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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후예와 우리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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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2-22 23:26 조회1,731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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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목(*김사렴의 처조부)은 이제현, 김영돈, 김영후(*김사렴의 조부) 등과 함께 백이정(*김순의 사위, 안향의 문인)의 문인이었다.

***안목(安牧) : ?∼1360(공민왕 9).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익지(益之), 호는 겸재(謙齋). 삼중대광도첨의(三重大匡都僉議) 유(裕=안향)의 손자이고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우기(于器)의 아들이다.


1314년, 

◀김영후는 이제현, 이달존, 박충좌, 민종유, 김영돈, 안목 등과 함께 백상당문인 24인의 한 사람으로 둘째매형 백이정의 문인이다. <1860 화해사전 제자서술>


***안향(安珦) : 1243(고종 30)∼1306(충렬왕 32). 고려시대의 명신(名臣)·학자.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로 흥주(興州:지금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백이정(白?正) : 1247(고종 34)∼1323(충숙왕 10). 고려 충선왕 때의 유학자. 본관은 남포(藍浦).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이23齋).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문절(文節)의 아들이며 향(安珦)의 문인이다. ---그뒤 후진양성에 힘써서,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이곡(李穀)·이인복(李仁復)·백문보(白文寶) 등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으며, 도학과 예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하여 크게 일가를 이룬 이는 백이정이라 할 수 있다.



2)

1343년(충혜왕4)에 안축(安軸, 1287∼1348)이 <상주객관중영기>를 지었는데, 김영후가 1327년에 상주목사가 되어 와서 객관을 세우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웠다. 라고 하였다.

***안축(安軸) : 1287(충렬왕 13)∼1348(충목왕 4).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아버지는 석(碩)이다. 고향 순흥의 죽계(竹溪:지금의 豊基)에서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유학자층의 한 사람으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하였다. --- 한편,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關東別曲〉과 〈죽계별곡 竹溪別曲〉을 지어 문명이 높았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하여진 뒤 죽었다.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근재집 謹齋集》이 있다.


상주객관중영기 <안축의 근재집>

1343년(충혜왕4)에 내(=안축)가 상주목사로 명을 받고 이해 4월 주에 도임하여 정사를 보니 근래 가옥한 행정에 시달려 민생과 문물이 流散하고 마을들이 모두 쓸쓸하여 옛적에 公廳이나 學宮 神社와 佛寺가 모두 퇴폐하고 오직 客舍만이 웅대하고 수려하여 이쪽 영남에서는 제일 훌륭하여 廳堂과 基位의 규모와 포치가 굉장하며 스스로 여유가 있고 그 마땅함을 얻었으므로 혼자 내심에 이는 반드시 속인의 범상하게 만든 것이 아니리 라고 생각되어 邑人에게 물었더니 지금 征東省郞으로 있는 金相國 永煦가 세운 것이라 하였다. 

이 州가 8방으로 통달하는 거리에 있어 전령과 奉使하는 자가 하루도비는 날이 없었는데 옛적 객관이 좁고 낮으며 또 연대가 오래되어 기둥이 이미 기우러져 있으니 항상 좋지 못함이 손님들의 나무람을 들어왔다.

지난 1327년 4월에 그가 이 州의 목사가 되어 와서 이 객관을 중수할 생각이 있었으나 민생의 노고와 곤궁을 염려하여 차마 공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다만 仁愛로 백성들을 안녕하게 하고 엄중하게 官紀를 바로잡아 왔다.

얼마후 읍인들이 德治에 힘입어 비로소 생활에 희망을 가지게 되니 이러한 힘을 모아 한번 公恩에 보답하려 하였다. 이에 그는 州民을 사역할 수 있음을 알고 재물을 모으고 부역을 명하며 기한을 정하여 起工하니 庶民들이 기꺼이 호응하여 수고로움을 잊고 就役하였으며 豪黨들도 협의하여 힘을 다하니 이렇게 하여 州民을 괴롭히거나 농사에 방해함이 없이 짧은 시일내에 객관이 완성되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우니 이제는 비록 사신이나 손님이 많이 오더라도 유숙하는데 여유가 있게 되어 읍인들도 안심하게 되었다. 

