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선조님의 최종 관직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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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1-19 19:14 조회1,632회 댓글1건본문
익원공 선조님의 최종 관직명은 좌정승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에 관해 몇몇 논의가 있었던 것 같아 이와 관련한 몇가지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의정부, 의정부의 직제 변경사, 익원공 약사, 조선왕조실록의 익원공 기록 내용, 경진보 기록 내용 등을 중심으로 익원공 선조님의 최종 관직명은 좌정승, 좌의정 중 어느 것이 옳은지 조심스럽게 살펴 보았습니다. 잘못이 있을지 모릅니다. 지적 바랍니다.
1. 의정부 [議政府]란
출전 : 포탈사이트 <다음>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관청. 도당(都堂)·황각(黃閣)·묘당(廟堂)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두고, 문하부(門下府)·삼사(三司)·중추원(中樞院)의 고관이 모여 국무를 상의하는 회의기관으로서, 문하부 백관 통솔과 서정(庶政)을 관장하는 포괄적인 기능를 맡았다.
1400년(정종 2)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도총제 이하의 무관을 배제한 문하부와 삼사의 합의체로 하였으며,
1401년(태종 1) 문하부를 폐지하여 사간원(司諫院)을 독립시킨 뒤, 문하부의 재신을 의정부의 직원으로 충당하였다. 이로써 의정부는 문하부의 직능을 계승하여 백사(百司)를 맡아보는 행정기관으로 재정을 맡은 사평부와, 군정을 맡은 승추부와 함께 국무를 분담하였다.
1414년(태종7) 의정부의 서무(庶務)를 육조(六曹)로 나누어 육조로 하여금 사무를 분장하게 하고 소관사무를 직계하여 시행하도록 했으며, 의정부에는 연륜과 덕망이 높은 중신을 배치하여 국가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만 회의하여 왕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1436년(세종18) 육조의 소관업무를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 왕에게 계문(啓聞)하여 그 뜻을 받은 다음 육조로 하여금 시행하도록 하는 서사제도(署事制度)를 실시함으로써 의정부의 기능이 다시 중대해졌다.
세조 때 다시 육조직계로 바뀌었다가 1516년(중종 11) 의정부의 서사제가 부활되면서 1864년(고종 1)까지 의정부 중심의 국정이 운영되었으나,
1554년(명종 9)부터 1864년까지 삼포왜란 이후 임시로 설치된 비변사(備邊司)가 중앙과 지방의 군국기무(軍國機務)를 맡게 됨에 따라 의정부 실권은 비변사로 옮겨갔고, 의정부는 형식적 최고기관으로서만 존속하게 되었다.
1864년 종래까지의 비변사 기능에서 외교·국방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다시 의정부에 귀속시킴으로써, 의정부의 실질적인 기능이 거의 회복되었고, 65년 비변사를 의정부에 합속시킴으로써 비변사 설치 이전의 기능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섭정,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중심으로 한 여흥민씨(驪興閔氏)의 정권장악, 일본의 영향력 증대 등으로 의정부의 기능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의정부에는 영의정(정 1 품) 1명, 좌·우의정(정 1 품) 각 1명, 좌우찬성(종 1 품) 각 1명, 좌우참찬(정 2 품) 각 1명을 두었고, 그 외에 사인(舍人;정 4 품) 2명, 검상(檢詳;정 5 품) 1명, 사록(司錄;정 8 품) 2명 등의 관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2. 직제의 변천 (출전 : 다음)
3. 익원공 소개
김사형(金士衡) 1341(충혜왕 복위 2) ∼ 1407(태종7).
고려·조선의 문신.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의 손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전(甸)의 아들. 음보(蔭補)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감찰 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1377년(우왕3) 집의(執 義)·개성부윤(開城府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있은 뒤에는 교주강릉도 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2) 지밀직사(密直司)로 대사헌을 겸하다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특진, 뒤에 삼사 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1390년 윤이(尹?) · 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 정몽주와 대결하여 서로 탄핵하였다. 1392년 삼사 우사 · 동 판도평의사사로 있다가 여러 장상(將相)과 함께 이성계(李成桂:太祖)를 추대,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다. 이 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에 봉해졌다.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이어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에 상락백(上洛伯)으로 봉해졌다.
그 후 좌정승을 지냈고 태조 7(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에는 장자(長子)에게 선위(禪位)하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었다.
1399년(정종1)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태종1) 좌정승(左政丞)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공직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하면서 한 번도 탄핵받은 일이 없었다. 시호는 익원(翼元).
