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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산행 (1월 23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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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8 14:06 조회1,554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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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산행 (1월 23일 일요일)

○코스 : 서울역 11번출구---남산 백범광장, 소월시비---남산 정상, 국사당터---명동성당---수하동 대은암터 추정지---을지로입구역---동대문역---낙산기슭 비우당(이수광 집터)---낙산 정상---대학로 문화거리(혜화역 4번출구)---성균관 上谷 동쪽 개울가(현재 복개) 쌍계당터 추정지

○집결 : 1월 23일 09:00시, 서울역 11번출구



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김예생---김윤종---김진기---김대섭---여+이수광(---이민구<---외손 신필화>)

김구덕---김오문---김중엄---김뉴


서울 남산(南山) 아래 명동 일대(옛 명례방)와

동숭동 대학로 뒷산인 낙산(洛山) 언저리에 전해오는 기록을 보면,

이곳은 우리 문중의 문온공파의 조선 초중기의 세거지인 듯 합니다. 


남산(南山) 국사당 중록에서 마주 보이는 명례방 수하동(明禮坊水下洞, 현 명동일대)에는 문온공파 김맹헌 선조님께서 짓고 ---김자양---김예생---김윤종---김진기---김대섭---여+이수광(---이민구---외손 신필화) 로 전해 내려왔다는 대은암(大隱庵).


낙산의 동대문쪽 기슭 중턱에는 유관(柳寬, 1484-1545), 외4대손 이희검(1516-1579), 이희검의 아들 이수광(1563-1628)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

신대우물이라 하여 신숙주(1417-1475)의 손자로 중종·명종 때 대학자요 시인인 신광한(1484-1555)이 살았던 집터에서 솟아나는 우물


낙산 서쪽 산록인 쌍계동(현 성균관대학교)에는 泮水(반수: 성균관을 싸고 흐르는 개울) 동쪽 개울가에 있던 안정공파 김뉴(金紐)의 글방터 쌍계재(雙溪齋)



1) 명례당 수하동 대은암

김대섭의 사위 지봉 이수광의 아들인

동주 이민구의 <동주선생문집>권2 대은암서(大隱庵序)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인 것 같습니다.

대은암은 명례방 수하동에 있는데, 침교(枕橋)가 계곡에 닿아 있고, 앞으로는 남산(南山)을 마주보고 있는데, 곧바로 국사당(國祀) 중록(中麓)으로 이어진다. 나라를 한양에 도읍으로 하여 정립할 즈음, 김방경의 6대손이며 김구용의 손자인 김맹헌이 직제학으로 있을때 개성(松都)에 있는 가옥의 자재를 뜯어다가 지었다.。첨정 김자양, 군수 김예생, 절도사 김윤종, 진사 김진기에 전해 내려와 이민구의 외할아버지 도사 김대섭(1549-1594)에 이르렀다. 집은 다시 전해져 이민구에게 있는데, 내옥(內屋經)은 선군 이수광(1563-1628) 시절에 수선하여 이름 짓기를 대은암 이라 하였다. 객당(客堂)은 이민구(1589-1670)가 처음 지어 세운 것인데, 지금은 이민구의 외손 신필화(申弼華, ?-?)에게 돌아갔다.

 ---이하 생략---


東州先生文集卷之二

大隱庵序

大隱庵明禮坊水下洞。枕橋臨溪。前對南山。正直國祀中麓。始國家定鼎漢陽。有金公孟獻。上洛公方慶五(*六의 오기)代?若齋九容之子(*孫子의 오기)。以直提學在徙中。撤松都屋材。結構于?。傳僉正自讓,郡守禮生,節度使胤宗,進士震紀。至吾外王父都事公大涉。家再傳爲吾(=이민구)有。內屋先君(=이수광)中繕。名之曰大隱庵客堂所創置。今歸外孫申弼華。夫人營立室廬。孰不欲傳之子孫久遠。然而下自公卿庶人。所以固其基?墻壁。辛勤以成就者。不易世而改壞者有矣。遇不肖子孫。?之爲酒食費者有矣。不幸數遭喪亂焚劫。又罕有以得全。見嗣守先業若斯之難也。此屋雖甚矮陋淺隘。不足備吉凶之所。而傳三姓二百六十餘年。不?于兵?。不屬于他人。中外相承。?有舊物。?亦幸矣。乃略敍其顚末以遺弼華。?知吾所自出與屋之相傳有 源有委。庶幾深惟永念。以無替張老之頌辭也。舊有校理繼善重修序文。篇末有曰。若余者學海跛鼈。文苑棲螟。空谷流年。已窮?鼠之五技。上林落照。未借??之一枝。先君覽之憮然曰。恐是人不究於壽命。果以翌年年二十八終。今其文散佚不存。故偶及之云。


