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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谷할아버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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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2-02-13 09:26 조회1,7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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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년 설날입니다.

모든 종친 여러분의 萬福을 기원합니다.

지난 1월 10일 새벽 5시, 이곳 서울을 출발하여 고향인 괴산에 갔습니다.

1월 12일, 오늘 아침 일찍 차례를 올리고 성묘한 다음 오전 11시 30분 경 서둘러 괴산을 출발했습니다.

약 3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하여 이제 우리 홈에 들어 왔습니다. 며칠간 보지 못했습니다.

지난 10일, 괴산에 도착한 뒤 오후에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너무도 아름답게 변해버린 환상의 설경 속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백곡 할아버지(휘 得臣) 묘소를 가고자 집을 나섰습니다. 충북 괴산군 증평읍에서 미원 방향으로 약 10KM를 가니 밤티 고개가 나오고 이어 증평읍 율리(栗里) 1구에 도착하였습니다.

먼저 율리1구 마을회관 뒤 쪽으로 예쁘게 새로 잘 지은 양옥집에 살고 계신 종손 규복씨(奎復, 75세)를 방문했습니다. 종손께서는 이곳에 내외분만이 살고 계셨는데 일찍이 아버님과는 가깝게 지내고 계셨기에 우리를 알아 보시고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이곳에서 불과 500여m 떨어진 곳에는 장자인 孝植씨가 약 50여 두의 대형 사슴목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 대한 환대로 차려 주신 酒果를 감사히 들고 많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조사한 백곡문집을 비롯한 몇가지 백곡 관련 유물들의 현 소장처 및 조사내용, 백곡 연구의 성과 등을 말씀드렸습니다. 아울러 종손께서는 백곡 문집(총 7책) 중의 일부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문집 한 권을 보여 주셨고 현재 증평읍에서 벌이고 있는 백곡 할아버지에 대한 선양사업 몇가지 말씀도 들려 주셨습니다. 첫째, 증평읍의 형석고등학교에 있는 신범식 한문 선생님(1996년 청주대 한문학과 졸. <백곡 김득신 연구> 석사학위 논문)의 활동으로 많은 학생들이 이곳을 다녀 가거나 여러 사람들에게 공이 알려 졌고, 둘째, 증평읍사무소에서는 증평에서 이곳 율리까지 10KM 국도 구간을 <백곡로>라 명명하였으며, 셋째, 문화원에서는 공의 문집 번역 사업을 준비 중에 있었고, 넷째, 700만원을 들여 백곡시비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매우 반가운 말씀을 듣고 준비해 간 <하담 김시양 문집>을 드리고 난 뒤 종손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 뒷산으로 불과 200M 정도를 올라가니 잘 단장된 묘소 3기가 나타났습니다. 맨 위가 남봉공(휘 緻. 호-심곡, 남봉.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자. 경상도관찰사 역임. 우리는 남봉공의 휘 때문에 음식명 김치를 공의 이름자와 같기 때문에 이를 피해 침채라고 부르고 있음)의 묘소였고 그 아래는 아드님이신 백곡공(휘 득신, 호-백곡. 시인. 동중추부사 역임. 안풍군)의 묘소였으며, 맨 아래에는 花恩君公(휘 天柱. 남봉공 손. 증 이조판서)의 묘소였습니다.

3기 모두가 자좌오향의 정남향을 하고 있었으며 모두 쌍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묘비석과 상석은 질 좋은 화강암으로 근래에 다시 세운 것이라 하고 문관석과 동자석은 350년간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인조 반정 성공의 가능성과 반정일을 점쳐 주실 만큼 역술에 밝으셨으며, 경상도 관찰사 재직시 충렬공 할아버지의 묘지석 발견으로 묘소를 처음 발견하게 되자 이를 잘 정비하신 남봉공, 조선 중기 우리 한문학사에 시인으로서 제일로 손꼽는 위치에 계신 백곡 할아버지, 두 분의 묘소에 성묘하면서 지난 날의 위업을 다시금 새겨 보았습니다.

묘소 아래에는 큰 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하나는 낙락장송의 백송 하나와 그 아래에 있는 커다란 향나무로 모두 돌아가실 당시에 심어졌던 350여 년 수령의 나무들이었습니다.

작별 인사를 드리고 돌아 오는 길에 점점 굵어지는 눈발과 나무가지 위에 쌓여 있는 눈꽃의 장관은 서울 삶으로 퇴색된 색에만 익숙돼 있던 나를 꿈속의 선경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게 했습니다.

 

<3위 선조님 상세 소개>

1)김 치(金 緻) 1577(선조10)∼1625(인조3).

조선의 문신.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 심곡(深谷). 충무공 시민(時敏)의 아들. 1597년(선조3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設書)를 거쳐 1608년 사가독서(賜假讀書)를 했다. 광해군 때 사복시정(司僕時正)·이조참의(吏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간을 거쳐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올랐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후 한때 대북(大北)으로 몰려 유배, 뒤에 풀려나와 동래부사 (東萊府使)를 거쳐 1625년(인조3)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안흥군(安興君)에 봉해졌다. 천문(天文)에 밝았으며 저서로 <深谷秘訣>과 시문집 <남봉집(南峰集)>이 전한다.

2)김득신(金得臣) 1604(선조37)∼1684(숙종10).

조선의 시인.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귀석산인(龜石山人), 충무공 시민(時敏)의 손자, 부제학(副提學) 치(緻)의 아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에 올랐다. 1662년 (현종3)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장악원 정·지제교(掌樂院 正·知製敎) 등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중추부사 (同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안풍군(安豊君)을 습봉(襲封)했다. 뒤에 화적(火賊)에게 살해되 었다. 당대 유명한 시인으로 이름이 나 있다. 저서에 <栢谷文集>,<終南粹言>,<終南叢志> 등이 있다.

3)김천주(金天柱) 1623(인조1)∼1661(현종2)

자(字)는 격여(汝重), 호(號)는 서안(書眼), 시인 백곡(柏谷. 安豊君. 諱 得臣)의 자.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일으켜 청주(淸州)를 함락시키자, 조정(朝廷)에서는 오명항(吳命恒)을 시켜 난군을 진압 하게 하였으나 난군은 다시 진천(鎭川)으로 침입했다. 이 때 그는 아우 천장(天章?-괴산군지 기록. 天挺의 오기 같음), 아들 성옥(聲玉?-괴산군지 기록.이름자 미상) 등과 함께 의거(義擧), 난군(亂軍) 수십명을 죽이고 적탄에 맞아 함께 순사(殉死)했다. 철종(哲宗) 때 문사충(門四忠)의 정려(旌閭)가 명(命)해 졌다. 화은군(花恩君)에 봉해짐

김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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