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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배길>(끝)-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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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2-08 21:41 조회1,52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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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유배형은 법 규정 및 유배일기의 실제 사례들에서 나타나듯이 유배인의 신분과 관직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관할 관청이 다르고, 압송관이 차등 있게 배정되었으며, 지방관의 접대와 처우 등에서도 큰 차이가 보인다.

 유배길 또한 『의금부노정기』의 규정은 중국보다 엄격하여 하루평균 80~90리에 이르렀지만, 집행과정에서는 연로한 고위 관직자일수록 행정이 지체되는 경향이 강하여 하루 30~40리를 가는 데 그쳤다. 또한 경유지 수령과 지방사족들에게 후한 접대와 노자를 제공받았으며, 중도에 며칠씩 쉬었다 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이 때문에 논란이 되거나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들의 유배길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삼엄한 경비하에 엄격한 통제가 가해졌던 것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유람길에 오른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영화나 사극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유배인의 행렬은 실제 역사적 모습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피투성이의 죄인이 수레에 타고 병사들이 앞뒤로 지키며 친지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장면은 있을 수 없었다. 장금이 제주도로 유배 갈 때는 정해진 길을 따라 전라도를 거쳐 그곳에서 배를 타야 했고, 민정호는 홀홀 단신으로 오랏줄에 묶인 채 걸어갔던 것이 아니라 관청에서 내준 말을 타고 노비 몇 명을 거느리고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배길이 조선시대 사대부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특히 정치적인 문제로 유배길에 오르는 경우 자신의 입장이 관철되지 못하고 오히려 국왕 및 중앙정계에서 추방된다는 소외감과 울적함이 앞섰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유배길 자체가 고통스러운 길이었다기보다 국왕과 관계가 단절되고 중앙정계에서 내쳐져 정치, 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따르고 고립되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조선시대 관직자들의 유배길은 물리적인 길보다 정치, 사회적 심리적 고통을 주는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끝)

 

 

---필자 후기---

그동안 조선시대 유배에 대하여 한 논문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서 하담 김시양 선조님의 유배과정을 <하담 김시양문집>을 중심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이를 통하여 조선시대 관리들의 실제 유배과정과 생생한 삶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유배지 탐색! 좋은 테마입니다.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의 유배생활을 보면
유배지에 본댁에서 보내오는 물품이 수시로 오가고, 아들들과 지인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습니다.
물론 간찰도 수시로 드나들고 있고요.
유배지만 철저히 살펴보아도 많은 흔적과 유물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그동안 궁금했던 유배에 대해서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