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락군 김방경 장군(3) - 권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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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1-31 19:34 조회1,415회 댓글5건본문
7. 일본 정벌에 참가하여
1274년 쿠빌라이는 홀돈(忽敦)을 일본정토 도원수(日本征討都元帥), 홍다구를 동정우부원수(東征右副元帥), 유복형(劉復亨)을 좌부원수(左副元帥)로 임명하였다. 김방경도 고려군 8천 명을 이끌고 도독사(都督使)로서 참여하였다. 그해 10원 3일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 3만3천명여 명은 전함 9백여 척을 앞세우고 합포(合浦 : 현 馬山)을 출발하여 5일 대마도를 정벌하고, 14일 이끼도(壹岐島)를 점령하였다. 쓰시마섬(對馬島)을 다스리던 소스케국(宗資國) 일족은 모두 전사하고, 이끼도 수호(守護) 다이라(平景隆)도 패전하여 자살했다. 19일에는 구주(九州)의 하카타만(博多灣)에 육박하여 다음날 상륙을 시작했다. 규우수(九州)의 무사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싸웠으나 막강한 연합군을 막지 못하여 수많은 전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질풍같이 빠르고 자기들은 구경도 못한,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굉음을 내며 폭파하는 철포(鐵砲)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전략 전술이나 무기가 고작 긴 창이나 독화살을 메긴 강궁(强弓) 밖에 모르는 일본 내의 전투와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일본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연합군은 밤이 되자 공격을 중지하고 그들의 군선으로 철수했다.
그런데 그날 밤 갑자기 태풍이 불어 닥쳐 하카다만 에는 산덩이 같은 파도가 휘몰아쳤다. 날이 새자 이제까지 하카다만 을 메웠던 배는 한 척도 보이질 않고 부서진 뱃조각과 엄청난 시체들이 파도에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때 익사한 연합군이 1만 3천 5백 명 정도라고 일본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리하여 1차 일본 정벌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원종도 승하하고 이장용마저 죽은 지금 김방경은 이제 마지막 남은 원로였다. 그는 밖으로는 무장으로 원나라 장수와 더불어 동정군(東征軍)을 지휘하고, 안으로는 수상으로서 왕을 보필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즉 출장입상(出將入相)하며 원만한 인격과 굳은 의지로 난국을 타개해 나갔다.
하지만 1277년(출렬왕 3)년 앞서의 일본 정벌 중에 좌군수 김신(金侁)이 익사할 때 이를 구하지 않았던 지병마사(知兵馬使) 위득유(韋得濡)를 파면하고, 진도의 삼별초를 공략할 때 전투를 소홀히 하고 재산을 약탈한 낭장(郎將) 노진의(盧進義)의 가산을 몰수한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김방경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간인(奸人) 위득유 노진의(盧進義) 등이 원나라 장수 혼도에게 김방경이 국왕과 왕비 및 다루가치를 없애고, 장차 강도(江都)로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참소했다.
이에 혼도가 왕에게 고하니 왕과 공주는 무고임을 알지만 할 수 없이 혼도와 더불어 국문을 하였다. 평소부터 김방경을 시기하여 사건만 있으면 문제를 일으키려던 홍다구는 모진 고문을 자행했다. 홍다구는 허위자백이라도 받아 죄를 만들기 위하여 김방경의 머리에 철사 줄을 얽어매고 메로 쳐서 살이 떨어져 나가고 기절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아무리 고문을 해도 죄가 드러나지 않자 사사로이 무기를 간직한 죄를 덮어 씌워 귀양을 보내기로 하였다. 나라의 힘이 없는 관계로 평생을 오직 사직 수호를 위해 힘써 온 김방경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67세의 나이에 대청도(大靑島)로, 아들 김흔(金?)은 백령도(白翎島)로 유배되었다.
이들 부자가 원나라 군사와 고려 군사에 둘러싸여 개경(開京) 남문을 나서니 사람들이 모두 길을 막고 울면서 배웅했다. 그러나 이 일을 들은 원세조가 홍다구를 소환하고 충렬왕에게 김방경 부자와 위득유 · 노진의 등을 데리고 원으로 오기를 명하여 김방경 부자는 석방되었다. 두 부자가 석방되어 돌아오매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잡고 말하기를,
“시중(侍中) 부자를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라고 하였다.
