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담 김시양 선조님의 유배길을 따라서-임자일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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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2-22 17:22 조회1,879회 댓글3건본문
21일. 삼성(三省)에 모두 앉아 있는데, 위관(委官) 이항복(李恒福), 판의금(判義禁) 박승종(朴承宗), 지의금(知義禁) 조정(趙挺), 동지의금(同知義禁) 송순(宋諄), 박진원(朴震元), 승지(承旨) 민덕남(閔德男), 문사랑(問事郞) 기협(奇協), 한찬남(韓纘男)이 모두 와서 만났으나 대간(臺諫)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고 나갔다.
8월 18일. 성(省)에 앉았는데 위관 이하는 전과 같고, 집의(執義) 최동식(崔東式), 헌납(獻納) 이창후(李昌後), 문사랑(問事郞) 한찬남(韓纘男), 오정(吳靖)이었다.
내가 공술(供述)하여 말하기를,
「신(臣)이 무신(戊申-광해 원년. 1608)에 삼가 주서(注書)로 있을 때, 역적 진(?)이 몰래 다른 뜻을 품고 궐 안에 들어 왔다가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고, 상하가 허둥지둥하여 드디어 공론으로 그 음모에 모두 분함을 나타내었으니, 모든 혈기 있는 자는 누가 씻어내고 토벌을 청하고자 아니 하였습니까. 신(臣)은 어려서부터 맹자(孟子)를 읽으며 매번 ‘신하가 임금보기를 원수처럼 한다’는 말에 이르면(?주: <孟子 公孫丑章句 上5>) 일찍이 책을 덮고 의문이 일지 않은 적이 없어 말하기를,
“아비가 비록 자비롭지 못하다 해도 자식은 효도를 아니할 수 없으며, 임금이 비록 신하를 초개처럼 본다하더라도 신하는 임금 보기를 원수같이 보아서는 안 되는데, 성현(聖賢)이 말을 함에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라고 하며 항상 남에게 논변하곤 했습니다. 기유년(己酉年-광해군 1년. 1609)에 마침 충청도 시관(試官)이 되어, 평소에 의심나는 것을 논제(論題)로 삼고자 하였더니, 참시관(參試官)이 모두 좋다고 하여 이미 제(題)를 건 다음에, 유생들이 와서 개제(改題)하자면서 말하기를,
“말을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고 하기에 신(臣)이 말하기를,
“신하는 임금보기를 원수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이치는 매우 명백하다. 선유(先儒)도 역시 일찍이 그렇게 논했는데, 말을 표현하는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유생(儒生)이 말하기를,
“맹자에게 잘못이라고는 못하겠습니다”
고 했습니다.
신(臣)은 말하기를,
“세상에 큰 사람이라면 오히려 맹자에게 유감이 있을 것이며, 이 말에는 논해 볼만한 바가 있다. 사실 만약 의심이 없다면, 어째서 그것을 논하라 하겠는가. 여기에는 이태백(李泰伯) 주1)이 맹자에게 잘못이라고 한 바도 있다.”
고 하였습니다. 참시관(?試官) 이명준(李命俊- 1572-1630. 문신. 자는 昌期. 호는 潛窩. 본관 全義. 후에 병조참판. 대사헌)이 고집을 부리고 고치지 않으므로, 유생(儒生)이 말하기를,
“병오(丙午-선조 39년. 1606)년 가을에 영남시소(嶺南試所)에서 김상용(金尙容), 조즙(趙?)이 시관(試官)이 되어 이미 이 제(題)를 내었으므로, 시제(詩題)는 거듭 나올 수 없습니다. 운운”
하였습니다. 신(臣)등은 즉시 다른 제(題)로 바꾸었고, 그 당시 시관(試官)이나 사자(士子)나 모두 있으니,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이번에 무안시소(務安試所)에서 장흥부사 김정목(金庭睦), 담양부사 윤효선(尹孝先)이 함께 시관(試官)이 되어, 염계삼사왕개보(濂溪三辭王介甫)를 제(題)로 한 후에, 윤효선(尹孝先)이 학림옥로(鶴林玉露)를 열어 읽어보니 그 중 한 조목에 두목(杜牧)이 <사로안유시멸유(四老安劉是滅劉)>의 한 구를 논함이 있었는데 전체의 시(詩)가 기록되지 않아 효선(孝先)이 그것을 신(臣)등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 논(論)은 색다르게 이상하군요. 이상해”
하였습니다. 신(臣) 역시 매우 이상하기에
“극히 색다르구나”
하고 말했습니다.
