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20---김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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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9 09:34 조회1,485회 댓글1건본문
■ 디지털한국학
김응하(金應河)
1580(선조 13)∼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경의(景義). 철원출신.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1604년(선조 37) 무과에 발탁되었으나 처음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평소부터 그의 장재(將才)를 아끼던 박승종(朴承宗)이 병조판서가 되자 비로소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여러 사람의 질시를 받아 파직당했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박승종이 전라관찰사로 나가자 다시 기용되어 비장이 되었다.
1610년에 재차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영의정 이항복에 의해 경원판관으로 발탁된 뒤 삼수군수(三守郡守)·북우후(北虞侯)를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의 휘하에 좌영장(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천명의 휘하군사로 수만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신종(神宗)은 그가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처자에게는 백금을 하사하였다. 조정에서도 그의 전사를 가상히 여겨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海東名臣傳, 密庵集. 〈李貞一〉
조증요동백(詔贈遼東伯) 김장군(金將軍) 묘비(墓碑)
출전 : 국역 송자대전 9 (1982.9, 민족문화추진회). p.357
신종황제 47년 만력(萬曆) 무오년(광해군10, 1618)에 건노(建奴)가 무모하게 침략해 왔을 때 사천(四川)·파촉(巴蜀)·요동(遼東)·계주(계주)의 군사를 크게 징발하여 도독 ★유정(劉綎)과 ★유격(遊擊) ★교일기(喬一琦)를 보내 정벌하게 하는 한편 본조(本朝)에도 군대징발을 청하므로 본조가 2만의 병력을 징발하여 ★강홍립(姜弘立)을 원수로 삼고 ★김경서(金景瑞)를 부장으로 삼아 유·교 두 장군과 날짜를 정하여 협공하기로 하였다.
그때에 장군은 선천군수(宣川郡守)로서 좌영병을 거느리고 김경서의 군진에 예속되었다가 기미년 2월 21일에 ♠요하(遼河)를 건너 노지(虜地)에 들어가서 ♠부차령(富車嶺)에 이르렀는데, 이 무렵 황제는 이미 정무를 살피지 않고 환관이 용사(用事)하였으므로, 군용(軍用)이 계속되지 못한데다가 제군이 경솔히 진격하여 패전하자, ★유 도독은 스스로 목매어 죽은 터였다.
우리 군사가 드디어 노(虜)와 서로 맞닥뜨리게 되어 장군이 수하병 3천명을 거느리고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곧장 나아가 지휘하여 진을 치는데, 신기(神氣)가 조용하고 한가한 가운데 진이 이미 이루어졌다. 장군이 ★강홍립(姜弘立)에게 고하기를,
"속히 우영(右營)에 명하여 협력해서 적을 맞아 싸우게 하십시오."
하니 홍립이 우영장 ★이일원(李一元)에게 영병(營兵)을 거느려 서로 돕게 하였다. 그러자 장군이 이일원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만약 험지를 차지하지 못하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였으나, 일원이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적 수천 기(騎)가 양진(兩陣)의 사이를 가로질러 끊고 들어오니, 일원은 도망갔다.
이윽고 6만의 적이 우리 군진과 마주하여 1리(里) 밖에 진을 치므로 정예병을 선발하여 곧 바로 그 앞을 범하되 장군이 포수(砲手)로 전열(前列)을 삼아 일시에 포를 발사하니,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고 적병은 퇴각하였다. 이와 같은 싸움이 세 번이나 계속되었다. 그때에 ★교 유격이 패하여 홍립의 진에 와 있으면서 아군을 바라보고 감탄하기를,
"귀국(貴國)의 보졸(步卒)이 평지에서 철기(鐵騎)와 서로 대항해도 저와 같을 수 있군요."
하였는데,
이윽고 대풍(大風)이 갑자기 일어나 먼지가 사방에 가득해서 포와 화살을 발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적이 곧 힘을 합하여 충돌(衝突)해 들어오니, 우리 군사는 그 자리에서 다 죽었다. 장군이 손에는 활을 들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서 홀로 버드나무 밑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두 졸병이 가지 않고서 한 사람은 기(旗)를 잡고 한 사람은 화살을 받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군은 화살을 헛되이 쓰지 않고 쏘기만 하면 반드시 둘씩 맞혀 적의 시체가 쌓여 무더기를 이루었으며, 죽인 적들 가운데는 노(虜)의 귀장(貴將)이 많았으나, 노가 적극 비밀에 붙였다.