충렬왕과 더불어 원에 갔던 김방경은 왕의 적극적인 변호로 전후 사실로써 무고임이 밝혀져 왕과 같이 귀국하여 다시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280년(충렬왕 6) 홍다구가 재정군(再征軍) 통솔하는 자리에 올랐다. 홍다구의 아버지인 홍복원(洪福源)은 1231년 몽고의 1차 고려 침입 때 인주(麟州 : 현 평북 義州에 있음)의 신기도령(神騎都領)으로 있으면서 몽고가 침략해오자 1천5백 호의 주민들을 이끌고 항복하여 몽고의 앞잡이 노릇을 한 민족 반역자였다. 그의 아들 홍다구도 몽고의 세력을 등지고 그 아비에 못지않게 고려를 괴롭혔다. 홍다구는 삼별초의 토벌과 일본 정벌 등에 김방경과 같이 참전하였는데 늘 김방경과 뜻이 맞지 않았다. 더구나 위득유의 모함 때 김방경에게 모진 고문을 가한 일까지 있은 홍다구가 재정군을 통솔하게 된 이상 김방경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충렬왕에게 그 뜻을 아뢰었다. 그러나 왕은 아직 조정에 남아 자기를 도와주어야 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2차 일본 정벌을 위하여 정수일본행중서성(政收日本行中書省)이라는 별도 기구까지 만들고 온 힘을 기울였다. 병력도 1차 정벌 때의 5배로 남송병(南宋兵) 10만여 명, 군선 3천 5백 척을 강남군(江南軍)으로 편성하고, 고려 · 한 · 몽고병 4만과 군선 9백 척으로 동로군(東路軍)을 편성하였다. 김방경도 이싸움에 70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고려군 도원수(都元帥)로 참가했다. 1281년 5원 합포(合浦)를 출발한 동로군은 1차 침공때와 마찬가지로 쓰시마섬(對馬島)과 이끼섬(壹岐島)을 함락하고 시가섬(志賀島)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이 해안을 수축하고 완강히 대항했기 때문에 쉽게 상륙하지 못하였다. 밤이 되자 일본군이 작은 배를 타고 동로군 전선에 접근하여 횃불을 집어 던졌다. 동로군은 이 작전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또 크게 병이 나서 죽은 사람이 3천이나 되었다. 이에 일단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하여 히젠(肥前)의 다카시마섬으로 철수하였다. 강남군은 원래 이끼섬에서 동로군과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를 변경 히라도섬(平戶島)으로 향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로군과 강남군의 연락이 끊겨 6월 하순에야 다카시마섬에서 합류했다. 마침내 하카타에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북구주 일대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연합군의 대 선단이 전멸 상태에 빠졌다. 겨우 목숨을 구해 타카시마섬에 집결한 패잔병들은 다시 일본군의 공격으로 모두 희생되고 15만에 가까운 군대 중 겨우 목숨을 구하여 본국으로 돌아간 것은 겨우 3만 여 명에 불과했다. 이 때 김방경은 귀국하여 개경으로 가는 길에 안동에 들러 낙동강 변에 있는 영호루(映湖樓)에 올라 고향에 돌아온 심회를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복주 영호루에서(題福州映湖樓)
산과 물은 모두 구명이라 반갑고
누대 또한 어릴 적 생각게 하네.
기특하여라, 고국 옛 풍속 전해오노니
악기 잡고 노래 불러 내 마음을 위로하네.
山水無非舊眼淸 樓臺亦是少年情
可憐故國遺風在 收拾絃歌慰我行
8. 벼슬에서 물러남
1283년(충렬왕 9년) 김방경은 다시 왕에게 글을 올려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이에 충렬왕은 추충정난정원공신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세자사(推忠靖難定遠功臣三重大匡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치사(致仕)하니,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식읍(食邑) 1천호와 식실봉(食實封) 3백 호에 봉해졌다.
김방경은 치사 후 선산(先山)에 성묘하기 위하여 아들 순(恂)을 데리고 고향 안동에 낼와 친구들과 수일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농사일을 할 시간을 빼앗기자,
“가을 곡식이 익어가 농사일에 한가롭지 못한데 내가 어찌 오래 머물러 번거롭게 하리오.”
하며, 다시 귀경하였다. 백성의 노고를 생각하는 김방경의 마음을 이런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늙어도 머리가 검을 정도로 건강한 김방경이었으나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1300(충렬왕 16) 89세를 일기로 고향 안동에 장례를 치러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조정의 집권자들이 이를 기피하여 안동에 예장(禮葬)하는 것을 막았다. 후일 충렬왕이 이를 후회하고 다시 그를 안동에 장례지내게 했으며, 1307년(충선왕 즉위초)에 삼한삼중대광 상락군개국공(三韓三重大匡上洛郡開國公)에 추증하고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내렸다. 묘지는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竹松里)에 있다.