4. 조선왕조실록 기록 내용 요약
1) 태종 1년(1407년) 3월 1일
이거이(李居易)를 파면하여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을 삼고, 하윤(河崙)으로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을, 김사형(金士衡)으로 좌정승(左政丞)을, 이서(李舒)로 우정승(右政丞)을, 조영무(趙英茂)·곽추(郭樞)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이직(李稷)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조박(趙璞)으로 삼사 좌사(三司左使)를, 조호(趙瑚)로 예문관 태학사(藝文館太學士)를 삼고, 문중용(文中庸)을 뽑아서 사헌 감찰(司憲監察)을 삼고, 최해산(崔海山)으로 군기 주부(軍器注簿)를 삼았다. 참찬(參贊) 권근(權近)이 상서하기를,
2) 태종 2년(1408년) 1월 20일
좌정승 김사형(金士衡)이 병으로 사직(辭職)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 태종 2년(1408년) 4월 19일
좌정승 김사형(金士衡)이 각사(各司)를 거느리고 원자(元子)의 책봉을 하례(賀禮)하였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
4) 태종 2년(1408년) 6월 26일
조회가 끝나자 특별히 영의정부사 이거이(李居易)·영사평부사 하윤(河崙)·좌정승 김사형(金士衡)·우정승 이무(李茂)·판승추부사 조영무(趙英茂) 등을 불러 대전(大殿)에 오르게 하고 김사형에게 눈을 돌려 위문(慰問)하였으니, 김사형이 병(病)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조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농사의 풍흉(?凶)과 전함(戰艦)의 허실(虛實)을 의논하였다.
5) 태종 2년(1408년) 7월 9일
비가 내리었다. 정승(政丞) 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가 대궐에 나아가 하례(賀禮)하고 약주를 들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인하여 의정부에 술을 내려 주었다.
6) 태종 2년(1408년) 7월 11일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윤(河崙)·정승(政丞)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를 불러 신도(新都)로 돌아갈 것의 가부(可否)를 의논하였다. 임금이 바야흐로 다스림[治]에 뜻이 있어 매양 조회(朝會)를 보는데, 하늘이 밝지 아니하여, 여러 신하가 간혹 이에 이르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7) 태종 2년(1408년) 10월 4일
김사형(金士衡)으로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를, 하윤(河崙)으로 좌정승을, 성석린(成石璘)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이직(李稷)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권근(權近)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 우정승 이무(李茂)를 보내어 등극(登極)을 하례(賀禮)하고자 하여, 하윤·김사형·이무를 불러 말하기를,--
8) 태종 2년(1408년) 11월 8일
김사형(金士衡)으로 상락 부원군(上落府院君)을, 이저(李佇)로 겸 판승추부사(兼判承樞府事)를 삼고, 곽충보(郭忠輔)에게 말 1필을 내려 주고, 또 안우세(安遇世)에게 말과 옷을 내려 주었으며, 박순(朴淳)의 집에 종이 1백 권(卷)과 쌀·콩 아울러 1백 석을 내려 주었다.
9) 태종 7년 7월 30일 --김사형 졸기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이 졸(卒)하였다. 김사형의 자(字)는 평보(平甫)인데, 안동부(安東府) 사람이다. 대대로 귀하고 현달하여, 고조(高祖) 김방경(金方慶)은 첨의 중찬(僉議中贊) 상락공(上洛公)으로서, 문무 겸전의 재주가 있어 당시의 어진 재상이었고, 조부(祖父) 김영후(金永煦)는 첨의 정승(僉議政丞) 상락후(上洛侯)였다.
김사형은 젊어서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거쳤으나, 이르는 데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무진년 가을에 태상왕이 국사를 담당하여 서정(庶政)을 일신하고 대신을 나누어 보내 각 지방을 전제(專制)하게 하였을 때, 김사형은 교주 강릉도(交州江陵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되어 부내(部內)를 잘 다스렸다. 경오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대사헌(大司憲)을 겸하였고, 조금 뒤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대헌(臺憲)에 있은 지 일년이 넘었는데 조정이 숙연(肅然)하여졌었다. 여러 번 전직(轉職)하여 삼사 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가, 임신년 7월에 여러 장수·재상들과 더불어 태상왕을 추대하여,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 겸 병조 전서(兵曹典書), 응양위 상장군(鷹揚衛上將軍)에 승진하고, 일등 공신(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어 분의 좌명 개국 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2월에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에 봉작(封爵)되어, 식읍(食邑) 1천호에 식실봉(食實封) 3백 호(戶)를 받았다. 정축년에 겸 판사헌부사(判司憲府事)를 제수받았다.
