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충렬공 金方慶 주간] ④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2-02-07 04:48 조회1,470회 댓글0건

본문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여묭연합군의 일본정벌] 관련 내용이 있어 그대로 퍼서 소개합니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정벌





I.

한국이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본을 원정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바로 1274년2(원종 15년)과 1281년(충렬왕 7년)의 두 차례에 원의 강권에 의하여 일본 정벌을 추진했던 경험이 그것이다.



고래로 한민족은 고구려를 제외하고는 침략군을 물리쳤고, 솔선수범하여 남의 나라를 침공한 적은 없었다고 역사에 기록되고 있고, 자칭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스스로 우리들을 그렇게 생각했고 널리 주변국가에 알렸다.



그런데 그 유일한 예외로 고려 시대에 바로 원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2차례의 걸쳐 일본 정벌을 단행한 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II.

몽고는 1271년 국호를 元이라 개칭했고, 이미 세계제국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강화도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고려왕실은 1270년 개성천도를 실현했고 미처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원의 일본정벌에 필요한 경제적, 군사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원래 원이 일본을 정벌하려했던 근본적 이유는 일본이 원을 정벌하려는 南宋과 무역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기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세조 쿠빌라이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라고 명했으나 동북아시

아에서 일본만 원에 조공을 받치지 않고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원의 세조 쿠빌라이는 일본원정에서 3가지를 노렸다.



첫째, 끝까지 저항한 고려에 대해 그 남아있는 저항력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원정에 따르는 경제적, 재정적 부담을 전부 감당하게 하여 장차 있을 수 있는 저항의 뿌리를 뽑으려했다.



둘째, 일본 정벌과 일본의 조공을 받아내어 남송과의 무역을 차단하여,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원제국의 완성을 보고 싶었다.



셋째, 일본 정벌의 기회로 고려와 일본과의 친선관계를 적대관계로 변질시켜 양국이 협력하여 원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오랑캐로 오랑캐를 견제케 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고려로서는 원의 침공을 여러 차례 익히 경험하면서 왕실이 강화도로 피신한 적이 있었던 지라 일본원정의 거부는 자칫하면 고려왕실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할 수 없이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고려는 일본원정으로 인해 그동안 조금씩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던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게 되고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고려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제1차 원정에서 원은 홀돈(忽敦)을 都元帥, 洪茶丘를 右副都元帥, 劉復亭을 左副都元帥로 하고, 고려는 金方慶을 都督使, 김선(?)을 左군사, 金文비(?)를 우군사로 삼아 이른바 3익군을 이끌고 원군을 돕게 하였다.



그리하여 1274년 10월 3일 合浦(지금의 마산)를 출발하였는 데, 그 軍勢는 2,5000병력으로 함선이 900여척에 달했다. 원군은 2만, 고려군이 5천에 불과했으나, 함선은 모두 고려가 부담하였다.



여·몽 연합군은 먼저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壹岐島를 쳐서 그 성을 함락시키고, 다시 北 九州의 太宰府목 공략을 목표로 북구주 肥前의 松浦를 짓밟고 博多灣에 진출하여, 박다, 箱崎, 금율 등에 상륙하였다.



이 때 왜군은 군세를 규합하여 연합군에 저항했으나, 攻城과 野戰에 능숙하고 火氣를 사용한 연합군에 대적하지 못했다.



그러나 때마침 颱風이 불어서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었고, 김선도 물에 빠져 죽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어서 군사를 거두어 합포로 돌아갔다. 이 때 돌아오지 못한 연합군의 숫자가 무려 13,500명에 달했다고 하니 병력의 절반을 잃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文永의 전쟁"이라 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은 일본정벌의 야심을 버리지 않았다. 원은 耽羅(지금의 제주도)에 牧馬場을 두고, 일본정벌을 위한 전담기구인 征東行中書省을 고려에 설치하였다. 한편 원은 일본의 반응을 타진하기 위해서 1275년, 1279년에 일본에 사신을 보냈으나 모두 일본측에 의해 참수되었다. 격노한 쿠빌라이는 이것을 구실로 원은 제2차 일본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이 때의 군세는 東路軍과 江南軍의 兩軍으로 편성되어, 동로군은 합포에서 출발하고, 강남군은 여·몽 연합군으로 편성되어 총병력 4만에 함선 900척이었으나, 그 중 원이 3만, 고려가 1만에 함선은 역시 고려가 전부 부담하였다. 그리고 강남군은 총병력 약 10만에 함선이 약 3,500척이었다.