장군은 무거운 갑옷을 입었으므로, 화살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집중되었으나 뚫을 수 없었다. 화살이 이미 떨어지자 마침내 칼로 적을 치되 목을 도리고 허리를 쳐서 휙휙 소리와 함께 적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는데, 소리가 흡사 산을 깨뜨리는 듯 하였다. 적과 열 번 싸워서 열 번 소탕하였다. 이보다 앞서 강홍립(姜弘立)이 통역관인 하세국(河世國)을 노진(虜陣)에 보내자 노가 급히 우리 사람을 불렀으니, 그것은 대개 불러서 유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군이 응하지 않고 크게 홍립을 꾸짖기를,
"당신의 무리는 몸만 아끼고 나라를 저버려 서로 구원하지 않았다."
하였다. 칼도 부러지고 화살도 떨어진 맨주먹이었으나 오히려 더욱 용기를 분발하는데, 한 적이 뒤에서 던지는 창에 의해 장군이 마침내 땅에 엎어져 절명하고 말았으니, 이날이 3월초 4일이었다. 그러나 장군은 칼자루를 혼에 쥔 채 놓지 않고 노기(怒氣)가 등등하니, 적들이 서로 돌아보고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교 유격도 자살하자 홍립과 경서가 이일원 등과 함께 모두 갑옷을 벗고 노추(奴酋)에게 항복하니, 노추가 그들에게 양진에서 죽은 시체를 묻게 하였다. 그런데 장군의 시체만은 썩지 않았고 칼자루는 아직도 그 손아귀 속에 쥐어진 채였다.
조정에서는 장군에게 멀리서 영의정을 추증하고, 용만(龍灣) 강가에 사당을 세우고 비석을 사당 앞에 세웠으며, 그의 아들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의 아우 응해(應海)는 형이 입던 옷으로 강상(江上)에서 혼을 부른 다음 그 옷을 가지고 돌아와서 철원 선영의 곁에 묻었는데, 한때 문사(文士)들이 다투어 서로 뇌문(言+ 文)과 만사(挽辭)를 지었다.
그 다음해인 경신년(광해군12, 1620)에는 신종황제가 조서를 내려 증작(贈爵)으로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고, 그의 처자(妻子)에게 백금(白金)을 하사(下賜)하였는데, 그 고명(誥命)이 중하고도 성대하여 사실이 모두 [충렬록(忠烈錄)]에 기록되었다.
그뒤에는 잠곡(潛谷) 상국(相國) 김육(金堉)이 다시 그 시종(始終)을 거두어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에 편입(編入)하였다.
장군은 신장(身長)이 8척이요 언어가 과묵(寡默)하고
-----생 략----
장군의 휘는 응하(應河), 자는 경희(景羲)로, 세상에서 경주인(慶州人)이라 한다. 경주 김씨는 본시 왕자(王者)의 후예로서 고려의 명장(名將) 방경(方慶)이 그의 원조(遠祖)이고 그의 아버지 증승지(贈承旨)는 휘가 지사(地四)이다. 장군은 만력 8년 경진 3월 초3일에 태어났으며, 죽을 때의 나이는 겨우 40세였다. 사당은 철원부 보개산 동쪽 서화전리(西花田里)에 있다.
숭정 기유년 6월 일에 쓴다.
*주1 -- 기유년 : 숭정 연간에는 己酉는 없음. 아마 己卯(1639. 인조17)의 오기인 듯함.(항용(제) 추록)
20. 국역 국조인물고_김응하(金應河)(2004. 5. 20. 윤식(문) 제공)
▲출전 : 국역 국조인물고 제5집 219쪽~224쪽
비명(碑銘)조경(趙絅) 지음
명(明)나라 만력(萬曆 명 신종의 연호) 47년인 기미년(己未年 1619년 광해군 11년) 봄에 건주(建州) 오랑캐[후금(後金 : 뒷날의 청나라)가 명을 거역하자 천자(天子)가 매우 노하여 군사를 내보내 정벌하면서 우리 동방에 군사를 동원해 달라고 하였는데, 이는 내지[內服]와 다름없이 여긴 것이다.
그때 명나라 경략(經略)은 양호(陽鎬)이고 우리 나라 원수(元帥)는 강홍립(姜弘立)이고 부원수(副元帥)는 김경서(金景瑞)였는데, 군대를 좌영(左營)과 우영(右營)으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장군(김응하)은 선천 군수(宣川郡守)로 조방장(助防將)을 겸임하여 좌영군(左營軍)의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 유 도독[劉都督 유정(劉綎)]과 교 유격[喬遊擊 교일기(喬一琦)]은 선봉(先鋒)을 맡고 우리 좌영군은 그들의 왼쪽 날개가 되었는데, 이일원(李一元)이 <우영장으로> 장군을 보좌하였다.