명례방 수하동

<서울육백년사>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을 개편한 경기도는 종전의 수 개의 동을 통합하여 1개의 동(洞) 정(町) 통(通) 정목(丁目)으로 하는 경성부 말단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이때에 종래의 부(部) 방(坊) 계(契) 동(洞)의 제도는 폐지되고 새로 186개 동 정 통 정목이 설치되었다.[註34]

새로 설치된 186개의 동 정 통 정목의 명칭과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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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통1정목(南大門通一丁目)-미동 일부 · 하다동 일부 · 대광교동 일부 · 사자청동 일부 · 소광교동 일부 · 석동 일부 · 동현동 일부 · 광교동 · 부정동 일부 · 백목전동 일부 · 청포후동 일부

수하정(水下町)-석동 일부 · 수하동 일부 · 상려동 일부 · 하려동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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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정2정목(黃金町二丁目)-죽동 일부 · 저동 일부 · 조동 일부 · 상려동 일부 · 하려동 일부 · 수하동 일부 · 동현동 일부 · 장악원동 일부 · 묵정동 일부 · 냉정동 일부 · 명동 일부 · 구남부동 일부 · 소룡동 일부 · 혜민동 일부

명치정1정목(明治町一丁目)-장악원동 일부 · 명동 일부 · 구남부동 일부 · 소룡동 일부 · 대룡동 일부 · 종현동 일부 · 저동 일부


<인터넷 검색>

장악원동은 혹은 장악원골이라고도 했는데 을지로 2가 198~199번지에 장악원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모시전골[저동(苧洞)]은 조선시대에 저동 1가와 명동 1가·충무로 2가에 걸쳐 모시를 파는 모시전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한국 교회 최초로 정기적인 신앙 집회가 열리던 곳은 명례방(明禮坊) 장악원(掌樂院) 앞(중구 명동 1가)에 있던 김범우(도마)의 집이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후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세례 성사를 베풀었지만 곧 신자들이 늘어나 집이 좁아 넘치게 되었다. 그러자 1784년에 명례방(明禮坊 ,명동 1가 지역) 부근에 있던 중국어 역관(譯官) 김범우(토마스)가 자기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다.


명동

명동(明洞)이란 동명은 이 곳이 조선초에 한성부(漢城府) 남부 명례방(明禮坊)이었으므로 여기에서 「명(明)」자를 딴 것인데 원래 이곳을 명례방골이라고 하다가 줄여서 명동이라고 하였다. 면적은 0.91㎢이며, 인구는 2,986명(2000)이다. 서울특별시 중구에 속한 동이다. 충무로 ·을지로 ·남대문로 사이에 있다. 동 이름은 남부 명례방의 ‘명’자를 딴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한성부 남부 명례방·훈도방 지역에 속했고, 일제강점기에 명치정1정목, 2정목정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명동1·2가동으로 바뀌어 명동1·2가와 충무로1·2가 일부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1955년 명동1가는 명동사무소의 관할 구역이 되었고, 1970년 주민 감소로 인하여 남산동1~3가와 초동 관할의 저동1가가 명동사무소의 관할 구역으로 통합되었다. 1985년 예장동의 일부 지역도 명동사무소 관할로 통합되었고, 1998년 정부조직개편에 따라 장교동, 무교동, 태평로1가, 을지로1·2가, 남대문로1·2가 일부, 삼각동, 수하동, 수표동을 통합하였다.

이 동은 장교동, 무교동, 다동, 태평로1가, 저동(苧洞) 1가, 을지로1·2가, 충무로 1 ·2가, 남산동 1∼3가, 예장동 일부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중국대사관과 명동성당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상가지역이다. 한국의 금융 중심지이며 첨단 유행문화의 거리이기도 하다. 전국은행협회, YWCA, UNESCO회관, 로얄호텔 등과 다양한 종류의 소비재 상점들이 있다. 또한 종마루[鐘峴]에는 한국 가톨릭의 총본산인 명동성당이 있는데, ---


남산 국사당

<서울육백년사>

남산 국사당은 1925년 조선총독부가 남산 중허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우면서 정상에 있었던 국사당을 현재의 인왕산 선바위 옆에 강제로 이건시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낙산 동대문쪽 기슭, 이수광 지봉유설 집필터 비우당

