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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方慶열전-15 (탐라에서 삼별초토벌① 6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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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22 17:32 조회2,1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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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휘方慶 할아버지의 행적을 고려사열전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근거자료는

1300년 이진 찬 [김방경 묘지명]

1350년 안진 발 [김방경 행장]

1392-1454년 김종서, 정인지 등 편수 [고려사 김방경열전]

안동김씨 대동보 (초보 : 1580 경진보)

김방경 연구 석사학위논문 3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기타 자료를 참고로 하고 있습니다.









金方慶열전-15 (탐라에서 삼별초토벌① 62세)





1273년 (원종14, 62세) 行瑩中軍兵馬元帥, 탐라도 정벌 공으로 門下侍中.

元帝의 부름으로 입원 (★3차 入元), 수대사 開府儀同三司 門下侍中 상주국 判御史臺事











▣ 김방경 묘지명 (1300, 이진 찬)



이번 싸움에서 도망한 적도들이 다시 탐라로 들어가 멀고 험함을 믿고 방자한 짓을 하여 또 공으로서 행영중군 명마원수를 삼아 癸酉 4월 28일에 전함을 이끌고 큰 바다를 건너 적진을 소탕하니 마치 큰 산이 계란을 누르는 것 같은지라. 이로부터 삼한이 소생하는 희망이 보였다.



원조에서 청하여 침전에 모시고 가곡을 울리며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위로하고 수대사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 상주국 판어사대사를 봉하였다.



그해에 원제가 조서를 내려 초청하여 광한전의 승상서열에 앉히고 대연을 베풀고 원제께서 친히 탁상의 진미를 주시고 이어서 금부와 금안장과 백은정과 많은 폐백을 상으로 내리시니 천하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부러워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삼한에도 인물이 있음을 가히 알게 되었다.











▣ 김방경 행장 (1350, 안진 발)



그때 적들은 탐라(=지금의 제주도)에 들어가서 안팎으로 성을 쌓고 그 지형이 험하고 견고함만 믿고 날로 더욱 창궐하여져 때때로 나가서 노략질을 하며 안남까지 나가서 그 수령 공유를 사로잡아 가니 해변부락이 모두 피해를 입게 되었다.







심지어 경기도까지 침입하여 도로가 불통하고 운명이 거의 위태로우니 왕이 이를 심히 근심하여 군신과 더불어 의논하였으나 감히 계획을 세우는 자가 없는지라 왕은 다시 公으로 하여금 행영중군 병마원수로 삼고 다시 병졸과 수군 1만여명을 훈련시켜서 상국원수 흔도 다구와 더불어 반남현에 주둔시키고 장차 출발코저 하니



경상도와 충청도의 전함은 모두가 풍우로 인하여 키로 까불 듯이 뒤흔들려 바다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전라도의 배 1백 60척을 써서 그해 여름 4월에 출발하여 추자도에 도착해서 바람을 기다려 바다를 나가다가 한밤중에 질품이 일어나서 지향할 바를 몰랐는데 날이 밝아오자 이미 탐라가 가까워졌으나 풍랑이 소용돌이 쳐서 진퇴의 거점을 잃어버렸다.







이때 公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며 이르되 "사직(=나라)의 안위가 이 한번 거사에 달려 있으니 오늘의 일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는가?" 고 하니 조금 있다가 풍랑이 홀연히 멈추어졌다.





적들은 돌모퉁이 바위틈을 이용하여 겹겹으로 복병하고 큰 소리로 뛰어나오며 우리 왕사에 항거하거늘 公이 일어서서 크게 외치되 "모든 배들은 일제히 전진하라" 하니 이때 한 용사 고세화가 적진으로 뛰어들자 모든 병졸들이 승승장구하여 달려가니 적은 위세에 눌려 중루로 달아나기에 아군은 모두 외성을 넘어서 중루의 밑에 모여 불화살을 쏘니 연기와 불꽃이 사방에서 일어나 적군은 크게 혼란하게 되었다.





