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안동김문 詩·書·畵찾기♠ 발표자료 ③ (김순, 김구용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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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24 01:13 조회1,893회 댓글0건본문
지난해 12월부터 수집 분석하기 시작한 고려시대 선조 筆蹟과 墓誌銘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이번주 일요일 행사에서 [고려시대 선조 필적과 묘지명] 찾은 결과에 대해서 본인에게 주제발표를 하라는 하명이 있어 심적 부담이 매우 큽니다.
너무 복잡해서 자꾸 엉키고 정리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게시판에 게재하다 보면 정리가 될까 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양해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수정해야 하거나 보충할 자료가 있으신 종친께서는 많이 많이 지적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안동김문 詩·書·畵찾기♠ 발표자료 ③ (김순, 김구용 필적)
3. 문영공 김순
1) 문영공 김순 문헌기록
▣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자는 귀후. 본관은 안동. 상락공 김방경의 아들. 벼슬은 밀직부사
성품이 너그럽고 후했으며, 예서에 뛰어났다. 기예인을 두고 날마다 음악으로 소일했다. <고려사>
충렬왕24 戊戌 (1298)에 세운 동화사 홍진국존비는 金暄(김훤)이 짓고 밀직승지 김순이 썼으니 대구 팔공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 신고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김순의 동화사 碑書>
김순(1258-1321)의 본관은 안동. 자는 귀후. 고려 명장 김방경의 아들이요 김효인의 손자이다. 그래서 3대 書家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 되었다.
<고려사 세가35>에 의하면 "그의 천성이 寬厚하고 隸書를 잘 썼고, 聲技를 집에 두고 絲竹으로 낙을 삼았다"고 그의 서예와 풍류취미를 전하고 있다.
또 <金石評>에는 그의 書蹟이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 홍진국사 탑비에 남아 있다. 동 비문은 김훤이 지었다."
▣ 元代麗史資料集錄 (1997, 장동익)
제4절 불교에 관련된 기사
1. <高麗國大藏移安記> : 주남서 편 <天下同文> 전갑집7 (閔漬 作)
○ 著者
閔漬(1248-1326)는 고려 충렬왕대의 대표적인 문신으로서 충선왕이 세자시에 元에 宿衛할 때 정가신(?-1298)과 함께 수종신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충선왕에게 학문을 전수하면서 자주 元 세조의 부름에 응하여 고려의 사정에 대해 자문하기도 하였고, 교지정벌에 대한 獻議를 올려 원의 한림직학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에서 <천추금경록> <세대편년절요> <본국편년강목>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이들이 현존하지 않아 그의 학문적 성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85)
*85) 이제현, <민지 묘지명>,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 1991)
그 외 민지의 저술로 전해지는 것으로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금강산 시병서> <풍악산 장안사 사적기발> <보개산 석대기> 등이 김탄월 편 <유점사 본말사지> (유점사, 1942)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본 자료는 민지의 문학적 역량과 학문적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典據
<天下同文> 전갑집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1366)의 천하동문집7
○ 校勘
이 자료는 元의 周南瑞(주남서) *86)가 편찬한 <天下同文>에 수록되어 잇는데,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에도 본문이 축소된 채 수록되어 있다.
*86) 주남서(?-?) : 강서행성 길안로 안성인으로 자는 경수이고 향공진사 출신으로 <天下同文>44권을 편찬하였다.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 서문)
또 劉喜海(유희해)의 <海東金石存攷>26에는 "대덕10년9월 민지찬 김순서 재강원도 회양부 금강산"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26, p19514
<천하동문>과 <천하동문집>의 내용과 글자에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는 데, <천하동문>의 것이 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곧 <천하동문집>에는 모두에 찬자인 민지의 구체적인 관직 및 말미의 비문의 서자, 전액자, 입석자 등에 대한 기록이 모두 빠져 있다.
이러한 점을 보아 <천하동문>은 본문이 碑石에 새겨진 후에 이 비문을 수습하여 수록한 것을 알 수 있고, <천하동문집>은 천하동문을 바탕으로 모두와 말미를 삭제한 채 轉載하였던 것으로 짐직된다.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06년 (충렬왕32, 대덕10) 고려인 閔漬가 찬한 大藏經 移安記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철산경 (소경)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려의 大藏經이 元으로 수출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예로는 다음의 자료 2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봉화상 명본이 고려의 <금서법화경>을 구득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 외 이 시기에는 대장경의 수출만이 아니라 고려의 사경승들이 대거 원에 진출하여 수많은 대장경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 參考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706-717, 1986)
제7절 元瓘(원관, =김승용의 장인)에 관련된 기사
1.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이?, 옥금산혜인고려화엄교사지6)
○ 著者
閔漬 (1248-1326)
○ 典據
<옥금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7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14년 (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인데,
이의 찬자는 민지, 서자는 김순(1258-1321)으로서 이들 두 사람은 <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도 찬,서를 함께 하였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 *69)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69) 이는 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
이에 나타난 元瓘(?-?)은 첨의중찬 元傅의 아들로서 1298년 (충렬왕24, 대덕2) 11월에 지밀직사사 판도판서에 임명되었고, 1308년 (충선왕 복위년) 10월에 宰臣으로서 왕을 수녕궁에서 饗宴(향연)한 인물이지만 *70) 고려측의 자료에서는 그의 행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70) 고려사열전20, 원부
고려사 세가31 충렬왕24년 11월 경술, 세가33 충선왕복위년 10월 갑진
고려묘지명집성 <박거실처원씨 묘지명>, <원충 묘지명>
이 자료 및 다음의 자료를 통해 볼 때 그의 호가 退翁임을 알 수 있고, 충선왕의 퇴위 이후 왕을 수종하여 元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71)
*71)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인해 그의 아들 元忠이 충선왕으로부터 賜姓받게 되었을 것이다.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원충묘지명)
아울러 강남 지역에 진출하여 강절행성 경원로 >현에 위치한 천동사 *72) 및 항주의 고려혜인사에 대장경의 인본과 토지를 시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2) 이 천동사는 후일 충선왕이 임백안독고사의 무고를 피해 피신한 사찰이다.
