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16---김덕룡, 김수, 김첨, 김시민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5-01-17 09:48 조회1,652회 댓글2건본문
■ 디지털한국학
김덕룡(金德龍)
1518(중종 13)∼? 조선 명종·선조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운보(雲甫), 호는 낙곡(駱谷). 해(瀣)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 증광시에 갑과로 급제, 봉상시주부·경성판관(鏡城判官)을 거쳐 1557년 암행어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었다. 이어서 장령으로 인산진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부적격자로 교체되어 돌아와 부교리에 올랐다.
그뒤 시강원필선·홍문관전한을 거쳐 의주목사·황해도관찰사 등의 외직을 지냈다. 부호군·장례원판결사·동부승지·전라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도승지 등을 거쳐, 1564년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그의 예하 군인 3백여인이 월경하여 야인을 토벌하다 크게 패배하였는데 이로 인해 추고(推考), 파직당하였다.
그뒤 곧 복직되어 평안도관찰사·개성유수 등을 거쳐 1571년(선조 4) 대사헌이 되었다. 평소 효우(孝友)하고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외직에 있을 때는 엄명으로 다스려 간활(姦猾)이 중지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張東翼〉
■ 디지털한국학
김수(金?)
1547(명종 2)∼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홍도(弘度), 어머니는 이계백(李繼伯)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교리 때 왕명으로 《십구사략 十九史略》을 개수(改修)하였다.
1583년 번호(藩胡)가 침입하여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이조정랑으로서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종사관이 되었다. 유학(幼學) 신급(申$급01)이 올린 상소 속에 조정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인물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
■ 디지털한국학
김첨(金瞻)
1542(중종 3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첨(子瞻), 호는 하당(荷塘)·남강(南岡)·동강(東岡). 아버지는 전한 홍도(弘度)이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9년 사가독서하였다.
그해에 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이이(李珥)가 올린 상소에 대해 옳지 않다고 탄핵하였으며, 1581년 이조좌랑으로서 박근원을 이조참판에 등용할 것을 주청하였다.
1582년 교리를 거쳐 고경명(高敬命)대신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傷敬差官)으로 나아갔다.
이듬해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온 뒤 이이를 탄핵하다가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좌천되고, 1584년 파직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죽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與地圖書. 〈朴翼煥〉
■ 디지털한국학
김시민(金時敏)
1554(명종 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목천(木川)출신. 방경(方慶)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에는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뒤 훈련원판관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
이탕개(尼湯介)의 난
1583년과 1587년 2회에 걸쳐서 이탕개(尼蕩介)가 주동이 된 야인(野人)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가 함락되고 부내(府內)의 모든 진보(鎭堡)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자 온성부사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을 시켜 그들을 무너뜨리고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시켰다.
尼蕩介-亂
조선 중기 이탕개를 중심으로 회령지방(會寧地方) 여진족(女眞族)이 일으킨 반란. 세종 때 6진 개척으로 동북 방면의 여진족에 대한 경략은 잘 되어왔으나 중중 이후 내정이 문란해지자 북방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되어 여진족이 준동, 국경지방을 침범하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조정에서는 여진족에 대한 토벌논의가 대두되었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소극적인 회유로 일관하였는데, 이에 용기를 얻은 귀화 여진인 이탕개가 1583년(선조 16) 경원부(慶源府)에 사는 번호(藩胡)들의 난에 호응하여 난을 일으켰다. 경원부사 김수(金燧)가 이들을 진압하고자 출동하였으나 패하여 여진인들에게 부성(府城)과 아산보(阿山堡)·안원보(安原堡) 등 부내(府內)의 모든 진보(鎭堡)를 점령당하였다. 그러나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의 역전(力戰)으로 난군을 소탕하여 6진이 보존되었다. 그뒤 경원부성 함락의 책임을 물어 북병사 이제신(李濟臣)은 귀양가고, 경원부사 김수와 판관 양사의(梁思毅)는 ***되었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 |
솔내 |
---|---|
작성일 |
...
김항용님의 댓글
![]() |
김항용 |
---|---|
작성일 |
중국과의 관련 자료 종합,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