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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온공 종택 발굴 참여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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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4-12-22 11:54 조회1,507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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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문온공파종회에서 왔습니다. “  하면서 명함을 주며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 박교수께서는 않오셨냐고 하고 오늘 만나기로 했다고 하면서 말을 풀어 나갔다.

그제서야 경계의 눈빛이 좀 풀리는 듯 했다.

사진은 찍지 않을것이며,  발굴현장에 지장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둘러보겠노라고하여

승낙을 받았다.


솟을대문이 있었던 주춧돌을 보면 솟을대문 좌우에 작은 방이 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주춧돌이 또 있다.  음수재 솟을대문과 좌우 곁방을 연상하면 딱 맞을 듯 싶다.

이 대문은 금수정쪽을 향해서 나 있다.

지금은 뒤쪽(종택터에서 보면)으로 입구가 나 있지만 옛날에은 금수정 왼쪽 현재의 문온공 단소가 모셔져 있는 아래쪽이 입구였을 것을 짐작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금수정쪽은 절벽이 10여미터이니 불가능 할 것이고,,  전에는 물길을 따라 길이 이어졌을 것이니 금수정 밑 절벽을 돌아서 종택으로 올라 왔을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증거가 되는 암각문이 있으니, 커다란 바위에 洞天石門이라고 새긴 단정한 해서체의 암각문이 있다.  成海應의 [東國名山記]에 이글씨는 한석봉의 글씨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여기를 통해서 종택이나 금수정으로 올라갔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바위뒷쪽에는 또 암각문이 있는데 이 글씨는 瀾石이라고 되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이 글씨는 중국황제의 사신 허국이 쓴 것이며 원래 廻瀾石이란 글자인데 회자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廻자의 한 부분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한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잘 다듬어진 돌을 쌓고 그 위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과 중문옆으로 곳간인 듯한 방이 있다.

중문초석에는 문지방을 걸었음직한 홈이 양쪽으로 파여 있다.

안채는 디귿자형의 내실인데 앞마당이 조금은  좁은 듯하고 안채의 내실이 규모에 비하여 작아 보였다.  그러나 이 곳은 육이오 때 종택이 불난후 임시로 종가를 지었으므로  훼손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안채 옆으로 주춧돌이 더 있는 것으로 보아 이쪽으로 다른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도 몇 개의 주춧돌이 빠져 있으나 그 규모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발굴현장 근처에는 많은 주춧돌이 모아져 있으니 틀림이 없으리라

  안채옆 건물을 별채라고 우선 이름 짓고 이 별채 앞쪽으로 또 커다란 주춧돌이 있으니

아마도 사랑채였을 것 같다.  이곳은 십여칸의 건물과 이어져서 높은 누각이 있었음을 짐작케하는 높이 1.5미터의 높은 초석이 세 개가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개는 부러져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 주춧돌위에 높은 누각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누각에서 앞을 바라보면 왼쪽으로 금수정이 날아갈 듯 날렵하게 서 있고 금수정앞으로는 영평천이 휘돌아 나가며 그 냇물에는 다도해의 작은 섬들이 있듯이 많은 바위들이 물위에 솟아 있다. 이곳을 연화암이라고 한다.  이 바위에 또한 많은 암각문이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瓊島(또는 浮島)라고 짐작되는  80 x 120센치미터의 대형 초서가 있고, 그 옆 바위에는 초서로 된 한편의 시가 새겨져 있다.  이시는 봉래집에 의하면 贈琴翁詩 라고 되어 있으며 이시는 많은 문인들 사이에 알려진 자료이다. [東國輿地誌] 및 [東洲集(이민구)]에도 또한 인용하고 있다.  봉래집에는  증금옹시를 적고 그 말미에 琴翁은 금수정주인이다 라고 적혀 있어 당시 금수정이 안동김씨의 소유였음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琴翁은 척若齋선조의 5대손 金胤福(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김예생-김윤복)할아버님의 호이기 때문이다.

(금수정옆 바위 위에는 금옹할아버님이 거문고를 연주하셨다는 琴臺가 있으며 이곳에도 琴臺라고 단정한 해서가 새겨져 있다. )

증금옹시 초서 옆에는 큰 웅덩이 같은 바위가 있는데 마치 술동이 같다하여 尊巖이라고 새겨 놓았다.  이 모든 글씨가 봉래양사언선생의 친필암각문이다.

이 연화암이 있는 영평천 건너 오른쪽으로는 작으마한 동산이 있으니 지금 할미산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종가 소유이다. 

금수정과 할미산 가운데를 영평천 넘어 아득한 벌판이 이어져있으니  그 정경이야말로 이루 필설로 표현할 길이 없다.  

 고려때 시인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 넘어를 바로보며 시를 짓다가 댓구가 생각안나 울고 내려왔다는 시가 연상되는 그런 곳이다.

장성일면용용수(長城一面溶溶水)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 - 긴 성벽 한쪽으로는 늠실늠실 강물이요 넓은 들판 동쪽 머리엔 산들이 점점점"


 



계속



댓글목록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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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종택의 규모가 드러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던 듯 싶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김우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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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저도 계속.
저도 계속 상당한 관심을 갖고 보고 있습니다.
집필에 고생 많습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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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계속되는 종택 발굴 현장 답사기 기대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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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주춧돌만 있는 발굴중의 종택만 보았는데 해설을 겸하니 화려했던 옛날이 연상됩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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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이제 폐허의 터위에 아름답게 복원될 그날의 종가 모습을 그리며 모두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기록을 남겨 두셨으면......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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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님, 반가운 소식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종택 복원이 잘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