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화산군의 전설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12-18 10:28 조회1,852회 댓글1건

본문

화산군의 전설 1


<우암집-연보>

19세, 경인(庚寅), 중종 25년(1530)

몸이 장대하고 기력이 보통 사람 이상이었다. 언젠가 손님과 유희를 하면서, 가만히 손님의 옷 뒷 폭을 기둥 아래에 펼쳐 넣었으니, 대개 기둥을 쳐들고서 그 밑에 넣은 것이었다. 손님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별을 고하고 일어나려 하는데, 뒤쪽에서 잡아당겨 만류하는 것이 있기에 괴이하여 돌아보고는 놀라서 경탄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다시 기둥을 들어서 옷 뒷 폭을 꺼내었다.



화산군의 전설 2


<우암집-연보>

28세, 기해(己亥), 중종 34년(1539)

공이 이미 별시에 응시하러 간 뒤, 집안에 있던 모든 유기(鍮器)가 홀연히 은홍색(殷紅色)으로 바뀌었다. 공이 쓰던 세숫대야가 홀연 회오리바람에 날려서 빙글빙글 돌면서 땅에서 서너 장(丈) 높이로 떴다가 내려왔는데, 상하거나 찌그러지거나 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겨,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얼마 있다가 여종을 부르는 소리가 문밖에서 왁자지껄하였다.



화산군의 전설 3


<우암집-연보>

44세, 을묘, 명종 10년(1555)

나주(羅州) 무이루(撫夷樓), 김제(金堤) 동헌(東軒), 임피(臨陂) 집승루(集勝樓), 수영(水營), 산정(山亭) 등에 각각 차운(次韻)한 시를 남겼다. 언젠가 하루는 순행을 하다가 한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길가에 신총(神叢:성황당)이 있었다. 영리(營吏)가 앞에 엎드려 말하길, “이곳 성황당의 신은 아주 영험하오니, 지난날의 별성(別星 : 봉명사신)입니다. 만일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그 재앙이 당장 이르러 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호통을 쳐서 물리치고는, “한 도의 방백(方伯)이 어찌 이런 하찮은 성황당 신을 위해 말에서 내린단 말이냐?”라고 하고는, 즉시 말을 달려서 지나갔다. 얼마쯤 가다가 쌍교(雙轎)의 앞 말이 홀연 땅에 고꾸라져 다리가 부러졌다. 공이 노하여 그 말을 도살하게 하고 그 피를 성황당에 뿌리고는 이어서 그 말가죽을 덮어놓고 떠났다. 이보다 앞서 호남 사람들은 신을 제사지낼 때 반드시 이 성황당 신을 맞아다가 제물을 갖추어 기쁘게 해주었으므로, 이 신이 영험하기가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대로 다 들어줄 정도였다. 그러나 공이 이렇게 한 뒤로는 비록 신을 맞으려 하여도 강림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성황당 신이 마을 사람의 꿈에 나타나 울면서 말하길, “나는 김 감사가 무서워서 강림하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우암집-유사>

공이 전라감사였을 때, 성황당 신을 모욕한 뒤에 성황당 신이 마을 사람의 꿈에 나타나 울면서 말하길, “나는 김 감사가 무서워서 강림하지 못하겠다. 만약 먼저 김공을 제향한 다음에 나에게까지 제향한다면 혹 그 후진(後塵)을  따를 수는 있을 것 같다.”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이 그 말대로, 먼저 공에게 제향한 뒤에, 이 성황당 신을 맞이하니, 신이 비로소 강림하였다.

공이 체직되어 집에 있을 때, 혹 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하거나 밥을 먹지 않고도 배가 부르면, 웃으면서 “오늘 호남에 반드시 나를 제사지내는 게야”라고 하였다.

공의 손자 부사공(府使公) 희(憙)가 도사(都事)로서 한 곳을 지나가는데, 무녀가 화산군(花山君)의 성명을 부르면서 제향하기를, 평소 듣던 대로 하는 것을 들었다. 마침내 매를 때려서 다스리고 금하여 제향을 끊어버리도록 하였다.집안 사이의 전문(傳聞)



화산군의 전설 4


<우암집-유사>

노저(鷺渚) 이양원(李陽元) 공이 공의 관을 호상하고 돌아올 때에 만리 이역의 땅에 행색이 처량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역졸(驛卒)로 하여금 방울을 흔들면서 전도(前導)하게 하니, 소리가 공중에서부터 나서 말하길, “내가 이번 가는 행렬 속에 있다.”라고 하였다. 상여 앞에 방울을 흔들면서 전도하는 일이 이때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 집안 사이의 전문(傳聞)



댓글목록

김용주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용주
작성일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