효선(孝先)이 말하기를,
“옛날 소식(蘇軾)이 무왕(武王)을 논한 것에 잘못이 있었는데 후세사람들이 이것을 제(題)로 삼아 소식(蘇軾)이 큰 오류를 하였다고 헐뜯는 것 역시 이런 유입니다.”
고 하였습니다.
신(臣)은 말하기를,
“그렇기는 그렇지.”
하며 이미 출제를 한 후라 대충 상의를 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이것을 제(題)로 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 후 계속 제를 고치기를 6, 7차례에 이르렀습니다.
두 번째 제(題)는 정목(庭睦)이 <면출고하(?出袴下)>를 냈고, 그 다음에 효선(孝先)이 <문천상청이황관비고문(文天祥請以黃冠備顧問)>을 냈고, 또 그 다음 신(臣)이 <구래공복지황(寇萊公服地黃)>을 냈고, 또 그 다음 정목(庭睦)이 <유온수전호과루(劉溫?傳呼過樓)>를 내었으나, 내는 대로 고치니 신(臣)은 <화전유역(畵前有易)>으로 제를 삼고 싶었지만, 함께 의논하니 모두가 유생(儒生)들에게 너무 어려워 지을 수가 없으므로 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날은 어두워가고 바쁘기는 한데 갑자기 판단하기 어려워, 드디어 학림(鶴林)에서 새로 본 말을 서로 의논하여 이것을 제(題)로 하였습니다. 이는 신(臣)이 홀로 한 일이 아닙니다. 제(題)를 내어 좀 오래 있으니 유생(儒生)이 와서 제(題)를 바꾸어 주기를 청했습니다. 신(臣)등은 말하기를 무슨 일로 바꾸기를 청하느냐고 하니, 유생(儒生)이 말하기를,
“거의 지금의 시기에 아주 딱 맞습니다. 논술하기가 불안합니다.”
고 하였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니 그 답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臣)등은 비로소 깜짝 놀라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종사(宗社)를 안정한 사로(四老)가 잘못이라니 어찌 의심스러워 불안하게 정할 까닭이 있겠는가. 논술하라고 하고 싶지만, 너무나 사실에 가깝지 않는가, 유생의 말이 저와 같다면, 우리들은 다만 당장 속히 바꿀 뿐이다.”
고 하여, 즉시 화전유역(畵前有易)으로 고쳤더니, 유생들이 과연 제술(製述)하기가 어렵다고 고쳐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제(題)를 구하지 못해 하던 차에, 김정목(金庭睦)이 강감대성(綱鑑大成)을 펴보더니, <당태종명사직서(唐太宗命史直書)>의 제(題)를 내었습니다. 마침 날도 저물어 가므로 출제에 급하여 다시 자세히 생각하지도 못하고 덤덤히 고사(古事)를 논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유생(儒生)들이 시관(試官)에게 바꾸어 달라고 요청할 때 들어주지 않았던 일도 없었으며, 또한 중장(中場)에 모두가 호소하는 거동도 없었는데, 그런 말이 무슨 까닭으로 나왔습니까.」고 하였다.
주1) 이태백(李泰伯) : 李?伯. 1009-1059. 宋建昌 사람. 자는 泰伯. 세칭 ?江先生.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본디 맹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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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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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연속되는 행사 빠짐없이 참여하시는 노고와 함께 연재 또한 계속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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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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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 선조님의 유배일기!!!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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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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