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담 김시양 선조님의 유배길을 따라서-임자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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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2-12 17:45 조회1,452회 댓글1건본문
하담 김시양 선조님의 유배길을 따라서-임자일기(2)
우리들은 말하기를, “저들이 이미 말했던 것은 알고도 침묵해야한다”고 하였다. 정목(庭睦)은 말하기를, “나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유생(儒生)들은 또한 정목(庭睦)이 내 놓은 당태종명사직서(唐太宗命史直書)의 제(題)를 고쳐 달라고 청하였지만, 드디어 과거 시험을 보아 나주(羅州) 생원 나해봉(羅海鳳)을 삼하(三下)로 하여 네 명을 합격시켰다. 무릇 김(金)이 장흥부사(長興府使), 윤(尹)이 담양부사(潭陽府使)로서 함께 참시관(參試官)이었다.
26일. 방(榜)을 내건 후에 도착한 담양부사 윤효선(尹孝先)이 말하기를,
“시험을 보았던 유광(柳洸), 정홍원(鄭弘遠)등이 거기에 끼지 못한 것을 분해하면서 북을 울리며 사악한 말을 못하는 게 없습니다. 「사로지제(四老之題)」를 고치기를 청한 것이 유생들의 뜻이 아니었습니까”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요즈음 과거급제에 사사로움이 많아 수령(守令), 찰방(察訪)이 의례 끼어 들어 문장의 솜씨 있음과 치졸함을 따지지 않는데, 우리들은 홀로 공도(公道)를 회복하여 문장을 취하려했지 권세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유(柳)와 정(鄭)은 모두 때가 오기를 바라는 자들이니 화(禍)가 멀지 않았군.” 하였다.
효선(孝先)은 말하기를, “어찌 그래야 되겠습니까. 누가 감히 무리한 말로 남을 잡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이런 마음이 있겠지요.” 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성상(聖上)께서 세자[儲宮]로 바로 자리하여 대통(大統)에 이름이 들어가서 있게 되었는데, 순리로 말하면 역적 진(?-臨海君)이 모반을 음모하고도 목숨을 보존하고 있음은 이는 성상(聖上)께서 백성에 대한 왕(王)으로서의 덕(德)에서 나온 것이니, 당 태종(唐 太宗)이 번왕(藩王)으로서 태자(太子)를 죽였던 것과는 서로 전혀 가깝지가 않다.1) 또한 내암(萊庵-鄭仁弘, 당시의 권신)이 사로(四老)에 대해 어떠한 논의를 얻으려고 했던가? 혜제(惠帝)를 성상(聖上)과 견주어 신자(臣子)로 한다는 것은 차마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이를 차마 한다면 아무도 참지 못할 것이다.”
효선(孝先)은 말하기를, “그런데 그 후 방백(方伯) 이충(李?)과 말을 해봤더니, 충(?)이 말하기를 유몽인 (柳夢寅)은 시제(試題) 때문에 크게 죄가 되었다 운운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나는 대답하였다. “만약 윤(尹)의 말과 같이 충(?)이 말했듯이 이리 된다면 이는 모두 말로(末路)의 말이다”라고…
주1) : 唐 太宗 李世民은 唐 高祖 李淵의 둘째아들로 隋의 멸망을 예견하고 부친에게 擧兵을 권하여 唐을 건설하여 인망이 높았다. 형인 황태자 建成과 동생 元吉의 질시를 받았으나 秦王으로서 쿠테타를 결심하고 황궁의 神武門에서 형과 동생을 살해하고 唐의 2대황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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