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23---김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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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21 09:40 조회1,937회 댓글3건본문
■ 디지털한국학
김광국(金光國)
1685(숙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대관(大觀). 승지 준원(俊元)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담(湛)이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41년 지평이 되었다.
이듬해 정언을 거쳐 장령·필선·헌납을 역임하고 1755년에 서장관이 되었다.
이듬해 사간에 이어 1759년에 승지, 1760년에 황주목사, 1766년에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1769년 도승지가 되고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
1779년(정조 3) 내의원의관이 되었다.
편저로는 《간독 簡牘》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李元根〉
■ 안동김씨 홈페이지
김광국(金光國)[1709 ~ 1783](숙종35~정조7)
字 仲觀, 乙卯 文科, 諡貞肅
승정원도승지겸경연참찬관(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 춘추관예문관수찬관(春秋館藝文館修撰官), 직제학상서원정지(直提學尙瑞院正至), 호조참판(戶曹參判), 제호조판서(除戶曹判書)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대관(大觀). 승지 준원(俊元)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담(湛)이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41년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이듬해 정언(正言)을 거쳐 장령(掌令)·주서(注書)·헌납(獻納)을 역임하고 1755년에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이듬해 사간(司諫)에 이어 1759년에 승지(承旨), 1760년에 황주목사(黃州牧使), 1766년에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1769년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이어 병조참판(兵曹參判)이 되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卒하였다.
시호(諡號)는 정숙(貞肅)이다.
편저 <선배수간(先輩手柬)>,<간독(簡牘)>
1778년(정조2) 무술보 편찬 서문 찬(戊戌譜 編纂 序文 撰)
墓: 용인시 원삼면 분지촌
配:정부인 昌原黃씨
配:정부인 竹山安氏
七陽(郡事公)-塡-三老-坤-允粹-謙-彦鐸-珣-俊元-樞-壽基-湛-光國
公八次佩符哥君竭忠一朝所推每侍
上和韻詩曰百年鴻渥煥重明此日宸心慕更功
上命賜御筆三十券又特
諭曰勉我中子爲聖爲賢惟在于爾事見祖訓正宗朝遺祀官
李崇運致祭賜送御筆輓章
간독 簡牘
조선시대 연산군∼영조까지 명현들의 서간문을 10여 년 동안 모아 1750년(영조 26)에 병조참판 김광국(金光國)이 편찬한 책.
필사본이다. 간독은 편지라는 뜻으로 원이름은 《선배수간(先輩手柬)》이다. 본래는 명현들의 서간문을 차례를 정하여 8첩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현재 규장각에는 4첩만이 보존되고 있다. 이는 후에 다시 표구한 것으로 여기 4첩에는 고간찰(古簡札) 71편이 실려 있는데(목록상에는 99편), 이것이 김광국이 편찬한 8첩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인지 또는 없어지고 4첩만 남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권두에는 1750년에 김광국 자신이 쓴 소서(小敍)를 붙였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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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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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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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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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홈의 내용중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그런데 홈과 디지털한국학의 생존연대가 서로 다릅니다. 확인후 정리해야겠습니다. 발용님 정리 바랍니다.
김은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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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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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