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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김시민 장군묘와 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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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2-02 18:31 조회1,6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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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에 가면 충무공 김시민 선조의 묘소가 모셔져 있고



근래에 새로 영정을 모신 충민사가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새로 모신 영정은 청전선생님의 역작으로 알고 있습니다.



직계 후손이 아니더라도 충무공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마음에서라도



한번 참배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멋모를는 제 눈에도 앞으로 강물이 흐르고 뒤에는 병풍처럼 산이 감싸고



있어 배산임수형의 명당이며, 옆으로는 날개가 범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풍수전문가가 탐방기를 쓴 것이 있어 옮겨 적으니



참배시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김시민장군 묘역과 풍수







충무공 김시민 장군묘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57번지 金時愍將軍 墓.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싸움에서 공을 세운 분이며, 이곳에 숙부 김제갑과 같이 모시는



사당 忠愍祠가 묘소의 오른쪽에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지섣달 기나긴 밤이라 누가 노래했던가... 밤이 길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의 길이가



짧다는 얘기인데 뉘엇뉘엇 서산 너머로 몸을 숨기는 겨울의 짧은 해를 바라보며, 누군가가



"동지가 언제지?" 하며 삼라만상이 동면하는 시간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보니 동지가 바로 어제인지라 어둠이 빨리 찾아오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으나,



한 곳이라도 더 보고, 더 배우고 싶어하는 회원들의 마음에는 겨울의 하루해가 더욱 짧게만



느껴지는 것 같다.



將軍의 墓所 앞에 넓고 푸르른 어름 위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衡山선생님이 " 강이 커 보여서 陽이 크므로 陰陽의 균형이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左右 靑龍白虎가 얼마만큼 확실히 감싸주었는지 확인을



해 보아야 될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잘 놓여진 다리 위를 건너면서 "이 다리는 누가 놓았을까?" 하자 "나라에 忠誠하면



國家에서 다리도 놓아주는 것입니다" 하고 서상석회원님이 말했을 때,



" 저기를 잘 보십시요, 左靑龍이 단단하고 큰 바위로 이어져 이 앞에까지 감싸주고 있는



것이 보이지요?"하는 衡山선생님의 評이 이어졌다. 확실히 강 건너, 앞에서 보이는 形勢와



다리 위에서 보이는 形勢가 다르므로 빨리 現地를 가보고 싶은 호기심이 더욱 發動을 하였다.



부지런히 담벼락을 따라 墓所 뒤로 올라가는 일행에서 떨어져, 필자는 먼저 미안스럽지만



월담을 하여 장군묘 앞에서 묵념으로 인사를 올리고, 左向을 側定해 보니 亥坐巳向에 丙破로



文庫消水를 취했다. 安山을 보니 主峰 좌측으로 봉우리들이 깃발처럼 이어 졌고, 우측으로



申方에 북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어 將軍大座形이라는 穴名을 빛나게 해 주고 있었다.



卯方에도 쌍둥이 탐랑성이 솟아 있고 주위의 砂格들도 잘 갖춰져 있어 좋으나 굳이 아쉬운



점을 찾자면 安山에서 내려온 산자락이 팔로 가로막듯 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文庫消水는 右旋龍에 左旋水라야 合法이므로 乙辰方의 물이 堂에 올라 丙字 天干으로 돌아



나가면 이것이 文庫消水法 또는 楊公의 進神水法이라 하여 "祿存流盡佩金魚"라고 하는 貴格이다.



二十四山論의 亥坐는 물이니 시냇물과 같은 물이다. 절기로는 小雪이다. 물이 펀펀하게 여울을



따라 길게 흐르면서 고루하여 두르고 깊게 모여야만 이 山에 眞氣가 모인다고 글에 이른 것을



보니 그 앞에 깊고 푸르른 강물이 더욱 돋보인다.



다시 월담을 하여 뒤늦게 일행의 후미로 합류하여 龍脈을 보러 올라가니 여기도 橫龍入首다.



건너편에 樂山이 받쳐주고 있고 鬼星이 밭 끝까지 버티어 주고 있으니 이 어찌 吉格이라



아니할 수 있으랴....



이곳에서 衡山선생님이 회원들에게 한참을 설명 한 것으로 보아 이점을 말씀 하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墓所 쪽으로 눈을 돌리니 아래서는 담 때문에 안보였던 龍이 내리쏟듯



들어가며 左右 선익을 크게 몸짓을 불려 감싸 내리 안은 形相이야 말로 壯觀을 이루고 있다.



그 안에 將軍의 墓는 大窩穴의 품속에서 고요히 영면에 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회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으며, 衡山선생님도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곳은 여주 世宗大王陵처럼



생긴 곳이라 말하고 있었다.



모두들 월담을 하여 묘 앞에서 예를 올리고 주위를 살펴본 바로는 실제는 어쩐지 모르지만



현재의 형태로는 약간 아래로 모셔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곳에서는 穴暈을 볼 수 있었고 정면과 주위 砂格을 둘러볼 때 將軍大坐形 이라는 것을



쉬게 알 수 있게 하는 자리였다.



나라에 忠誠을 다한 金時愍將軍의 墓所를 끝으로 오늘의 看山, 아니 辛巳年의 看山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음식점으로 향했다.



오늘의 看山總評을 衡山선생님께 부탁을 드렸으나, 사양하였으며, 주위에 다른 손님들도



많고 산만하여 더 권유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金時愍將軍 墓域이 처음 앞에서



볼 때 보다 現地에 가보니 정말 한가지 한가지가 절묘하게 갖춰져 있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현지에 도착해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 합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오늘의 하일라이트는 바로 이곳이 아니었나 싶다.



이로써 2001년 저무는 辛巳年의 마지막 看山을 마치고 운전기사의 짜증스러움에 신경을



쓰면서도 불빛을 가르는 차안에서 오늘의 피로를 달래고자 安樂의 품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듀 辛巳年이여!



보람찬 한해였다고 외치노라!.....





김시민(金時敏){1}

1554(명종 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목천(木川)출신. 방경(方慶)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에는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뒤 훈련원판관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에 피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성민을 안무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요청을 받고 정병 1천여명을 이끌고 이에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방식을 모방하여 염초(焰硝)5백여근을 만들고 총통(銃筒) 70여병(柄)을 만들어 정병을 뽑아 이의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하였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중에 영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적과의 싸움에 대처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 800여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하여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 며칠 뒤에 진몰(陣歿)하였다.

죽은 뒤 성중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하였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2등에 추록되었으며, 영의정이 추증되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솔내 김영환 ,solna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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