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19---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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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8 09:28 조회1,546회 댓글3건본문
■ 한국국학진흥원
김회(金淮 ; 1578∼164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김회(金淮 ; 1578∼1641)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거원(巨源), 호는 경암(敬菴)이다. 경북 의성사촌 출생.
아버지는 사정(士貞)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로 진사 희로(希老)의 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세의 소년으로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가담하여 진주 김성일(金誠一)의 진중에서 활약하였다.
1602년(선조 35) 향시에, 이듬해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06년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혀 1612년(광해군 4) 명경과에 급제, 정자가 되었다가 그뒤 성균관학유·양현고봉사(養賢庫奉事)·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성균관학정(成均館學正)·봉상시부봉사(奉常寺副奉事)·성균관박사·양현고직장 등을 역임하였다.
1615년 인목대비(仁穆大妃)와 영창대군(永昌大君)에게 화가 미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1617년 성균관전적, 이듬해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해 가을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사헌부감찰의 직책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정암서당(鼎巖書堂)을 지어 후진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경암실기》 3권 1책이 있다.
김종필(金宗泌)이 찬(撰)한 행장에 의하면 김회는 15세 때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부친 후송공(後松公)이 의진(義陳)에 나아감에 함께 배옹(陪擁)해서 진주 촉석루에 올라 「장월등남루 남아보국수(杖口登南樓 男兒報國愁)」한 수 시를 읊어서 강개한 심회를 토로하였다. 그 후 오랜 진중생활에서도 촌극을 아껴서 경학에 잠심하고 수강(修講)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을 지심(持心)의 근본으로 삼고 효우를 제행(制行)의 근원으로 삼아서 독실히 정진하였다.
1603년(선조 36) 생원시에 합격하고, 1612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정자(成均館正字)가 되었다. 그 후 학유(學諭), 양현고봉사(養賢庫奉事), 의정부사록겸학정(議政府司錄兼學正) 등을 거쳐 1616년 박사겸 직장(博士兼 直長)에 임명되었으나 광해의 혼정(昏政)으로 시폐(時弊)를 예지(豫知)하고 귀향하였다. 1618년 형조좌랑(刑曹佐郞)의 제수에서도 불부하고 동년 8월에는 성절사서장관(聖節使書狀官)의 명을 받고 연경에 갔다가 익년 2월에 복명(復命)하였다. 1623년 인조개옥후(仁祖改玉後)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1627년 동경교수(東京敎授)에 제수를 받고 난후에 여지없이 퇴폐된 학풍과 기강을 크게 고무 진작시켰다. 1632년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환로는 사양하고 유적한 정암서당(鼎巖書堂)에서 자연을 소영(嘯詠)하며 후진강도(後進講道)에 전념하였다 한다.
敬菴集
『경암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김회(金淮 ; 1578~1641)의 실기이다. 김회의 자는 거원(巨源), 호는 경암(敬菴)이다.
이 책은 1932년 그의 후손인 호우(浩宇)와 호창(浩昌)이 편집, 간행하였고, 석인본이다. 군두에 이중철(李中轍)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9대손 수정(壽禎)과 10대손 휘종(輝鍾)의 발문이 있다.
맨 앞에 세계도(世系圖)·연보(年譜) 각 1편이 있고, 시 36수를 비롯하여 여러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강개하며 임진왜란과 정묘호란·병자호란 등을 겪은 뒤의 광경을 읊은 것이 많다. 시 가운데 「일선회고(一善懷古)」는 전란 뒤에 폐허가 되어버린 선산지방을 지나면서 지난 날의 모습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이천도중(利川途中)」·「사하도중봉우설(沙河途中逢雨雪)」은 길에서 비나 눈을 만나서 괴로워하는 것을 전란을 만나 괴로워하는 백성의 심정에 비유한 것이다.「저요양성유감(抵遼陽城有感)」은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느낀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문강홍립투호개탄유음(聞姜弘立投胡慨嘆有吟)」은 한 나라의 도원수로서 자기의 직분을 지키지 않고, 청나라에 투항한 강홍립(姜弘立)의 행위를 매국적 행위라고 비난하는 내용이다. 「조천일록」도 1618년(광해군 10) 8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명나라를 다녀오는 동안에 만났던 인물과 다루었던 업무, 중요한 대화의 내용 등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명나라 서울까지의 노정과 당시 풍물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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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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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 종친님! 『경암집』영인본이나 국역본을 구할수 있을까요?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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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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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집은 후송재집 에 합본되어 있습니다
대종회사무실에도 있을 듯~
구하시는 방법은 후 영인본으로
사촌마을 계시는 (전화 054-114)후송재파(계파)김형수종친께 문의 바랍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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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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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본 홈 <도평의공파 란>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