9. 영욕이 교차된 90 생애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김방경은 충직하고 신후(信厚)하였으며 그릇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위엄이 있고 말수가 적었으며 자질(子姪 : 아들과 조카)을 대하여 도 예(禮)로써 했다. 전고(典故)를 알아 일을 결단함에 어긋남이 없었다. 근검(勤儉)했으며 낮에는 눕지 않았고 늙어서도 머리가 검었으며, 추위를 모르고 병이 없었다. 친척이나 붕우가 상을 당하면 즉시 가서 조문했고, 벼슬을 물러난 후에도 나랏일을 집일처럼 걱정하여 큰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자문하였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김방경은 벼슬을 산 것이 오래 되고, 또 원나라로부터 금부(金符)를 받아 도원수에 오르자 그 권세가 나라에 넘쳐났다. 여러 곳에 전원을 소유하였고, 휘하의 군사들을 그의 세력을 믿고 날뛰는 자가 있었으나 너무 연로해서 인지 이를 제대로 제지하지 못했다. 또, 외손자 조문간(趙文簡)을 원의 실력자 차신(車信)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니 원의 은총을 바라는 것이라고 못마땅해 하는 자도 있었다. 시간의 권신(權臣)들이 그의 예장(禮葬)을 막은 데는 이런 일들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어떤 이는 당시 원이 관섭으로 충렬왕이 폐위되었다가 복위되기도 하였던 만큼 김방경과 조정 대신들과 사이에 원과의 관계로 인하여 어떤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사람의 생애를 돌아볼 때 평생 동안 한 점의 흠도 없기는 참으로 어렵다. 만년의 조금만 실수를 가지고 그의 한평생의 업적을 폄하(貶下)하는 일은 올바를 평가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몽고 지배 아래 있는 당시 고려에서 지식인의 처신 방법을 한 마디로 어떤 방법이 더 현명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느 방법이 더 국가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인가를 깊이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김방경의 생애를 조망(眺望)해 보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몽고 침입 시에 고난의 현장에 앞장서서 고려의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을 구해낸 출장입상의 공신이 김방경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몽고에 대해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완강한 정신력을 보였고, 박서(朴犀), 김윤후(金允侯) 등과 같이 불굴의 민족정신을 보여준 이도 있다. 또 삼별초의 난도 어쩌면 당연한 저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국난을 당해서 국제 정서의 변화에 순응하여 더 높고 큰 차원에서 시국을 보는 안목도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동족이 더 이상 참상을 당하지 않도록 한 원종과 이장용 · 김방경 등의 실리를 중시한 외교 정책을 무조건 흑백 논리로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다.
특히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서 자기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삼천리강토가 전후 6차례나 몽고 군사의 말발굽 아래 밟히고 힘없는 일반 백성들이 겪은 참상을 생각한다면 강화 천도의 당위성은 한번 재고해 본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90생애를 오로지 국난 속에서 사직을 지키기 위하여 바친 김방경은 조준의 말처럼 고려 최대의 안사 공신(安社 功臣)임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 참고 문헌 ☜
1. 鄭鱗趾 · 金宗瑞 編纂 「高麗史」
2. 高柄翊 · 金庠基 外 著「韓國 人物 探査記」
3. 김종성著 「人物 韓國史 이야기」
4. 宋志香著 「安東 鄕土誌」
5. 國史編纂委員會 發刊 「韓國史」
6. 김희영 著 「日本史」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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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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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큰 맥(핵심의 흐름)을 짚어 낸 분석!!!
---90생애를 오로지 국난 속에서 사직을 지키기 위하여 바친 김방경은 조준의 말처럼 고려 최대의 안사 공신(安社 功臣)임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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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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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님 감사합니다. 독수리타법이시라고 하셨는데, 타이핑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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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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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편히 읽었습니다. 고생하신 발용씨에게는 큰 감사를...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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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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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화 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
김태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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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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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용아재!!!(표준어는 발용아저씨)ㅡ영남지방,특히 안동,의성,영주,봉화 북부내륙지방에서의"叔"항에대한 보편적 공경어 임을 밝히면서,...... 발용아재!!!님의 정열적이고도, 의욕이넘치는 신속한 행동실천감.ㅡ일일이 답글 올리지 못하였으나,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접 하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