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김수 <난중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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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2-18 21:32 조회1,633회 댓글1건본문
임진년 1592년
3월
24일(갑신) 맑음. 세종 비 소헌왕후 심씨의 제삿날이라 업무를 보지 않았다. 우후가 수색, 검토한 뒤에 무사히 돌아왔다. 순찰사와 도사의 답장을 송희립(宋希立, 본관 : 여산)이 가져왔다. 순찰사의 편지 가운데
“영남 관찰사 김수(金 日卒, 1547-1615, 본관 : 안동) 의 편지에,
‘도주(島主 : 대마도주 종의지)의 문서에
진작 배 1척을 내어 보냈는데, 만일 당신 나라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바람에 깨어진 것이리라’
고 했다.
그 말은 지극히 간사한 꾀를 부린 것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다. 동래에서 서로 바라보이는 바다라, 그럴 리가 만무한데 말을 이렇게 꾸며대니 그 간사함을 헤아리기 어렵다“
라고 하였다.
4월
초7일(병신) 중종 비 문정왕후 윤씨의 제삿날이라 업무를 보지 않았다. 오전 10시경에 비변사에서 비밀공문이 왔다. 영남관찰사 김수(金 日卒)와 우병사가 임금께 올린 장계에 대한 공문이었다.
15일(갑진) 맑음. 성종 비 공혜왕후 한씨의 제삿날이라 업무를 보지 않았다. 순찰사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써서, 곧바로 역졸(역에 근무하고 있는 하급관리)을 시켜 보냈다.
해질 무렵에 영남우수사 원균(元均)의 통지문이 왔는데,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부산시 영도구 영도)에 대었다’ 고 하였다.
이와 함께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공문서가 왔는데 ‘왜선 3백 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대었다’ 는 내용이다.
이에 즉각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장계)를 띄우고 순찰사와 병사,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영남관찰사의 공문도 왔는데, 동일한 내용이었다.
계사년 1593년
5월
29일(임오) 비. 비. 방답 첨사와 영등 만호 우치적(禹致績)이 왔다. 접반사 김수(金 日卒),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1534-1602, 본관 : 경주), 순변사 이빈, 순찰사 권률(1537-1599, 본관 : 안동), 병사 선거이, 방어사 이복남(李福男, ?-1597, 본관 : 우계) 등에게 공문을 보냈다. 오후 8시경에 변유현과 이수 등이 방문했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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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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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김수 선조님이 임란때 영남관찰사이셨네요. 처음 알았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배워 나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