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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 선상에서--시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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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2-02-06 21:37 조회1,9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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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 선상에서--시 한 수>

  11년 전(1991년, 필자 38세 때)  직장의 동료 전원이 일본 여행을 했습니다.

  부산에서 페리호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시모노세키와 후쿠오카, 일본 하반부 일대를 여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는 여행이라 무엇보다도 흥미가 있었고 저는 남다른 감흥을 갖고 출발했습니다.

  오후 2시에 부산을 출발하여 이튿날 새벽 5시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게 되는 이 여정은 저를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일본을 공격해 들어가던 그 병선에 탄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습니다.

  일본 진입!  바로 일본원정 그것이었습니다.

  마치 제 옆에는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여행 도중에는 해괴한 일도 했습니다.

  준비해간 일본총독부 건물 하나를 일본에 세우고 왔던 일입니다. 썩지 않는 특수 제재로 만든 소형의 한국형 집, 그 안에 질 좋은 한지에 <檀紀 4324年. 日本總督府, 朝鮮人 雪軒 建立>이라 써서 일본의 대표 학자요 성인중의 한 사람을 모시는 한 신사 뒤쪽 땅에 묻었습니다.

  너희들이 내 나라에 <조선 총독부>를 세웠으니 나도 그 답으로 <일본총독부>를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좀은 속 좁은 복수였죠.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이제는 일본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빌기도 했었습니다.

  먼 발치에서 제 동료 중 한 분만이 이 모습을 비밀스럽게 보았습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좀 바보 같았던 일을 이제 10여 년이 지나 우리 종친 여러분께 공개해 봅니다.

  돌아 오는 배에서 저는 벅찬 감동을 이기지 못해 즉흥시를 한 수 지었습니다.

  이번 토요일에 KBS에서 방영하는 역사 스페셜의 주제 <려원 일본 정벌>에 우리 중시조이신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일본 공격할 때의 활약상이 소개된다고 합니다.

  이에 이번 주를 충렬공 할아버지의 週間이 되게 하자는 주회씨의 제창도 있었습니다만 이 기회에 그 때의 감흥을 다시 회상해 보려고 그 시를 올려 봅니다.

  부끄럽습니다.

 

현해탄 船上에서   (1991.1.10)

                                           

                                                                                                        김항용

                       가르는 검은 물살 엉킨 한 못잊어             
                       달리는 페리호는 흰거품으로 절규한다.           
                       대한해협 적막은 술잔 속에 흐르고        
                       찢겨진 가슴은 고동으로 운다.            

                       倭에 겁먹는 새가슴 졸장부야               
                       千年恨 잊은 君子 웃음까지        
                       맵고 짠 해풍에 훠-이 훠-이 흩어 내고            
                       검푸른 성난 파도에 새 기운 새긴다.            

                       文肅公 할아버지 一家殉節 원수             
                       忠武公 할아버지 晋州城 恨                  
                       判書公 할아버지 못다 이룬 복수                        
                       庇安公 할아버지 哀痛의 壬亂                
                       監司公 할아버지 西海 盜賊
                       丞旨公 할아버지 竹島 괴로움                          
                       日帝 三十五年의 피맺힌 절규
                           
                       떨리는 손 한 움큼 피묻은 역사를                                  
                       일본정벌 忠烈公 할아버지 兵船에 싣고
                       文英公 할아버지 그 눈빛 다시 떠
                       오늘 나는 용감한 高麗軍 兵士 된다.

                       시모노세키 눈 앞 두고 힘 더하는 노잡은 손
                       투구 쓰고 창 칼 잡아 黎明攻擊 앞으로
                       先朝後日 깃대 더욱 더 높여라
                       정복하고 말리라 딸각발이 왜놈아

                       天滿宮 神社 너머 日本 總督府        

                       恨풀이 복수전은 새소리 승전 축하
                       두 손 모아 묵도 올리는
                       젊은 韓人아 !
                       가슴 핀 큰 숨에 
                       하늘도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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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1.문숙공(文肅公) 할아버지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
   조선의 문신. 義士. 字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진사(進士) 석(錫)의 아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서 1553년(명종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53년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고, 3년 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573년(선조6) 정언(正言), 1581년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1589년 창성 부사(昌城府使)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왜장(倭將) 모리의 군사가 쳐들어오자 관·의병(官義兵)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 이어 아들 시백(詩伯)과 부인 이씨도 순절했다.
   영의정에 추증(追贈), 원주의 충렬사(忠烈祠), 괴산(槐山)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祭享), 시호는 문숙(文肅),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 부활위원회(江原道愛國愛族復活委員會)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2.비안공(庇安公) 할아버지