서울육백년사에 보면

낙산에서 삼선동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낙산의 동대문쪽 기슭 중턱에는 태조 때부터 세종까지 4대 임금을 섬긴 정승 유관(柳寬, 1484-1545)이 살았던 집이 있었는데, 이 집은 그 후 유관의 외손으로 물려져 4대손인 판서 이희검(1516-1579)이 살았고, 임진왜란 후 이 집을 찾아든 것이 이희검의 아들이요 대학자인 이수광(1563-1628)으로, 비를 근근이 가린다는 뜻인 비우당으로 당호를 짓고 청빈철학을 계승하며 지봉유설을 집필한 곳으로 서울시가 최근 복원했다. 즉 유관(柳寬)의 외(外) 5대손(代孫) 되는 지봉(芝峰) 이수광이 유관의 옛집터에 서재를 지어 이름을 “비우당(庇雨堂)”이라 하였다.

또 낙산에는 신대우물이라 하여 신숙주(1417-1475)의 손자로 중종·명종 때 대학자요 시인인 신광한(1484-1555)이 살았던 집터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있다. <이규태 자료>




3) 성균관 상곡 동쪽 골짜기, 김뉴의 쌍계재터

낙산 서쪽 산록에 있던 쌍계동은 암석이 기이하고 수림이 울창하여 물이 흐르는 절경으로 삼청 인왕 백운 청학동과 더불어 도성안 5대 명승지(名勝地)로 꼽혔다고 한다.


泮宮(반궁: 성균관) 上谷 북쪽 골짜기

성균관을 가운데 두고 그 동쪽과 서쪽으로 泮水(반수)가 흐른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동쪽 개울 위편이 경치 좋고 그윽한 터전이었다고 한다.

泮水(반수: 성균관을 싸고 흐르는 개울) 동쪽 개울가에

김뉴(金紐)의 글방터 쌍계재(雙溪齋) 있던 자리라고 한다.


<용재총화>

쌍계동은 성균관 윗골(上谷)에 있는데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룬다. 김뉴가 개천가에 초당(草堂)을 짓고 복숭아나무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강희맹이 글(賦)을 지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 古蹟조

쌍계재(雙溪齋)의 遺址가 성균관 泮水(성균관을 싸고 흐르는 개울) 동쪽에 있는데 참판 김뉴(金紐)의 옛집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산천의 형승(形勝)

쌍계동은 성균관의 웃골[上谷]에 있다.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루었는데 김뉴(金紐)가 개천가에 초당을 짓고 복숭아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진산(晉山) 강희맹(姜希孟)이 여기에 대하여 글[賦]을 지었다. 김뉴의 문장과 풍류가 당시 세상에 드날렸으므로 호걸들이 그를 따라 노는 이가 많았다.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서재를 남강(南江)에 짓고 또 반궁(泮宮) 북쪽 골짜기에 쌍계당(雙溪堂)을 지어서 매양 봄이면 친구들을 불러 시를 짓고 실컷 마시며 멋지게 놀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고 지목했으니, 시와 글씨와 거문고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윗글중....  김방경의 5대손이며 김구용의 아들인....(원문)...  수정  나라를 한양에 도읍으로하여 정립할때 김방경의 6대손이며 김구용의 손자인  김맹헌이 직제학으로 있을때 개성(松都)에 있는 가옥의 재료를 뜯어다가 지었다.。그후 첨정 김자양, 군수 김예생, 절도사 김윤종, 진사 김진기에 전해 내려와 이민구의 외할아버지 도사 김대섭(1549-1594)에 이르렀다. 집은 다시 전해져 이민구에게 있는데, 내옥(內屋經)은 선군 이수광(1563-1628) 시절에 수선하여 이름 짓기를 대은암 이라 하였다. 객당(客堂)은  이민구(1589-1670)가 비로소 새로 세운 것인데, 지금은 이민구의 외손 신필화(申弼華, ?-?)에게 돌아갔다.    이래야 될 것 같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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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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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님 감사합니다.
지적하여 주신 사항을 정정하여 놓았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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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기다리던 일입니다. 무조건 참석입니다. 윤만 등반 대장님-----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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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솔내 대부님! 큰 지적 감사드립니다.
나름대로 교정은 해 놓았습니다만, 더 살펴 주시기를.....
명동 동사무소 문의결과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과 (종로) 삼일빌딩 사이의 지역이
수하동 인데, 쁘렝땅백화점 인근 이라고 합니다. 현재 개발중인 지역이라고 합니다.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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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네. 반가운 만남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