22cm. 四周雙邊 半郭:20.6×16.6cm. 有界 10行 18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附錄으로 {卷1}에는 年譜, {卷2}에는 行狀(1603年 8月 女壻通政大夫前府使金弘微撰, 墓誌(柳成龍撰), 墓碣銘幷序(禮曹判書 李植撰), 祭文 15편(張顯光 등), 謙岩精舍記(17 57年)가 각각 수록되어 있다.

☞ 겸암(謙庵) 유운용(柳雲龍) 행장(行狀)은 사위 성극당(省克堂) 김홍미(金弘微)께서 지으셨다.


[挽金? : 김구를 조의함]

師門恩契最知心。(사문은계최지심) 스승의 문하에서 은혜로 맺어 그 마음을 잘 알아

行誼平生夙所欽。(행의평생숙소흠) 행동 규범을 평생 우의로 대하여 일찍이 흠모했네.

泉裏相逢應不遠。(천리상봉응불원) 황천에서 서로 만날 날이 멀지 않은데

挽章何必更悲吟。(만장하필경비음) 조의하는 글에 꼭 슬픈 가사만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출전 : 草廬先生文集卷之十 詩》

☞ 초려(草廬) : 이유태<李惟泰 1607(선조 40)~1684(숙종 10), 호 초려(草廬)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병자호란 후 일체의 벼슬을 거절하고 학문과 후진의 교육에만 몰두하였다. 효종 즉위 후 잠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곧 귀향하여 "기해봉사(己亥封事)"-당시의 국정 전반에 걸친 정치개혁안-을 작성하여 올림. 김집·송시열·송준길·이유태·권시를 충청 오현(忠淸五賢)이라고 함.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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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문온공파란 하단의 &lt;음성공파&gt;에 넣겠습니다.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우와!!!
상촌의 역사가 새로 쓰여지는 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