  김인갑(仁甲) : 1534년(중종29)--1594년(선조27).
  자는 선초(善初). 충북 괴산읍 전법리 출생. 어려서 부친(領相公 諱 錫)의 작고로 나이 18세에 비로소 학문 시작. 1569(선조1. 35세)에 進士 급제.
  1578(선조11)년에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從六品), 직장(直長)·제주의 감(監)을 거쳐 1586년(선조19) 주군자부(主軍資簿), 영산현감(永山縣監), 1590년(선조23. 57세)에 비안현감(庇安縣監)이 되었다.
  1592년(선조25.59세) 임진왜란이 발발, 재직중 좌사(坐事)했다 하여 파직됨. 괴산 鄕家로 돌아왔다가 발병하여 壽 61세로 몰(歿)함.
  후에 子 時讓(忠翼公. 호-荷潭)의 貴로 이조판서 지의금부사(吏曹判書 知義禁府事)에 추증(公 歿後 33년뒤인 1627년) 되었으며 9년 뒤(1636년. 인조 14)에 子 시양(時讓)이 청백리에 녹선되자 다시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從一品)으로 추증됨.
 

3.충무공(忠武公) 할아버지

김시민(金時敏) 1554(명종9)∼1592(선조25).
   조선의 무신. 字는 면오(勉吾), 지평(持平) 충갑(忠甲)의 아들. 1578년(선조11)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이 되었을 때 군사(軍事)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게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 1591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지(城地)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어 목사로 승진되었다.
   이어 사천(泗川)·고성(固城)·진해(鎭海)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올랐고 금산(金山)에서 다시 적을 격파, 이해 10월 적의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을 포위하자 불과 3천 8백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3만여의 사상자를 내고 적을 격퇴했다. 그러나 이 싸움 후 순찰시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병에 의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얼마후에 죽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영의정·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追贈). 괴산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4.판서공(判書公) 할아버지

  김시헌(金時獻) 
  자(字)는 자징(子徵), 호(號)는 애헌(艾軒), 임란때 순절한 문숙공(悌甲)의 長子이다.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사인(舍人)·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1597년 좌부승지(左副丞旨)·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그 후 대사간(大司諫)·우승지(右丞旨)·좌승지(左丞旨) 등을 거쳐 1603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宣祖)가 죽은 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 1611년(광해군3) 예조참판(禮祖參判)을 거쳐 도승지(都丞旨)에 올랐다. 문숙공 김제갑의 長子로 임란때 순절한 부친과 어머님, 아우의 복수를 갚기 위해 복수사란 이름으로 임란시 종군함.

5.감사공(監司公) 할아버지

  김  소(金  素) 1602(선조25)∼1666(현종7)
   자(字)는 지백(知白), 호(號)는 양졸와(養拙窩). 1635년(인조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침. 병자호란시 해주판관으로 있다가 종전후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심양까지 모시고 갔다옴. 1644년 성절사(聖節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뒤에 호조(戶曹)·형조(刑曹)의 참의(參議), 황해도(黃海道)·충청도(忠靑道)의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했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됨. 충청수사(忠淸水使) 재직시 왜적을 경계하여 서해에서 활약한 내용 등이 공의 묘갈문, 교서, 행장 등에 있음.

6.승지공(丞旨公) 할아버지

김구만(金龜萬):승지공(丞旨公). 1632년(인조 10)--1699년(숙종 25).
   자(字)는 元瑞(원서),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에서 출생. 1666(현종7년 35세)에 진사(進士)급제, 1677년(숙종3) 강서현령(江西縣令),1678년 (숙종4) 문과급제 후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거쳐 1689년(숙종 15)에 경기우방어사 장단부사(京畿右防御使 長湍府使)가 됨. 1693년(숙종19)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694년(숙종20) 좌승지(左丞旨)에 오르고, 1699년(숙종 25) 68세로 몰(歿)함. 묘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보광산 정(頂) 선영하(先塋下) 건좌(乾坐)임. 숙종실록 기록에 의하면 공이 좌승지 재직시 죽도(독도)에 왜놈들이 자꾸 나타나는 문제로 어려워 하신 적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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