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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05---김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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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2 09:36 조회1,447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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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한국학

김영돈(金永旽)

?∼1348(충목왕 4).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방경(方慶)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부녹사(江陵府錄事)가 되었으며, 1340년(충혜왕 복위 1)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을 시취하였다.

조적(曺?)의 난 때 시종한 공로로 1342년에 일등공신이 되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46년(충목왕 2)에 찬성사(贊成事)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듬해 왕후(王煦)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실덕을 묻자 소인들의 장난이라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폐정을 시정하던 도중, 불법행위를 하던 기삼만(奇三萬)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에 부닥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秦星圭〉


왕후(王煦)

1296(충렬왕 22)∼1349(충정왕 1).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처음 이름은 권재(權載), 몽고명은 탈환(脫歡)이다. 정승 보(溥)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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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년 입조하라는 순제(順帝)의 명에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좌정승 김영돈(金永旽)과 함께 제지(帝旨)를 가지고 돌아와서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 영돈 및 찬성사 안축(安軸), 판밀직(判密直) 김광철(金光轍)과 함께 판사가 되어 33인의 속관(屬官)으로 각 도의 토지를 측량하도록 하였다.

 

■ 김영돈(金永暾) 묘지명

원 고려국(有元 高麗國1>) 추충병의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부원군 김공(金公) 묘지명 및 서문

 

공의 이름은 영돈(永暾2>)이고, 자는 휘곡(暉谷)이며, 그 선대는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敬順王)로부터 나왔다. -----

 공은 어려서부터 기개와 절도가 있었고, 그 학문은 □□□□□□□ 하였다. 대덕(大德5>) 을사면(충렬31, 1305)에 과거에 급제하여6> 복원궁(福源宮)□□□□을 거쳐 가순부승이 되었다. 연우(延祐7>) 병진년(충숙3, 1316)에는 충숙왕을 수행하여 원의 서울에 들어가서 가례(嘉禮)를 청하여 공주(삼수변+僕國長公主)를 맞이하게 되었다. 공은 일등공신으로 책봉되고 토지와 노비와 녹권(錄券)을 하사받았다. -----

기묘년(충숙복위8, 1339)에는 종부부령으로 바뀌었으며, 사신으로 원의 서울에 들어가 도(都)□□에 머무르다가 뒤에(충혜왕이) 원의 조정에 들어올 때 수행하였다. -----

병술년(충목2, 1346)에 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전춘추관사가 되고, □월에 원의 서울로 갔다. 천자가 불러 □불□□무하니, 황제가 그 충직함을 가상하게 여겨 □백□를 맡아 □□지(旨)를 정리하였다. 공이 고려로 돌아와 □□□□ 임금에게 아뢰니, □□□ 정리도감에 억울하거나 잘못된 일을 호소하는 사람이 하루에도 무려 천여 명이나 되었다.

 □□□ 공은 좌정승이 되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어주(御酒)와 어의(御衣)를 내리니 원로(耆老)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탄식하였다. -----

 공은 일찍이 덕수현(德水縣)13> 동쪽의 강과 산이 아름다운 곳에 별장(野莊)을 지었는데, 매번 문득 가면 열흘이나 한 달을 머무르니 마치 장차 세상을 버린 것 같았다. 청탁을 □(가려내고?)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도우니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았다. 무자년(충목4, 1348) 7월 무신일에 병이 들어 돌아가시니, 춘추가 64세이다. 빈소를 성 안의 공의 집으로 옮겼는데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슬퍼하고 서로 조문하였다.

-----부인 신씨(申氏)는 판도사랑 여강(汝岡)의 딸로 이천군에 봉해졌으며, 2녀 1남을 낳았다. -----아들 진(縝)은 장복직강인데 우대헌 유보발(柳甫發)16>의 딸과 결혼하였다. 공이 일찍이 나(=안진)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년에 아들 하나늘 얻었는데 장차 □업(家業?)을 일으킬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8월 병술일에 덕수현 앙동산(德水縣 仰洞山)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추증하여 문숙(文肅)이라고 하였다. 내(=안진)가 이미 공을 만나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그 행적을 자세하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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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至正) 8년 (충목4, 1348) 8월 일

칙수 장사랑 광정대부 검교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안산군(安山君) 안진(安震)이 짓다.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2001.12월, 김용선,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p.929  265.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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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김영돈 묘지명에 1348년 ---춘추가 64세이다.--- 로 보아
1285년생임을 알 수 있다.
생몰년 (?∼1348) 기록을 (1285∼1348) 로 정정 요청해야 할 듯.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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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우리 홈에는 정상으로 되어 있으나 <디지털 한국학>에는 아직 안 되어 있습니다. 정정 신청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