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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해동명장전 - 김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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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4-12-19 22:00 조회1,81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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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사수한 김시민 장군


iaan1009_10.gif김시민은 중종 39 년, 즉 1544 년에 태어났습니다.

고향은 충정남도 천안인데, 어렸을 때에 가장 형편이 좋지 못해서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시민은 어려서부터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였습니다. 그는 사소한 일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을 만큼 대범하고 마음이 넓었습니다. 그의 당당한 체구와 넓은 마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존경하게 하였습니다. 34세에 무과 과거에 급제하여 비로소 관직에 올랐는데, 처음엔 훈련 판관이 되었습니다. 훈련판관은 그다지 높은 지위는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되는 병조 판서와 어떤 문제를 놓고 의논하다가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워낙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상급자의 옳지 않은 의견까지 무조건 옳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시민은 자기의 주장이 옳다는 점을 끝까지 주장하였습니다.

“뭐라고? 판관 주제에 감히 내 앞에서 목청을 높여? 고얀 놈 같으니라고?”

병조 판서는 너무 화가 나서 크게 꾸짖었습니다.

김시민은 너무 분해서 그 자리에서 모자를 벗어 던지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것으로 벼슬을 그만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는 날도 있었습니다. 자그마치 13 년 동안이나 고향에 묻혀 모진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선조 25 년, 그의 나이 48 세에 대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경상도 진주의 통판이라는 자리였습니다.



임진왜란


그 해 4월입니다. 아무 방비도 없던 우리나라에 왜적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밤낮 조정에서 싸움만 하던 우리나라는 그들을 막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왜적들은 부산의 동래에 상륙하자 단숨에 부산을 점령하였습니다. 적들은 세 패로 나뉘어 계속 북쪽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선조 대왕은 할 수 없이 신하들과 함께 한양을 떠나 개성, 평양을 거쳐 멀리 북쪽의 의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왜적은 한양을 점령하였습니다. 한양을 근거지로 삼은 왜적은, 다시 1군과 2군으로 나뉘어 함경도 방향과 평양 방향으로 거침없이 진격을 계속하였습니다.

한편, 남쪽에 남은 왜적들은 진해와 고성을 공격했습니다.

이 때, 경상도 우수사 원균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남해로 도망쳤습니다. 다른 장수들도 성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이런 한심한 놈들 같으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김시민은 의분에 못 이겨, 자기 밑에 있는 얼마 안 되는 군사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도망가는 자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목을 베어라!”

그리고 진주 관내의 병사들을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모든 백성까지 모아 끝까지 싸워 성을 지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김시민은 왜군의 총을 본떠 70여 자루의 총을 만들고 화약. 염초 등도 만들었습니다.

또, 무술을 좋아하고 재간이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총 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당시 김시민의 상관이었던 진주 목사 이경은, 왜적들이 성을 공격한다고 위협하자 겁을 먹고 지리산으로 도망갔습니다.

영남 초유사 김성일은 이경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 김시민에게 모든 책임을 맡겼습니다.

김성일은 홍의 장군 곽재우를 도와 1천 병사를 준 사람이기도 하며, 일찍이 황윤길과 함께 함께 일본에 갔었던 사람입니다.

진주의 모든 일을 책임 맡게 된 김시민은, 먼저 성을 지키기 위한 온갖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왜적은 주변의 고성, 진해, 사천 등을 함락시키면서 파죽지세로 진주성을 위해 진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진주 목사가 되다


1333-1.jpg열심히 군사를 모아 훈련시키고, 틈만 있으면 주변을 시찰하며 적의 동태를 살피는 김시민을 백성들은 존경하며 따랐습니다.

진주는 지리적으로나 군사 작전상으로나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왜적들이 전라도 지방을 점령하려면 먼저 진주를 함락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왜적들은 부산, 동래 쪽에서부터 자꾸만 진격해 와서 진해, 고성, 사천 등을 미리 점령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왜적들은 진주성을 향해 3면에서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김성일은 여러 고을에 독촉하여 진주성을 지키는 데에 적극 협력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그 때 의령에서 일어난 홍의 장군 곽재우도, 진주성을 지켜야 된다는 중요성을 알고 의병을 이끌고 와서 도왔습니다.

진주성은 정말 튼튼한 방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성 안의 사기는 드높았습니다.

왜적들은 성을 끼고 흐르는 남강 언덕에까지 왔다가도 강을 건너지 못하였습니다.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게 아니라 나가서 싸워야 되겠다.”

김시민은 조대곤과 함께 1 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왜적은 아예 싸우러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다음날 다시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서 십수교라는 곳에 이르니 왜적이 나타났습니다.

“놈들을 모조리 베어야 한다. 공격하라!”

김시민은 칼을 뽑아 높이 치켜들고 적진을 행해 말을 달렸습니다.

“와!”

함성이 일어났습니다. 곧 치열한 싸움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적군이 고성으로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고성을 왜적의 손에서 되찾아야 되겠다.”

승전의 기세를 몰아 고성을 탈환하려고 정병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진주 남쪽에 진을 치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날 밤,  김시민은 군사를 이끌고 고성으로 가 왜적을 기습했습니다.

왜적은 겁이 나서 나와 싸우지도 못했습니다. 왜적은 다음날 밤을 이용해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김시민은 적군을 추격했습니다.

조선 군사들이 고성을 탈환하자, 적들은 사기가 떨어져 갈팡질팡하였습니다.

진해에 머물고 있던 왜적은 그 소식을 듣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사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별로 싸우지도 않고 김시민은 빼앗겼던 세 성을 되찾았습니다.