이리하여 1차 때와 같이 고려군은 김방경과 元將 홀도 지휘하에 1281년 5월 3일 합포를 출항, 일기도를 비롯하여 구주 연해의 모든 섬을 공략하고 박다만을 공격하였고, 강남군은 원장 范文虎의 지휘하에 강남을 출발하여 구주 연해의 應島에서 동로군과 합세하고 태재부를 향해 공격하였다.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1차 원정 때와는 달리 일본군은 성곽을 축소하고, 해안방비를 하면서 침공에 대비하였기 때문에, 1차에 비해 훨씬 완강히 저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측은 작은 배를 타고 몽고군 전선에 접근하여 햇불을 집어던졌다.



강남군과 동로군은 연락이 제대로 되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하였고, 상륙지점을 변경하는 등 작전에 차질을 빗었다. 그러나 또 다시 7월 1일 태풍을 만나서 인명과 함선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철수하고 말았다.



고려사 충렬왕 世家에는 관군으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무려 10만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막대한 인명피해를 짐작하게 한다. 그 당시 각도 관찰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군의 피해는 "東征軍 9,960명, 梢工, 水夫 17,029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가 19,397명이라 하였다. 일본에서는 이 싸움을 "弘安의 전쟁"이라 칭한다.









그러나 원의 세조 쿠빌라이는 끝내 일본정벌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金州(지금의 金海)에 鎭邊萬戶府를 설치하고 고려에 함선과 군량을 준비하게 하면서, 일본의 동태를 살피며 제3차 일본정벌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원에서 내안(乃顔)의 반란이 일어나고, 고려에서도 내안의 무리인 합단(哈丹)이 고려에 침입하여 사태가 복잡해진데 다가 세조 쿠빌라이가 사망함으로써 원은 일본정벌을 포기하게 되었다.











III.

그러면 일본정벌의 실패에 따른 원과 고려의 손익계산서는 어떤가? 비록 원은 일본정벌에 실패했지만, 고려에게 함선과 군량에 대한 막대한 재정부담을 가중시켜 원에 저항하지 못하고 고려와 일본과의 관계를 불구대천의 원수관계로 만드는데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원의 쿠빌라이는 3가지 목적 중에서 두 가지는 충분히 달성했다. 즉 고려의 막대한 국력 손실을 야기하여 원에 저항하지 못하게 한 점과 고려와 일본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려는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대마도를 두번씩이나 정벌했음에도 그 섬에서도 완전히 철수해버렸다. 고려는 우선 일본원정으로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사회적 피해를 입었고, 이것이 고려왕조가 결정적으로 피폐해지는 원인을 제공해 주었다.





둘째로 일본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었다는 점이다. 고려는 일본정벌이전이나 이후에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여 원의 강압에 못 이겨서 할 수 없이 원정이 개시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설명하고 일본을 위로하는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후 고려에서는 일본원정에 대한 기억은 망각속에 묻혀버렸다.









여몽 원정이 가져다 준 충격과 변화는 일본측이 가장 심했을 것이다. 우선 일본은 두 차례에 걸쳐 태풍으로 인해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것은 분명히 가미카제(神風)가 일어난 것이라고 여겨, 일본 조야에서 신과 부처에 대한 신앙열기가 한층 심화되었다.



그리고 이 태풍은 "일본이 신의 나라이다"라는 사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 사무라이 계급의 위치가 상승하게 되었고, 한반도와 대륙에 대한 적개심이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후일 고려말 왜구의 잦은 침공으로 한반도 해안가가 왜구에 의해 유린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여몽 연합군의 일본정벌의 부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의 일본원정은 비록 원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한국사에서 최초의 해외로의 군사적 모험이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 내부의 자발적 역동성에서가 아니라 외압과 타율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향후 한국사의 해외팽창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몽고족이 세운 원은 원래 바다와 해전에 관한 기술이 전혀 축적되지 않아서, 일본원정에서 고려에게 많은 자문을 받았어야 옳았다. 그러나 원은 처음부터 고려가 일본과 내통하고 있지 않는가 끊임없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고려를 주시했기 때문에, 고려군들로부터 海戰에 대해 충분한 자문을 받지 못한 것 같다.







더욱이 고려로 볼 때도, 일본정벌은 내키지 않은 전쟁(unwilling war)이었고 대의명분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는 적극적으로 일본 정벌에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전쟁터에서 최선을 다해서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데, 억지로 끌려가서 치룬 전쟁이었으니 좋은 결과가 나올 리가 없다.



일본원정은 함선건조, 항해술, 그리고 해군력의 증강에 공헌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과 기회를 사장(死藏)시킨 것은 못내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사에서 최초의 해외로의 팽창의 기회는 이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원대신문 기고 (2001년 1월 5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