무인년의 변란에 김사형이 조준(趙浚)과 함께 대궐에 나가 백관을 거느리고 적장(嫡長)을 세워 사자(嗣子)를 삼을 것을 청하였다. 상왕(上王)이 이미 내선(內禪)을 받으니, 녹공(錄功)이 또 1등이 되어 공신의 호를 더하기를, ‘동덕 정난 정사(同德靖亂定社)’라 하였다. 건문 황제(建文皇帝)의 등극 때에 중국에 들어가 하례하였다. 기묘년 12월에 스스로 성만(盛滿)하다고 진달(陳達)하여 여러번 직임을 그만두기를 비니, 상왕이 오랫 만에 허락하였다. 김사형이 조준과 더불어 8년 동안 함께 정승노릇을 하였는데,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하여 거리낌 없이 국정(國政)을 전단(專斷)하고, 김사형은 관대하고 간요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앉아서 묘당(廟堂)을 진압하니, 물의가 의중(依重)하였다. 주상이 즉위하자, 신사년 3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임오년 10월에 사임하고,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가 된지 달포가 지나서 부원군(府院君)이 되어 사제(私第)로 은퇴하였다.
김사형은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 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 않고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할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졸(卒)한 나이가 67세이다. 조회를 3일을 정지하고, 좌부대언(左副代言) 윤수(尹須)를 보내어 빈소에 제사하고, 시호를 익원공(翼元公)이라 하였다. 두 아들은 김승(金陞)과 김육(金陸)이다.
5. 족보상의 기록 내용
경진보(1580년) 기록 내용
士衡 : 左政丞 上洛伯,--중략,-- 本朝爲開國元勳諡翼元 墓在楊根 事見麗史
6. 종합판단
상기 자료들을 정리하여 보면,
1) 안동김씨 최초의 족보인 <경진보>에 좌정승으로 기록되어 있다.--士衡 : 左政丞 上洛伯
2) 의정부는 1400년에 신설되었다--영의정, 좌의정 등의 관직은 의정부 소속의 관직명인데, 조선초에는 의정부가 없었고 고려의 제도인 도평의사사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다가 1400년(정종 2)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도총제 이하의 무관을 배제한 문하부와 삼사의 합의체로 하였으며,
3) 1401년(태종1)에 의정부의 직제를 일부 바꾸었으나 좌의정이란 관직명은 없었다.--1401년(태종 1) 의정부 내의 문하부를 폐지하여 사간원(司諫院)을 독립시킨 뒤, 문하부의 재신을 의정부의 직원으로 충당하였다. 이로써 의정부는 문하부의 직능을 계승하여 백사(百司)를 맡아보는 행정기관으로 재정을 맡은 사평부와, 군정을 맡은 승추부와 함께 국무를 분담하였다. 그러나 이때 관직으로 좌의정은 없었고 좌정승이 있었다.
3) 익원공 선조님의 최종 벼슬은 1401년(태종1년) 좌정승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조선 왕조실록에 <신사년(1401. 태종1) 3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임오년(1402년. 태종2) 10월에 사임하고,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가 된지 달포가 지나서 부원군(府院君)이 되어 사제(私第)로 은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좌정승은 종1품의 관직인데 고려시대와 조선초의 고려시대 관직제를 사용할 때는 최고직인 문하시중, 좌 우 정승 등은 모두 종1품이었다.
*영사평부사란 고려시대와 조선 초에는 삼사, 춘추관, 경연, 전의시, 사복시, 선공사 등의 長을 말하며, 조선조 직제 개편 이후에는 돈녕부, 홍문관, 예문관, 경연청, 춘추관, 관상감 등의 長을 말한다. 종1품직이다.
4) 익원공 선조님의 올바른 최종 관직명은 좌정승이다--익원공께서는 좌의정, 우의정이란 관직명으로 직제로 바뀐 1414(태종 14)년 이전인 1401년에 좌의정이 되셨는데, 이때의 의정부 직제는 영사-좌정승, 우정승이었다.
1407년(태종 7)에 몰하셨는데 이 때의 직제명도 역시 좌정승이었다. 따라서 바른 익원공의 최종 관직명은 <좌정승>이 옳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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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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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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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좌정승으로 퇴임하실걸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