이 싸움에서 김시민은 진해를 점령하고 있던 적장을 사로잡아, 의주에 피난 가 있는 선조 대왕에게 보냈습니다.

이 때의 공으로 김시민은 진주 목사로 승진되었습니다.



진주 대첩


진주 주변의 사천, 고성, 진해는 쉽게 되찾았지만, 부산, 개령 등에 모여 있는 적군은 그 힘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래서 경상 우감사 김성일은 세 고을의 군사를 더 징발하여 김면에게 주어서 이들을 치게 하였습니다.

김면은 그들만 데리고 나가 싸워서는 적을 이길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주성의 김시민에게 글을 보내 원병을 청했습니다. 김시민은 곧 1 천 명의 정병을 이끌고 거창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왜적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으니 염려 마시오.”

김시민은 김면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활을 쏘며 적진을 향해 달려가자 적들은 수없이 쓰러졌습니다. 적들은 금방 사기가 꺾여 모래성이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김시민은 적의 잔당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며칠을 더 머물렀습니다.

하루는 왜적과 용감히 싸우던 김시민이 칼에 다리를 베었습니다. 그런데도 아픈 다리를 끌고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쳤습니다. 김면은 김시민의 그러한 태도에 크게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찬하였습니다.

김시민은 적을 완전히 소탕하자 다시 진주성으로 돌아와 수비를 강화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산 쪽에 있던 왜적들이 동래와 김해에 머물고 있는 3만의 왜적과 합쳐 일제히 진주성을 공격하려고 떠났습니다.

동시에 적의 수군은 웅천 앞바다에 주둔하며, 전라도에 있는 우리 수군의 전진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병사 유숭인이 창원에서 적과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습니다.

왜적은 창원에서의 승리에 힘입어 함안까지 단숨에 쳐들어갔습니다. 그 때 조선군은 여섯 고을의 군사 1 천여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적은 힘이 나서 진주를 향해 공격해 왔습니다. 적의 선봉부대 1천여 명은 힘들이지 않고 진주의 동쪽 산봉우리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창원에서 참패한 유숭인이 홀로 적에게 몰려 진주성 밑에 까지 왔습니다.

  “성문을 열어 주시오.  나는 유숭인이오.”

  김시민은 성문을 열어 유숭인을 들어오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인정이나 감정에 끌려 행동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우선, 성문을 연다는 것이 위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적에게 패한 유숭인이 성으로 들어오면, 적과 싸울 때에 의견이 맞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전력에 차질이 생길 염려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김시민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지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경솔히 성문을 열 때가 아닙니다.  또, 우리 군사의 일사 불라한 통솔을 위해서도     성안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공은 밖에서 싸워 주시기 바랍니다.”

유숭인은  하는 수 없이 밖에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습니다.

그후. 의병장 홍의 장군 곽재우는 그 소식을 듣고 감탄 하였습니다.

“진주 사람들이 복이 많구나. 유숭인 장군이 밖에서 전사한 것은 아깝지만, 성문을 열지

않은 것은 진주성의 안전을 위해 잘 한 일이로다!“

사람은 때로 큰일을 위하여 조그마한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해 10월이 되자 드디어 수만의 왜적들이 진주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성안의 군사는 겨우  3천8백 명이었습니다. 지휘관이라고는 김시민을 비롯하여 판관 성수명과 곤양 군수 이광악, 모두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실로 상대가 안 될 만큼 미약한 병력이었습니다.

김시민은 성의 경비를 강화시키고 성 안의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고, 경솔하게 움직이지 마라.”

김시민은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우해 몸소 물병을 들고 다니면서 목마른 군졸들에게 물을 먹여 주며 격려하면서 싸움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포탄이 빗발처럼 날아오고, 적의 함성은 성을 무너뜨리기라도 할 듯 요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시민은 부인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군졸들에게 나누어 주며 격려했습니다. 모두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걸고 싸울 각오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적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포를 쏘아 대고, 큰 대나무로 성벽 높이의 망대를 짜 사람을 올려 보내 총을 쏘아 대었습니다.

마침 의병장 최강과 이당이 고성으로부터 원병을 이끌고 왔습니다. 또 홍의 장군 곽재우도 심대승을 시켜 의병2백 명을 지원군으로 보냈습니다.

“이제 곧 홍의 장군이 대군을 거느리고 이곳에 오신다.”

그들은 적진을 향하여 고함을 쳤습니다.

왜적이 진주성을 포위한 지 5,6일이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성을 점령하지 못한 왜적은 작전을 바꾸어 일제히 성 밑으로  몰려와 돌격전을 벌였습니다.

성에서는 미리 준비해 둔 갈대와 화약을 싸서 성 밖으로  던졌습니다. 끓는 물을 쏟아 붓고 큰 돌을 굴려 보냈습니다.

병사들은 바쁘게 활을 쏘았습니다.

적군은 수없이 죽어 갔습니다.

진주성에서는 , 군사들이 물론 일반 백성들도 하나로 뭉쳐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왜적은 많은 희생자를 내자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을 쫓아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김시민은 물러가는 적을 향해 활을 쏘면서 독려했습니다.

바로 그 때였습니다.

  “앗!”

성 위에 서서 지휘하던 김시민의 이마에 적이 쏜 총탄이 박혔습니다. 부상당하여 쓰러져 있던 적군이  쏜 것입니다.

진주성 싸움에서 조선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김시민은 죽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슬퍼도 울지 못하였습니다. 김시민의 전사가 적에게 알려지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꺼질 불을 살리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