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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22---김홍립, 김번, 김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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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20 11:24 조회1,521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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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자료

김홍립(金弘立) 

공은 직제학 공예의 현손인데, 의표가 웅장하고 준수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인조 갑자년(1624)에 공산으로 호종하여 호위한 공으로 특별히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정축년(1637) 동궁을 모시고 심양으로부터 돌아와 병으로 죽으니, 일사 이공(=?)은 다음과 같은 만사를 지었다.

"서쪽 변방의 풍진이 아직 가라앉지 못했으니,

장한 혼 응당 오고 갈 때가 있으리라" <오창지>

묘 진천 남파랑동이며, 유갈(후손 참봉 在悳 찬)이 있다.



■ 문중자료

안주공(安州公) 휘 번(繁) : 1604(선조 37)--1671(현종 12)

양덕공(陽德公, 諱 時說)의 二子. 무과(武科)급제. 지혜와 용기를 고루 갖췄다. 병자호란(丙子胡亂)시 장사(壯士)로 추천되었고, 선전관(宣傳官) 겸 세마(洗馬)를 제수 받았다.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심양(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곳)으로 모시고 가서 8년간 모셨다. <심양일기>에 기록이 있다. 귀국해서는 안주판관(安州判官)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자 귀양을 갔다. 그 후 효종께서 <南山歌>(현재 不傳)란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壽 68세이며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이다.


 

■ 디지털한국학

김자점(金自點)

1588(선조 21)∼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억령(億齡), 아버지는 함($함04)이다.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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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권력기반 구축 

그 이후 공신세력의 권력추구와 패전에 대하여 극심한 공격을 가하는 일반사류들에 의하여 계속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그들 반청론자(反淸論者)들에게 염증을 느낀 인조의 후원으로 1639년에 고향으로 풀려나고, 이듬해에는 강화부윤·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류와의 제휴를 바탕으로 1642년 병조판서, 1643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같은해 우의정 및 어영청도제조에 오르고, 진하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644년에는 경쟁세력인 심기원 등을 역모혐의로 도태시키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은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대부분의 공신세력가들이 죽거나 은퇴하고 일반 반청사류들은 인조에 의하여 거부되는 상황 속에서,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1645년에는 숙원조씨(淑媛趙氏)와 결탁하여 인조의 의구심을 받고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죽이는 데 가담한듯하며, 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姜氏)에게 인조를 시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사사하게 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게 하였다.

또 인조와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자신의 손자인 세룡(世龍)을 혼인시킴으로써 궁중과 유착하였다.

한편으로 청나라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鄭命壽)무리들과 결탁하여 청나라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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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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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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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은회
작성일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