강홍립과 김경서는 중군이 되어 심하(深河)에 이르러 진(陣)을 쳤다. 장군이 이일원에게 말하기를, “병서(兵書)에 ‘먼저 묵쪽의 산을 점거한 자가 승리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낮은 지대에다 포진(布陣)하였으니, 불가하지 않겠는가? 높은 지대가 없단 말인가?” 하니, 이일원이 고집을 부리고 진을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오랑캐 기병(騎兵) 수천이 우리 좌우진(左右陣)으로 들이닥치자 이일원은 먼저 도망가 버렸다. 이에 오랑캐의 정예병이 모두 좌영으로 모여들었다.
장군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화기(火器)를 가진 자는 화약을 채우고 활을 가진 자는 활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가 내가 북을 치면 일제히 쏘도록 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군법(軍法)을 적용하겠다.”고 하였다.
철갑(鐵甲)으로 무장한 기병이 담장처럼 에워싸고 육박해 왔는데 그 거리가 십 보(十步)도 채 안 되었다. 장군이 북채를 들고 북을 두드리자 탄환에 맞아 죽은 오랑캐가 부지기수(不知其數)였고 안장만 남은 오랑캐 말들이 길을 꽉 메우는 등 오랑캐가 크게 붕괴되었다.
한참 있다가 오랑캐가 또 건장한 병사를 선발하여 보충한 다음 사력(死力)을 다해 서너 번 공격해 왔는데, 접전(接戰)할 때마다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으므로 오랑캐가 달아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큰바람이 일어나 모래가 사람의 얼굴을 난타하였다. 햇빛은 어두컴컴해지고 화기(火器)와 화약은 공중으로 날아가 우리 군사가 기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오랑캐가 덮쳤다.
우리 군사는 뿔뿔이 흩어지고 장군 혼자 버드나무를 등지고 대황(大黃 큰 황색의 활)을 당겨 오랑캐를 쏘았는데, 맞았다 하면 반드시 시위 소리에 따라 쌍쌍이 쓰러졌으므로 오랑캐가 상당히 많이 죽었다. 화살이 떨어지자 장검(長劍)을 가지고 접전하였는데 참살한 숫자가 또 그보다 배나 되었다. 장군도 수십 군데를 찔려 목숨이 이미 끊어졌는데도 여전히 칼자루를 잡고 꿋꿋이 서서 움직이지 않은 채 눈에 노기(怒氣)가 서려 있었다고 한다.
이때에 중군(中軍)이 한 부대의 병력을 출동하여 개미만큼이라도 지원하였다면 오랑캐의 군사가 많더라도 장군의 한 주먹에 절반 정도 꺾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강홍립과 김경서는 진중(陣中)에서 관망하고 반복해서 간계(奸計)를 생각하다가 장군이 호랑이 이빨에 죽는 것을 달갑게 여겨 오랑캐를 향하여 화살 한 대도 쏘지 않았으니, 오랑캐가 원수가 아니라 강홍립과 김경서가 바로 원수이다.
이 소경(李少卿)이 말하기를, “능(陵)과 율(律)의 죄는 하늘에까지 닿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것이다. 모르겠지만 강홍립과 김경서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것인가?
아! 장군은 잘 싸웠고 또 장하다고 하겠다. 두숭(杜崇), 유정(劉綎)은 중국의 명장(名將)으로서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도 삽시간에 오랑캐에게 짓밟히어 길바닥에 피가 흐르고 한 명의 군사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런데 장군은 기세가 등등한 오랑캐를 혼자 맞아 수만의 괴자마(拐子馬)를 제압하여 겨우 천 명의 열세한 군사로 하여금 죽는 것을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게 하였고 자신도 이처럼 적병을 참살하였으니, 비록 관 운장(關雲長 촉한의 관우), 악 무목(岳武穆 남송의 악비)이라도 어떻게 능가할 수 있겠는가?
교 유격은 죽을 때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동국(東國)의 군사는 날래고 장수는 용맹하다.’고 칭찬하였는가 하면, 오랑캐는 회군(回軍)할 때도 버드나무 아래 전쟁터를 피해 가면서 ‘버드나무 아래 장수는 두려울 만큼 역전(力戰)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고 말하기를, “좋은 남자, 좋은 남자로다. 후일 다시 태어나면 내가 얻었으면 한다.”고 하였으니, 장군의 명성이 중화와 오랑캐를 진동하였다는 말이 어찌 헛된 것이겠는가?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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