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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배길>(8)-유배일기를 통해 본 유배길(위리안치 죄인의 유배길)-해와 윤양래를 중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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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4-12-28 21:23 조회1,71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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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배길>(8)-유배일기를 통해 본 유배길(위리안치 죄인의 유배길)-해와 윤양래를 중심으로

 

 해와 윤양래(尹陽來,1673-1751)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일이 문제가 되어 1722년(경종2) 6월 함경도 갑산에 '위리안치'의 명을 받고 50세의 나이로 유배길에 올랐다. 그의 유배길은 <북천일기>(北遷日記)에 상세히 나온다.

 윤양래는 1721년 이건명(李健命), 유척기(兪拓基)와 함께 청나라 사신으로 가서 연잉군(후위 영조)의 왕세자 책봉을 인준 받아 왔다. 그 과정에서 사신들이 경종의 질병을 함부로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소론측의 탄핵을 받아 변방에 위리안치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고,의금부에서는 윤양래는 함경도 갑산에, 유척기는 경상도 동래로 배소를 정하여 다음날 바로 출발하게 했다.

 윤양래는 청에 가기 직전에 종2품 관직인 충청도 관찰사 및 형조참판을 역임했으므로 원칙적으로는 의금부 서리가 압송관으로 배정되어야 했지만 위리안치의 죄인이었기에 의금부도사가 압송관으로 배정되었다.

 유배길의 행로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경기도 두천, 영평, 강원도 철원을 지나 철령을 넘어 함경도 안변, 함흥, 북청, 제인, 황수원, 종포, 호린 등을 거쳐 갑산에 도착했다. 갑산은 서울에서 1,400리의 거리이며 <의금부 노정기>에 의하면 15일 반 일정으로  하루 평균 90.3리를 달려야 하는 먼 길이었다.

 실제로 그는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매일 평균 77.8리를 가서 규정보다 이틀정도 지체한 18일만에 도착했다. 이항복(하루 평균 34.5리), 이문건(하루 평균 57.8리)에 비하면 두 배나 빠른 속도이며 다른 유배자와 달리 중간에 하루도 쉰 날이 없었다. 그는 고위 관직자였지만 위리안치의 죄인이었기 때문에 유배길이 규정에 따라 엄격하게 지켜졌던 것이다.

 그런데 구체 내용은 그렇게 엄격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출발한 날 두천의 산소에 성묘하고, 다음날 본격적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7월 1일 함흥에서는 노기(老妓) 가련(可憐)이 찾아와 함께 한담하면서 그의 재능과 식견에 감탄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다른 유배자와 같이 해당 지역의 수령들로부터 후한 대접과 많은 노자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 물품을 싣고 갈 짐말까지 제공받았다. 특히 6월 28일에는 안변부사가 제공한 물품을 싣고 가던 짐말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중에 넘어지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항상 수령들의 후한 접대를 받은 것만이 아닌데 실제로 6월 28일 덕원 경계에 들어갔을 때 그 수령은 서찰도 없이 다담상만 보내왔다. 거절하지 않고 받았더니 수령이 재차 단자와 물품 7-8가지를 더 보내왔다. 또 고원에서는 군수가 서찰도 없이 다담상과 점심상을 보내오자 거절했으며, 안변의 수령이 말도 없이 물품울 보내오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거절했다. 결국 18일 동안 2군데를 제외하고 곳곳마다 후한 대접과 선물을 받으며 유배길을 갔다.

 유배인과 압송관의 일정이 일치하지 않음은 이문건에서도 확인하였는데 윤양래의 경우도 비슷했으며 압송관은 많은 배려를 했다. 예를 들면 함흥에서 갑산으로 가는 도중의 고개에서는 도사가 먼저 남여를 타고  고개를 넘은 다음 그 남여를 다시 보내 고개를 넘어 오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유배지 갑산에서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거처할 집이 지정되어 가시 울타리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모시고 간 노비들이 폐허된 집에서 살 수 없다고 하여 다른 집으로 변경하여 가시 울타리를 다시 설치하기도 했다. 이때 윤양래는 그 과정을 지켜 보다가 의금부 이졸들에게 울타리를 더욱 높고 빽빽하게 설치하라고 당부하면서 "국법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들어오는 것까지 막아주니 이 또한 국왕의 은혜이다"라며 여유까지 보였다.

 의금부 도사는 울타리 설치가 끝나자 커다란 자물쇠를 종이로 싸서 "신 아무개가 삼가 봉함하다"라고 써서 가져오게 하여 서명하고 바깥문에 걸어 잠겄다. 관청의 허락없이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 봉함한 것이다. 그리고 바깥문 옆 울타리에 작은 구멍을 뚫어 생필품을 통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과정을 모두 확인한 후 의금부 도사는 7월 10일 도성으로 돌아 갔으며 그는 도사 편에 집에 편지를 보냈다. 윤양래의 갑산 유배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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