장하도다. 그가 적은 백성의 힘으로 세웠으나 실은 목사의 지혜로 이룩된 것이다. 州民이 지금까지도 이를 칭송하고 있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이 이러한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시경에 戶와 窓을 얽어 매어 비바람에 대비하는 비유가 있고 書傳에는 아버지가 창업을 하면 자손이 이어서 성공한다는 비유가 있으니 그가 廟堂에 재직하여서 經紀를 세우고 方略을 베풀어서 거듭 王家를 번영하게 한 것을 이것으로도 능히 알 수 있다 하겠다.


 

3)

1346년(충목왕 2년) 10월, 이제현, 안축, 안진 등이 왕명에 의하여 <충렬왕실록>을 편찬하였다.

충렬왕실록은 1346년(충목왕 2년) 10월,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다. 이때 부원군 이제현, 찬성사 안축, 한산군 이곡, 안산군 안진, 제학 이인복 등은 왕명에 따라 먼저 민지의 <편년강목>을 보충하여 재편찬하고 충렬, 충선, 충숙의 3대 실록을 함께 편찬하였다.



4)

1348년 8월, 안진이 김영돈 묘지명을 찬하였는데,

내(=안진)가 이미 공(=김영돈)을 만나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그 행적을 자세하게 적었다. 라고 하였다.

***안진(安震) : ?∼1360(공민왕 9). 고려 말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상헌(常軒).



5)

안진이 함벽루기(涵碧樓記)를 지었는데,

누대를 함벽(涵碧)이라고 일컬은 자는 누구이냐. 태수가 스스로 이름 지은 것이다. 태수는 누구인가. 여러 대 동안 공신인 상락공(上洛公=김순)의 아들 김군(=김영돈)이다. 라고 하였다.

 

동문선 제68권 기(記)

함벽루 기(涵碧樓記) /안진(安震)

내가 15세 되던 해부터 초가집에서 글을 읽으며 사방을 모른 지가 10년이다. 정사년 가을에, 조정의 과거에 응시하려고 평양으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영명사(永明寺)부벽루(浮碧樓)를 보았고, 5년 뒤에 진양(晉陽)의 원으로 나가서 또 용두사(龍頭寺)상원루(狀元樓)에 올라 평생에 본 남북의 절경이 이 두 누대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어제 왕사(王事)로 인하여 강양(江陽)으로 가는데 도중에 한 누대를 바라보니, 처마와 기둥이 날아 춤추는 듯하고 단청이 눈부셔 봉황이 반공에 나는 것 같았다. 내가 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 누대는 어느 때에 지은 것이며 터를 잡은 이는 누구인가.”하니, 객이 대답하기를, “지금의 태수가 새로 창건한 것이다.” 하였다. 내가 듣고 기뻐하여 배를 띄워 강을 건너 난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그 강산의 면모와 형세가 지난번에 본 두 누대보다 못하지 않고 단장의 기이함은 그보다 나았다. 아, 이 고을이 있는 때로부터 곧 이 산이 있었고, 옛날의 영웅 호걸들이 와서 이 고을을 다스린 자도 많았으나, 한 사람도 푸른 산을 파고 맑은 물 가까이에 누대를 세운 자가 없었는데, 오직 태수가 비로소 얻었으니, 이 어찌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었다가 그 사람에게만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술잔을 들어 노래하니,

흰 구름이 나는데 산은 푸르고 / 白雲飛兮山蒼蒼

밝은 달이 떴는데 물은 질펀하도다 / 明月出兮水??