이때 적 가운데서 투항해 온 자가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이미 궁지에 빠져 각자가 도망쳐 가려고만 하니 입성만 하면 가히 소탕할 수 있다." 고 하기에



公이 급히 제장을 지휘하여 입성하니 부녀자들은 통곡을 하는지라 公이 이르기를 "그 괴수는 섬멸하지만 위협에 못이겨 추종한 자는 다스리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그 괴수 김윤서 등 6명을 잡아 길거리에서 목을 치고 두목 35명을 사로잡으니 적의 무리 가운데서 투항하는 자가 1천 3백여명이나 되어 여러 배에 나누어 태워 보내고 탐라의 원주민들은 안도감을 가지고 전과 같이 살도록 하고 한편 군대를 주둔시켜 지키도록 하였다.







5월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서 삼견원에 도착하여 다시 나주의 남쪽으로 이둔하여 김윤서의 무리 35명의 목을 베고는 큰 잔치로 군사들을 위로하고 여러 주의 군사를 해산시켜 고향으로 돌려 보내 주었다.



6월에 개선하여 왕궁에 나아가 하례를 드리니 왕이 잔치를 베풀어 위로함이 대단히 흡족하였다.





癸酉년 (1273)에 수대사 문하시중을 배명하고 그해 가을 7월에 황제의 부름을 받고 대궐로 가니 황제가 수문장에게 칙령을 내려 들어오게 하여 서열을 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게 하여 어찬을 하사하고 또 금안장과 채복과 금,은촛대 등을 하사하며 그 총애함이 비할 바 없더니 돌아올 때는 開府儀同三司로 배명되었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반적들이 탐라에 들어가서 내성과 외성을 쌓고 그 험준함을 믿고 더욱 더 날뛰게 되었으며 때때로 나와서는 노략질을 하였으며 안남(安南)의 수령 공유(孔愉)를 붙잡아 가지고 갔다. 이리하여 바닷가 지방은 소란하게 되었으며 반적들의 침입 범위는 경기(京畿)에까지 확대되었고 도로가 제대로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왕은 이것을 심히 우려하여 14년에 김방경을 행영 중군 병마 원수(行瑩中軍兵馬元帥)로 삼아서 보내었다. 김방경이 다시 군사들을 훈련하여 수군과 함께 만여 명을 거느리고 흔도, 홍다구와 더불어 반남현(潘南縣)에 주둔하고 장차 탐라로 떠나려 하였는데 각 도(道)들에서 온 전선들은 모두 바람에 까불리므로 전라도에서 온 1백60척 만을 가지고 떠났다.







함대가 추자도(楸子島)에 들러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줄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밤중에 돌연히 거센 바람이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모르게 되었다. 새벽이 되어 보니 벌써 탐라에 가까이 와 있었다. 그런데 바람과 파도가 세차서 전진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고 후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김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나라의 안녕함과 위태로움이 이번 토벌 사업 하나에 달려 있는데 오늘 일의 성패는 나에게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풍랑이 멎었으므로 중군(中軍)은 함덕포(咸德浦)로부터 진공해 들어갔다.







반적들은 바윗돌 사이에 복병을 배치하고 있다가 뛰쳐 나오며 고함을 치면서 중군의 진격을 막았다. 김방경이 소리를 높여 꾸짖으면서 여러 배들이 동시에 진격하도록 독촉하니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먼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적진에 돌입해 들어갔고 여러 군사들이 그 기세를 따라 서로 늦을세라 돌진하였으며 장군 나유(羅裕)는 정예한 군사들을 이끌고 곧 뒤따라 이르러서 적을 살상. 포로한 것이 심히 많았다.



한편 좌군(左軍)의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揚島)로부터 반적들의 보루를 직충해서 쳐들어가니 반적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처럼 몰려 자성(子城)에 밀리어 들어갔다. 관군이 외성을 넘어서 들어가 화시(火矢) 4발(發)을 놓으니 그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 찼으며 반적의 무리들이 크게 혼란에 빠졌다.







