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17---김찬, 김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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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7 09:52 조회1,472회 댓글1건본문
■ 디지털한국학
김찬(金瓚)
1543(중종 38)∼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 아버지는 형조참의 언침(彦沈)이다.
1567년(명종 22)에 진사가 되고, 156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70년에 검열이 되고, 이후 대교·봉교·전적·형조정랑·검상·사인·이조정랑 등의 관직과 지평·집의·정언·헌납·사간·수찬·교리·응교 등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73년 평안 삼도사로 나가 군적(軍籍)을 정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평안도 순무어사로 활약하였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직제학·승지·좌참찬·동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대사성·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임금 일행이 개경에 이르자 동인(東人) 이산해(李山海)의 실책을 탄핵하여 영의정에서 파직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김공량(金公諒)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뒤에 정철(鄭澈)밑에서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또, 일본과 강화회담을 벌일 때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 예조판서·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를 연이어 지냈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우참찬까지 승진하였다. 대사헌 때 가족을 멀리 피난시켰다고 탄핵을 받고 체직되는 등 소소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지만,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이 능숙한 명신이었다.
임진왜란 뒤 전쟁의 수습과정에서 죽자, 선조는 조회를 정지하여 추모의 뜻을 표했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兪炳勇〉
■ 디지털한국학
김대섭(金大涉)
1549(명종 4)∼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사정(士亭). 할아버지는 경상도병마절도사 윤종(胤宗)이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질병으로 문과 응시를 단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 행재소로 달려가 왕을 호종하였다.
이듬해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이어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가 되었다.
이때 명나라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 송응창(宋應昌)이 경략방해비왜군무(經略防海備倭軍務)가 되어 입국함에 이의 접대임무를 맡은 윤근수(尹根壽)밑에서 외교관계의 잡다한 일들을 빈틈없이 수행하다가 격무로 병사하였다.
참고문헌 象村集. 〈文守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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