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06---김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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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2 10:05 조회1,458회 댓글1건본문
■ 디지털한국학
김영후(金永煦)
1292(충렬왕 18)∼1361(공민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1325년(충숙왕 12)7월 산원(散員)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은 사건이 일어나자 지평으로서 장령 김원식(金元軾)과 함께 총신(寵臣)의 비호를 물리치고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 8)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으며, 충혜왕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의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하여 중서성에 올릴 때 이를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6월 조적(曺?)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왕을 시종한 공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전(田) 100결과 노비 10구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1343년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끝까지 남아 있다가 창에 맞기도 하였다.
1344년 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1346년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352년(공민왕 1)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356년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朴天植〉
■ 정간공 연보 (정리 : 김주회)
○1292(충렬왕18)∼1361(공민왕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국헌(菊軒)<급암시급, 척약재학음집>. 온재(穩齊)<화해사전>.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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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세) 1339년(충숙왕복위8) 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으며, 충혜왕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의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하여 김영후(金永煦)에게 주어서 중서성에 제출하게 하였다.
김영후는 그 매부 별가불화(別哥不花)가 당시 원나라 평장사(平章事)였으며 왕에게는 양이형제(兩姨兄第)의 관계가 있는 까닭에 왕이 김영후에게 초 1백 정(錠)과 능직 비단 15필, 모시 30필을 주어 보냈다.
○(50세) 1341년(충혜왕복위2) 6월 조적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삼사우사로서 왕을 시종한 공으로 정승 채하중, 상락(上洛)부원군 김영돈(金永旽), 언양군 김륜(金倫), 김해군 이제현, 성산군 이조년, 첨의평리 한종유 등과 1등 공신으로 봉해져 벽상에 그들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7품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생질에게 대신 줄 것이며 사위는 8품 직을 주고 토지 1백 결(結)과 노비 10명을 받았다.
또한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은 2등 공신으로 정하며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8품 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그 대신 사위에게 9품 직을 제수하고 토지 70결과 노비 5명을 받았다.
○(51세) 이듬해에는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고,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되었다.
○(52세) 1343년(충혜왕 계미후4) 봄 2월 갑진일에 왕이 용사(勇士)들을 거느리고 씨름을 구경하다가 밤에 좌우사 낭중 김영후와 같이 북궁(北宮)에서 술을 마시었는데 김영후가 취하여 누우니 왕이 곁에 있던 사람들을 시켜 그를 부축하여 말 위에 올려 앉히고 마부를 불러 이르기를 “네 주인 낭중이 자기 타던 말을 나에게 선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튿날 김영후가 이내 그 말을 왕에게 바쳤다.
1343년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홀로 김영후만은 왕을 호위하고 있으면서 1장 8척의 창을 맞았다.
1343년(충혜왕4)에 征東省郞으로 있었다. <안축의 근재집중 상주객관중영기>
○(53세) 1344년 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55세) 1346년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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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 1356년(공민왕5, 병신년) 2월 갑술일에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70세) 1361년(공민왕10 신축) 5월 임술일에 상락후(相洛侯) 김영후(金永煦)가 나이 70세로 죽었는데,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심양왕 瀋陽王
고려시대 원(元)나라에서 고려 왕 또는 왕족에게 수여했던 봉작(封爵)의 일종. 1308년(충렬왕 34) 고려의 전왕(前王)인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봉한 것이 시초이다. 이것은 당시 심양(瀋陽) 등지에 고려인 전쟁포로나 유민들이 거주하여 특수한 지역을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교통·군사·경제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것으로, 심양에 대한 통치권한을 어느 정도 인정하여 주었다. 이후 심왕(瀋王)으로 개칭되었는데, 충선왕의 조카인 연안군(延安君) 고(暠)가 심왕이 된 뒤부터는 실권행사가 어렵게 되어 명예적인 봉작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 견제심리에 의해 반목과 질시의 대상이 되어 심양왕의 지위를 둘러싸고 분규가 잦았으며, 고려 조정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무리들이 심양왕과 결탁, 심양왕을 왕으로 추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관계를 교묘히 이용한 원나라는 쇠약해진 국력으로도 고려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주도적으로 군림했던 것이다.
조적(曺?)1
?∼1339(충숙왕 복위 8). 고려의 반역자.
의흥군(義興郡) 역리출신(驛吏出身)이라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충렬왕 때 환관들과 결탁하여 권세를 내외에 떨쳤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승진하여 우상시(右常侍)에 이르렀다.
1312년(충선왕 4)환관을 바치고자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320년(충숙왕 7) 선부전서(選部典書)가 되었다.
1323년에는 만호로서 원나라에 공물을 바친 일도 있다. 일찍이 염승익(廉承益)의 서녀(庶女)와 혼인하였는데, 장인의 외손인 정안군(定安君) 허경(許慶)과 재물을 놓고 다투다가 최안도(崔安道) 등의 직설로 왕의 미움을 사자 호군인 고자영(高子英) 등과 몰래 원나라로 도망하였다.
그뒤 채하중(蔡河中)과 더불어 ★심양왕 고(瀋陽王暠)에 아부하여 갖은 모략으로 충숙왕을 비방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으로 하여금 왕을 불신하도록 조장하였으며, 다시 ★심양왕의 고려왕으로의 즉위를 노려 1324년에는 원나라에 거주하는 고려인 2, 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과 중서성에 충숙왕을 헐뜯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1327년에 왕으로 하여금 ★심양왕에게 선위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조년(李兆年) 등의 반대로 취소되자 왕이 귀와 눈이 멀어 정사를 처리하지 못한다고 무고하였다.
1328년에 원나라의 태정제(泰定帝) 가 평장사(平章使) 매려(買驪)와 사인(舍人) 역특미실불화(亦?迷失不花)로 하여금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하자 매려 등과 함께 고려에 돌아왔으나, 무고임이 드러나자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1332년(충혜왕 2)선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자 ★심양왕과 함께 귀국하여 지밀직사(知密直事)가 되고, 이듬해 찬성사를 거쳐 1338년(충숙왕 복위 7)에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에 올랐다.
이듬해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복위하자 ★심양왕과 함께 원나라로 가던 도중 평양에 이르러 충숙왕 비인 경화공주(慶華公主)로부터 충혜왕의 음란함을 듣고 왕의 폐위를 공언하고 개경에 돌아와 전 호군 이안(李安) 등을 순군수령(巡軍首領)으로 삼아 국인(國印)을 영안궁(永安宮)에 감춘 뒤 무리 1, 000여명을 이끌고 충혜왕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林英正〉
심양
우리에게 봉천이라는 옛 이름으로 더 다가오는 도시이다. 원래 이름이 심양이었던 이곳은 청나라 때 봉천, 국민당 정권 때 심 양, 일제의 만주사변 후 봉천 등으로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으나 공산 정권 수립 후 심양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여기가 옛 부여.고구려의 땅이었는데, 고려 때는 '심양왕'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원나라가 고려로부터 항복을 받고 1308년 에 고려 왕자가 이 곳 심양왕이 되어 그 지방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 이 지방에는 고려인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반란을 염려하여 고려인으로 심양왕을 세운 것이다. 심양왕은 심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와 같이 고려 때까지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살던 고장이었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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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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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심양왕...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