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조선시대 유배길>(5)-유배형의 규정과 운영방식(경유지에서의 처우)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4-12-22 16:22 조회1,716회 댓글1건

본문

<조선시대 유배길>(5)-유배형의 규정과 운영방식(경유지에서의 처우)


 유배인들은 배소까지 가는 경비를 어떻게 충당했을까. 유배인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유배인의 신분과 직위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유배인이 관직자일 경우 경유하는 각 고을에서는 말과 음식을 제한적으로 제공했다. 그러나 일반 사족일 경우는 원칙적으로 유배길에 소용되는 경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유배 길목에 있는 지역의 수령들은 유배인에게 말과 음식을 제공하도록 허용되었기 때문에 유배자를 후히 접대하는 것이 상례였다. 말과 음식 외에 여행에 필요한 각종 물품과 금전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고위관료일수록 유배인의 개인비용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백사 이항복의 유배일기(<백사선생 북천일록>)에는 그가 자비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단 한 번 나온다. 즉 1월 22일 高原에 도착했는데 고원군수가 술에 취해 일찍 관아 문을 닫고 돌보지 않으므로 行錢을 털어 땔나무를 구입했으나 혹독한 추위로 최악의 밤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29일의 유배길에 이날 단 하루만 제외하곤 모두 해당지역의 수령에게서나 역촌 등에서 후한 접대를 받았던 것이다.

 유배인에게 규정 이외의 물품을 제공하거나 후하게 접대하는 관례는 때로 정도를 지나쳐 폐단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현종때 김만기는 윤선도의 유배길에 지방관들이 과도하게 접대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에서 유배살이 하다 이배되는 과정에서 삼수 수령이 많은 물품과 함께 노비 40여구(노비는 口로 표기), 말 20여필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배인이 지나는 길목의 수령들이 유배인에게 물품을 지나치게 제공하는 일이 폐단으로 지목되어 조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유배를 떠나는 고위 관료들에게는 관례적으로 묵인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의 경우와 달리 일부 수령들이 개인적 이유나 정치적 문제로 세상의 이목에 구애되어 접대를 소홀히 함으로써 유배인을 섭섭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정치적 이유로 유배를 갈 경우는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수령이 나타나지 않거나 은밀히 편지나 물품을 보내거나 병들었다고 핑계를 대며 모른 체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아하! 유배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