그러던 중 반적의 편에서 넘어와 투항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반적들이 이미 형세가 궁박해져서 달아날 것을 꾀하고 있으니 빨리 쳐서 점령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반적들의 괴수 김통정(金通精)은 그 일당인 70여명을 인솔하여 산중으로 도망해 들어가고 적장(賊將) 이순공(李順恭), 조시적(曹時適) 등은 옷을 벗고 자기가 저지른 죄를 달게 받겠다는 뜻을 표시하면서 항복해 왔다. 김방경이 여러 장군들을 지휘하여 자성에 들어가니 선비들과 여인들이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다만 큰 괴수들만 죽이려 할 뿐이니 너희들은 겁내지 말라!”고 하고 그 우두머리인 김윤서(金允敍) 등 6명을 붙잡아다가 네거리에서 참형에 처하였고 그들과 친당(親黨) 35명을 사로잡아 항복한 반군 1천3백여 명과 함께 배에다 나누어 싣고 귀환하였다. 그리고 탐라의 주민들은 모두 평안히 이전처럼 안심하고 살게 하였다.









이에 흔도는 몽고 군사 5백 명을 남겨 두고, 김방경 역시 장군 송보연(宋甫演)과 중랑장 강사신(康社臣), 윤형(尹衡)으로 하여금 경군(京軍) 8백 명과 외별초(外別抄) 2백 명을 영솔하고 탐라에 남아서 평온한 질서를 유지하게 하였다.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다가 나주 땅에 와서 사로잡아 왔던 친당(親黨)들을 베어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 어떠한 죄과도 추궁하지 않았다. 또 크게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그의 아들 김수(綬) 및 지후(祗候) 김감(金憾),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 승리를 보고케 하였다.



왕은 김수를 대장군으로, 김감을 공부 낭중으로, 유보를 중랑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또 고세화가 맨먼저 올라가서 적진을 함락시켰다 하여 그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고 그 밖의 인원들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김방경이 개선하여 돌아올 때에 왕은 광평공 왕혜로 하여금 교외에 나가서 위로하려 하여 승선 박항(朴恒)을 보내 그 다음날에 서울에 들어오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방경은 즉시 길을 재촉하여 그 날로 들어가 왕을 뵈었다.



왕이 아주 후하게 위로해 주고 특별히 홍정(붉은 띠)을 그에게 주었고, 장사(將士)들에게 대규모의 연회를 차려 주었으며,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성대(省臺)에게 지시하기를



“제주도의 반적들은 실로 제압하기가 어려웠기로 심지어 몽고에까지 응원 부대를 청하여 이것을 토벌하게 되었다. 만약 군사 기간이 오래 되었더라면 그 군기, 군량의 수송비가 한없었을 것이며 큰 바다를 건너가는 데에서 의외의 변고가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므로 종묘와 사직(국가)의 안전함과 위태로움이 실로 이번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중군 원수 김방경은 진도 전역 때부터 탐라 토벌에 이르기까지 전심 전력하여 온갖 간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제기되는 일들을 옳게 하였다. 전함, 병기, 군량이 잘 준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대군을 독려, 인솔하여 흉악한 무리의 괴수를 쳐 없애었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니 그 공적이야말로 영원토록 잊지 못할 바이다.



또 병마사(兵馬使) 변윤(邊胤)은 먼저 남방으로 가서 여러 가지 사업들을 처리하였고 김방경과 함께 마음과 꾀를 합치어 싸웠으니 그 공훈이 특이하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주어야 할 상전(賞典)에 대하여 빨리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기타 군대와 전함을 인솔, 관리하였던 장령, 군사들 및 장교, 전군(典軍)들, 그리고 외별초(外別抄-지방에 있던 별초 군대)에게 줄 상전(賞典) 조건들에 대하여도 다 함께 시행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김방경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그 해 가을에 김방경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원나라로 갔는데 황제는 문지기를 시켜서 빨리 들어오라고 독촉하고 김방경을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기의 음식을 걷어서 김방경에게 주었으며 또 금으로 장식한 말 안장과 채단(綵緞)으로 만든 옷과 금, 은을 주었는바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다른 사람이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귀국하게 되자 황제는 그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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