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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보물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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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2-02 03:51 조회1,9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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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7일 사이버종친 학술대회를 훌륭하게 마치고 나니 큰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합니다.

아주 소중하고 귀한 모임이었습니다. 요 며칠새는 마음이 매우 한가하고 편안합니다.







행사가 끝나고 이번주에



항용 종친께서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역대고승비문]이라는 책에서

문온공 김구용의 휘가 적혀 있는 [여주 신륵사의 보제선사 사리석종비]와

정간공 김영후의 휘가 적혀있는 [보은 법주사의 자정국존 보명탑비]를 찾아 내어 소개하여 주시어

"---1327년---상주목사 김영후---"라는 기록을 보고 벅찬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영환 종친께서 문온공 김구용의 휘가 적혀 있는 [여주 신륵사의 보제선사 사리석종비]와 관련한 여러가지 귀한 자료를 소개하여 주셔서 잘 읽어 보았습니다.







특히, 상산관(경북 상주)과 관련하여



상주시 향토자료인 [상산지]에는

1307년 상주목사 김영후가 상산관을 개축하였다는 기록과

1327년 상주목사 김영후가 상산관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상주의 목사 명단인 [상주목선생안]에는

1307년에 상주목사 김영후가 취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1307년은 정간공께서 16세로, 음사로 관직에 진출한 정간공께서 16세에 정3품 벼슬인 상주목사를 지내신 것은 의문이 가는 기록이고,

1327년은 정간공께서 36세로서 정3품 벼슬인 상주목사를 지내신 시기가 맞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상주목선생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1327년 상주목사 김영후"를 "1307년 상주목사 김영후"로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오던중





정간공 김영후의 휘가 적혀있는 [보은 법주사의 자정국존 보명탑비]에 "---1327년---상주목사 김영후---"라는 기록을 보고, 정간공께서 상주목사를 지내신 때는 1307년이 아니고 1327년이라는 사실을 확정지을 수 있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집에서 [충청북도지]를 보고 있는데 "門下右侍中 金士衡"이라는 문구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록이 찾아진다는 느낌이 절로 듭니다. 신기하고 뿌듯합니다.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비 (보물 제658호,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 소재) 는



비문은 권근이 撰書하였는데 前面에는 보각국사의 공적내용을 쓰고 뒷면에는 門徒와 비석 건립에 관계한 사람들의 명단이 陰記되어 있는데, 맨 아래 부분에 "門下右侍中 金士衡" 이라는 익원공의 휘자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태조3년 (1394년)에 익원공께서 문하우시중을 역임하고 계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



종 목 보물 658호

명 칭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비 (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79.05.22

소재지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

시 대 조선 태조

소유자 국유

관리자 충주시





청룡사 옛터에 남아 있는 비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인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보각국사 혼수(1320∼1392)는 도를 지킴에 조심하고, 특히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2세에 출가하여 22세 때에는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29세 때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청룡사로 옮겨가 머물렀다.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하다가 조선 태조 1년(1392) 청룡사로 돌아와 73세에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내려 ‘보각국사’라 하고, 탑이름을 ‘정혜원융’이라 하였으며, 청룡사에 대사찰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



조선 태조 3년(1394) 문인선사 희달(希達)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에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이는 면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명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비(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과 공양왕(恭讓王) 및 조선(朝鮮) 태조(太祖)의 국사(國師)로 있던 고명(高名)한 승려인 보각국사(普覺國師)의 비이다.



문인선사(門人禪師) 희달(希達)이 태조(太祖) 3년(1394)에 태조(太祖)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풍우로 인하여 손상이 많이 되었다.





비 바로 앞에 보각국사(普覺國師) 정혜원륭탑(定慧圓融塔)이 있는데, 이 탑은 팔각탑신(八角塔身) 부각면에 사천왕(四天王)인 듯한 조상(彫像)과 각 우주(隅柱)는 엔타시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표면에는 반룡(蟠龍)이 기어오르고 있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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