누대 위를 사시사철 보아도 부족하니 / 樓上四時看不足

아득한 내 회포여, 멀고 먼 하늘 저쪽이로다 / 渺渺余懷天一方

산이 무너지고 물이 마르더라도 / 山其崩兮水亦渴

태수의 덕은 잊을 수 없도다 / 使君之德不可忘

하였다. 객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 노래를 써서 이 누대의 기(記)로 삼는 것이 좋겠다.”하기에, 내가 곧 붓을 가져다 썼다. 그 경영(經營)의 보태고 뺀 것과 관람의 크고 적은 것은 시(詩)에 능한 자가 밝힘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 누대를 함벽(涵碧)이라고 일컬은 자는 누구이냐. 태수가 스스로 이름 지은 것이다. 태수는 누구인가. 여러 대 동안 공신인 상락공(上洛公)의 아들 ★김군이다.



6)

1350년 2월, 충렬공 행장에 안진(安震)이 끝에 적기를(跋),

충렬공의 손자 김영후(金永煦)의 집에 공(公)의 행장(行狀)이 비장(秘藏)되어 있으나 해가 오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썼다. 라고 하였다.



7)

1352년 안진, 안목은 이제현, 김영후, 김자, 김승택 등과 함께 공민왕 서연(書筵)을 열었다. 김영후는 김사렴의 조부이고, 안목은 김사렴의 처조부였다.

◀1352년(공민왕1 임진) 8월 김영후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안산군 안진(安震),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밀직부사 안목(安牧),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면서,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8)

1358년(공민왕7)에 김사렴은 비서감을 지내고, 당시 처조부 안목은 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을, 처부 안원숭은 군부판서 진현관으로 있었다. <1358 이색찬 (장인 안원숭의 외조모인) 김태현처왕씨 묘지명> *김태현+왕씨 → 김태현 여 + 안목 → 안원숭 → 안원숭 여 + 김사렴


◀안동김씨 족보

○ 안렴사공 배위 죽계부인 순흥안씨 (父정당문학순성군문혜공 안원숭, 祖정당문학순흥군문숙공 號겸재 안목, 曾祖찬성순평군號죽실 안자기, 外祖평리중서성진무원주 원선지)


◀순흥안씨 홈페이지

안원숭 : 문혜공 휘 원숭의 初諱(처음의 이름)는 정(靖)이다. 1309년(고려 충선왕1년,기유년)에 출생하였다. 문숙공 목(牧)의 아들이고, 문순공 우기(于器)의 손자이며, 회헌 문성공 향(向)의 증손이다. 배위는 진한국대부인 원주원씨(辰韓國大夫人 原州元氏)이며, 첨의평리(僉議評理) 원선지(元善之)의 딸이다.

슬하에 9남매(3남 6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형조전서를 지낸 경질공 원(瑗)이며,

둘째는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휘 조동(祖同:양공공파조)이고,

셋째아들은 한림지제고(翰林知製誥)를 지낸 휘 수(垂:한림공파조)이다.

장녀는 우사간(右司간) ★김사렴(金士廉)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우상시(右常侍)를 지낸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 ★기전룡(奇田龍)에게 출가,

셋째딸은 창녕부원군 독곡 ★성석린(좌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에게,

다음은 전공판서(典工判書) 김추(金錘)에게 출가했고,

다섯째딸은 좌랑(佐郞) 김수(金垂)에게 출가했고,

막내딸은 판중추(判中樞) 유원지(柳元之:좌의정 柳曼殊의 아들)에게 출가하였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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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안렴사공의 처갓집을 살펴 보다가 (안향은 김사렴의 처고조부)
안향 후예와 우리 가문 인연을 모두 모아 보았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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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집대성된 자료가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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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회헌공의 순흥안씨와 우리 가문의 인연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안렴사공의 배위이신 순흥안씨가 안향의 증손, 고려말의 선조님들이 백이정의 후학이었다. 잘 알았습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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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지난 여름 안사연 캠프 직전 영주 순흥 풍기 일대를 둘러본 기억이 새롭습니다.
순흥 안씨의 본고장 재실 묘역 어머어마 하더군요.그리고 소수서원 나중에 사진을 올려 드릴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