2) 문영공 김순 필적 탐구
3-1. 동화사 홍진국존비 (1298, 김순 書)
○ 비 실물
- 현재 소재 불명
○ 탁본 실물
- 全面탁본 실물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소장기호 : 4046-2 (구 2198)
연대 : 1298 (고려충렬왕 24)
소재 : 서울 柳正秀 藏 舊탁본
규모 : 154.5×84.8
○ 탁본첩
- 탁본첩1
장서각소장탁본자료집1 : 1점 (비편 4점을 모아 1장으로 탁본)
<참고자료>
대동금석서
해동금석원
조선금석총람 상
한국금석전문 중세 하 (1984, 허흥식, 아세아문화사)
- 탁본첩2
대동금석서 1점
- 탁본첩3
금석청완 1점 (※항용종친 확인)
가)3P:비명제목6자(弘眞國尊碑銘)를 1행에 3자 2행에 3자, 두칸으로 나누어 제작.
나)4P:비문 중앙의 일부분을 6행 11열로 총 60자로 제작
3-2. 고려국 대장이안기 (1306, 김순 書)
○ 비 실물
현 소재 불명
문헌에 강원도 회양부 금강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 비를 찬한 閔漬라는 분이 금강산 유점사와 장안사에 관련된 기록을 많이 남겼으므로 이곳중 한 곳에 있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으나 남북 분단으로 현재 확인하지 못하고 있음
○ 탁본
고려국 대장이안기는 현재 일본의 정가당문고에 소장되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에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탁본인지, 기록인지 확인하지 못했음
3-3.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1314, 김순 書)
- 비 실물 및 탁본
현 소재 불명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이라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했음
※원공은 김순의 조카인 김승용의 장인 원관이라는 분임
김방경-김선-김승용
김방경-김순
원주원씨(★김승용의 장인 원관과 그의 부 원부),
4. 척약재 김구용
2) 척약재 김구용 필적 탐구
4-1 소천서원 청원정 (영환종친 게시자료)
13.문온공 친필 遺墨 암각문 .
* 소재지; 경북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 소천서원 내
* 소천서원 정자 편액이 淸遠亭인데 이 글씨는 절벽에 새겨진 척약재 선조의 친필을 탁본 보필하였다.
청원정 重修記에 이르기를
山이 있어 千丈을 우뚝 솟아 옮아 오니 武夷라 한다. 물이 있어 三江에 會合하니 洛東江 上流를 省火라 하고 亭子가 있어 날아갈 듯이 가장 웅결한 곳에 서 있으니 이름하여 淸遠이라(香遠益淸-예기에서 온말-에서 준 말로 맑지 않음이 세속이라 이를 멀리하여 인생을 맑게 살아 심오한 진리를 머물게 하는 곳이란 뜻)
실로 竺山君 菊坡 全元發선생이 만년에 休老하신 때 지은 것이다. 그 위에 淸遠亭이라 三字를 새긴 것이 있는데 이는 척약재 김구용선생의 平筆이라.
소천서원은 낙동강의 상류인 성화천이 휘돌아나가는 경치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름답기로는 청원정이라는 정자가 으뜸이다.
청원정 정자는 임란시 소실되고, 그 후 복원하였는데, 정자의 편액은 원래 척약재 김구용 선조께서 쓰신 것이어서 이를 다시 복원하려 하였으나 원본을 잃어버렸고, 또 척약재 유묵이 가야리 창벽위에 새겨저 있었으나 떨어저 나가 강가운데로 묻히어 버렸으므로 도저히 고증할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강속에서 자주빛이 밤마다 비추어서 본토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강속을 샅샅히 살펴보니 커다란 돌위에 글씨가 새겨저 있는데 그 글씨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건져 올려서 다시 절벽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문중에서 이는 선조의 도움으로 청원정의 현판을 다시 척약재 필적으로 하라는 계시라 여기고 모사하여 청원정의 편액으로 달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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