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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공(대화)의 輓詞(만사) 한 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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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5-01-17 21:28 조회1,676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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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輓詞(만사)

金大?(김대화)


爲仁未壽天難信(위인미수천난신) / 어질고서 수 못하니 하늘을 못 믿겠네,

直道多艱命亦窮(직도다간명역궁) / 곧은 길에는 어려움 많아 명도 궁하여라.

海外遺兒誰顧恤(해외유아수고휼) / 해외①에 남긴 아이 누가 돌보던가?

庭前英玉繼家風(정전영옥계가풍) / 뜰 앞에 영옥②은 가풍을 이으리.

同?無祿失賢友(동인무록실현우) / 이웃은 복이 없어 현우를 잃었고,

後學何依得解蒙(후학하의득해몽) / 후학은 누굴따라 어둠을 밝히나,

如我老生應不久(여아노생응불구) / 나와 같은 늙은이는 오래가지 못하리니,

九原他日永相從(구원타일영상종) / 지하에 가는 날 길이 서로 따르리라.


註(주) ①은 유배시에 나으신 次子(차자) 仁濟(인제)를 이름.

          ②는 예쁜 아이


《출전 : 艮翁遺稿(간옹유고) pp278~279》


  2005년 1월16일 상평초등학교 동창 산행모임이 수락산에서 있었는데 산행 모임중 고향 상촌의 선조님이 지으신 輓詞(만사) 두 수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다.

  동창 친구중에 경주이씨인 흥우란 친구가 있다. 산행중에 이 친구가 “자네 선조님 중 김대엽이란 분이 계시는가?”하고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불현듯 물깊을 화(?) 자를 빛날 엽(燁) 자로 오인하여 이야기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김대엽이 아니고 내 13대조의 諱(휘)가 하양현감을 하신 金大?(김대화)”라 대답을 하니 작년에 흥우 친구 부친께서 선조님이신 艮翁(간옹) 李瀷(이익) 선생의 유고를 국역하였는데 그 부록에 만사가 여러 수가 있고 거기에 金大?(김대화)란 분이 지으신 만사가 있다고 하며 “자네에게 주려고 艮翁遺稿(간옹유고) 한 권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렇게 반갑고 고마울 데가 어디 또 있겠는가. 거듭 친구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책을 받아 펼쳐보니 金大?(김대화) 이름 석자가 눈에 들어 온다. 아니 어디 그 뿐인가 하양공 만사 다음에는 하양공의 맏아드님이신 좌랑공 金?(김구) 선조님의 만사가 한 수 또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알려진바 없었던 만사 두 수를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대하게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감격 또 감격스런 하루였다.


간옹 이익 선생의 이름은 익이고 자는 행여이다. 경주이씨이니 시조는 신라 개국원공 알평이다. 그 뒤 관면(벼슬하던 사람이 쓰는 관)이 대대로 계속하였다. 아조에 들어와서 성중이라는 분이 있으니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순이니 공에게 7대조가 된다. 고조 오는 장흥고주부의 자리, 장판지, 종이 등을 맡아 보던 관아의 종6품을 지냈고 증직은 삼재(좌참판)이다. 증조는 자침이니 생원으로서 증직이 이공(찬성)이다. 조부 난은 영의정과 월성부원군을 추증받았다. 부친 유일은 판관으로서 증직이 찬성이다. 모친은 여흥민씨니 참봉 덕용의 따님이시다. 공이 만력(명나라 신종의 연호) 기묘(1579년)에 출생하였다. 소년 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계부(끝의 삼촌) 계림공 수일(충무공 이수일 장군으로 천하에 알려진 훈련대장 이완장군이 그의 아들이다)이 남부지방에 고을살이 갔었는데 형제가 거기에 따라가서 뜻을 면려하고 글 공부를 독실히 하였다. 임자년(1612년)에 세 과거장을 통과하여 소과와 대과에 급제하였다.(소과에 생원시와 진사시의 두 가지가 있고 대과까지 합쳐서 세 가지 시험이 된다) 처음에 국자감(성균관)에 배속되었다가 천거받아 한원(예문관)에 들어갔다. 을묘(1615년)에 순서에 따라 전적(성균관에 정6품 벼슬)으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사서(세자 시강원에 정6품 벼슬)를 거쳐 정언(사간원에 정6품 벼슬)으로 전임되었다.

  이 때 공은 광해군의 난정을 간하다가 무오(1618)년에 사형을 감하여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계해(1623)년 인조반정이 되자 사예(성균관의 정4품 벼슬)로서 조정에 들어갔다. 이어 장령(사헌부의 정4품 벼슬)을 제수받고 서경이 되어 부임한지 10일도 못되어 이괄의 난리가 일어났고 밤은 깊고 창졸간에 일이 되어서 미처 몰랐다. 임금을 호종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면직되었다. 공은 고향에 돌아가서 착실하게 공부하고 면려하고 지도하였다. 혹은 지팡이를 짚고 수석의 사이를 상양(왔다 갔다 거닐음)하기도 하였다. 하루 저녁에는 취하여 돌아와서 갑자기 하세하였다. 향년이 겨우 46세였다.

  공의 처음 호는 옥포였는데 제주도에서 돌아와 간옹으로 고쳤다. 하세한 뒤에 혼탁한 조장에서 절조를 지켰다고 하여 곧 품계를 올려서 특히 홍문과 전한(종3품 당하관)을 추증하였다. 묘소는 충주 오갑산 자좌오행 지금은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의 자리에 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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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고향에서의 한때!!! 귀한 보물을 구하셨군요.
어제는 신나는 하루였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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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삼개월은 행복한...  아니 두고두고 행복한 순간들일 것입니다.  간옹유고.... 구할 수 있다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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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기쁨을 같이 나눕니다. 본 홈 문온공파란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