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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배길>(9)-유배일기를 통해 본 유배길(일반 사족의 유배길)-유생 이필익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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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1-21 21:13 조회1,456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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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배길>(9)-유배일기를 통해 본 유배길(일반 사족의 유배길)-유생 이필익을 중심으로

 

 조선조 후기 숙종대 유생 이필익의 유배내용(1674(숙종1)--1679년(숙종 5)까지의 유배살이)이 그의 <북찬록>(北竄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2차 예송이 한창이던 숙종 즉위년 10월 28일, 송시열을 옹호하고 곽세건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형을 받았다.

 이필익은 상소 당일(10. 29)에 왕의 특명으로 변방 먼 지역으로 유배가 결정 되었다. 밤 9시에 의금부 나졸이 찾아와 배소가 전라도 강진으로 정해졌으니 즉시 출발하라는 명령을 전했으며 나졸은 이때 술, 의복, 쌀, 베 등의 물품을 요구하며 이는 전례이자 예법이라고 말했다 이에 유배인은 불쾌한 반응은 보였지만 요구 자체를 거부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필익은 일반 사족이기 때문에 의금부가 아닌 형조에서 유배길을 담당한다는 사실이 드러나 결국 아무 관계없는 의금부 나졸에게 헛되이 쌀만 준 셈이 되었다. 그는 다시 형조의 명령을 받고 11월 1일 4경 후 새벽에 한강승 문후백을 따라 유배길에 올랐다.

 유생인 이필익은 관직자들과 달리 형조에서 유배지를 배정하고 본인이 직접 형조에 나가서 대기하다가 역자(驛子)에게 인계되고 다음 역졸에게 릴레이 방식으로 인계되었다. 또한 일반 관직자들과는 달리 유배길에 여유가 없었다. 그는 함경도 영강까지 올라 갔다가 유배지가 안변으로 바뀌는 바람에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영강을 거쳐 다시 안변까지 총 2,824리를 23일 만에 도착했다. 하루 평균 122.8리를 달린 셈이다. 

 이필익이 유배길에 오른 때는 겨울철이었기에 여행길이 결코 용이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말 그대로 번개처럼 빨라서 눈보라를 헤치며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 말을 몰았다.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길을 간 날도 많았다. 함흥에서는 밤 늦게 도착하여 형리에게 늑장부리며 공사 처리를 지체한다고 호통쳐서 꾸짖기까지 했다.

 그는 험준하기로 소문난 마천령을 한밤중에 넘어갔다, 또 중도에 유배지가 바뀌어 지난 밤에 넘었던 마천령을 새벽에 다시 넘게 되었다. 이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는 듯이 행한 유배길은 당시 양반관료의 유배길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는 관직없는 일반 사족이었기 때문에 일정이 관직자에 비해 엄격해던 것이며 여기에는 혐의를 피하려는 그의 개인적 의지도 작용했을 것이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어려운 유배살이 중에도 &lt;북찬록&gt;(北竄錄)을.....

김은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은회
작성일

  반갑고 감사합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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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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