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21---김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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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9 09:37 조회1,389회 댓글0건본문
■ 디지털한국학
김응해(金應海)
1588(선조 21)∼1666(현종 7).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군서(君瑞).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이며, 응하(應河)의 아우이다.
1616년(광해군 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희천군수(熙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후금(後金) 정벌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등을 파견하자, 형 응하와 함께 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20년에 강계부사·부령부사·인동부사·정주부사 등을 지내는 동안 청렴결백하여 칭찬을 많이 들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별장으로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켰다.
그러나 적병이 곧장 서울을 공격하자 그는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진로를 막고 고군분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적에게 포위되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살아났다.
그뒤 1647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올랐다. 형제가 모두 무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耳溪集. 〈趙啓纘〉
조증요동백(詔贈遼東伯) 김장군(金將軍) 묘비(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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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장군에게 멀리서 영의정을 추증하고, 용만(龍灣) 강가에 사당을 세우고 비석을 사당 앞에 세웠으며, 그의 아들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의 아우 응해(應海)는 형이 입던 옷으로 강상(江上)에서 혼을 부른 다음 그 옷을 가지고 돌아와서 철원 선영의 곁에 묻었는데, 한때 문사(文士)들이 다투어 서로 뇌문(言+ 文)과 만사(挽辭)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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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조 때 장군의 아우 응해(應海)가 역옥(逆獄)에 연루되자 상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응하의 아우이다. 또 일찍이 노(虜)와 싸우다가 패전하자 자문(自刎)까지 하였으니, 반드시 나라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고, 바로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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