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5) : 장단 경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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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4-12-08 15:08 조회1,406회 댓글1건본문
신라경순왕릉(新羅敬順王陵)
○ 종 목 : 사적 244호
○ 명 칭 : 신라경순왕릉(新羅敬順王陵)
○ 분 류 : 능
○ 면 적 : 3,967㎡
○ 지정일 : 1975.06.25.
○ 소재지 : 경기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산18-2
○ 시 대 : 통일신라 경순왕
○ 관리자 : 연천군
신라(新羅) 제56대(第56代) 경순왕(敬順王)(재위(在位) 927-935)의 능(陵)이다.
경순왕(敬順王)의 성(姓)은 김(金), 휘(諱)는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代孫) 이창(伊滄) 효종(孝宗)의 자(子)이며 모(母)는 헌강왕(憲康王)의 여(女) 계아태후(桂俄太后)이다. 927년(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사망(死亡)한 뒤 즉위(卽位)하였다.
경순왕의 재위시기(在位時期)는 나말(羅末) 전란시대(戰亂時代)로 영토(領土)는 왕건(王建)과 견훤(甄萱)에게 대부분 빼앗기고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하여 국력(國力)이 쇠퇴하였다. 후백제(後百濟)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민심(民心)이 신흥(新興) 고려(高麗)로 기울자 마침내 군신회의(群臣會義)를 열고 무고(無辜)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겨줄 뜻을 표하자 군신(群臣)들간에 찬반론(贊反論)이 있었으나 결국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주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겨줄 뜻을 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왕(王)은 신하를 거느리고 서울(慶州)을 떠나 고려 태조가 있는 송악으로 향했다. 태조는 궁동(宮東)의 갑제일구(甲第一區)를 주고 장녀(長女) 낙랑공주(樂浪公主)로서 그 아내를 삼게 하고 정승공(政丞公)을 봉하여 선일천석(線一千石)을 내리고 시종원장(侍從員將)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新羅)를 경주(慶州)라 고쳐 공(公)의 식읍(食邑)으로 하고 또 경주(慶州)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였다. 공(公)이 고려(高麗) 경종(景宗) 3년(年)(978) 4월(月) 4일(日) 별세(別世)하자 시호(諡號)를 경순(敬順)이라 하고 왕(王)의 예(禮)로서 장례(葬禮)를 모시고 능(陵)을 조영(造營)하였으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조선(朝鮮) 영조(英祖)때에 찾게 되었는데 신라왕릉중(新羅王陵中) 경주지역(慶州地域)을 벗어나 경기도(京畿道)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新羅王陵)이다.
능(陵)의 시설은 봉분(封墳) 곡장(曲墻) 능비(陵碑) 장명등(長明登) 망주석(望柱石)이 있고 명문(銘文)으로는 능비명(陵碑鳴)이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경순왕릉 묘비>
《출전 : 문화재청홈페이지/문화재찾기》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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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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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묘비는 명필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로 역시 명필이었던 김노경의 뛰어난 필적
--바로 위에 보이는
비각 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는 비가 있다.
이 비는 6.25 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에 있었으나 수복 전후 도로변에
계속 방치되어 오던 것을 원당리 고랑포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보호해 오다가
1986년 비각을 새로 건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보존하게 된 것이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10자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