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사형

(목록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 익원공 소개 및 연보

  2. 묘소 및 영정

  3.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4. 낙포재 및 신도비

  5. 익원공 제작 <향약제집성방>

  6. <洛圃政案> 소개

  7. 밀직사사공(휘 승) 단소

  8. 삼공신 회맹문

  9. 익원공 신도비문

10. 익원공 시 소개

11. 각종 문헌 기록 내용

12. 해인사사적 기록자료

13. 부조묘 소개

 

 

본문

p11.png 9. 익원공 신도비문

        (2005. 6. 10. 태서(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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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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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공(翼元公휘 사형(士衡신도비명(神道碑銘)1)

篆額

朝鮮上洛伯府院君諡翼元金公神道碑銘

碑文

純忠奮義佐命同德開國功臣推忠協贊靖亂定社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2) 兼三勳官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上洛伯府院君諡翼元金公神道碑銘幷序

氣數之推移運會之變遷世不能久安長治而必有亂亡之時然於其亂也天必生能弭是亂之人以爲億兆之君又必生宏材碩輔以之左右而攀附之俾克有成若故相翼元金公其人也公諱士衡字平甫號曰洛圃安東人新羅敬順王之後高祖方慶僉議中贊上洛公諡忠烈出入將相有大勳業曾祖恂判三司事上洛伯諡文英祖永煦僉議政丞上洛侯諡貞簡考蕆領三司事上洛君妣三韓國大夫人玄風郭氏苞山君元振女公以高麗忠惠王辛巳生少歷華要所至稱職壬申七月與諸將相推戴我太祖進爲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司事俄兼兵曹典書鷹揚衛上護軍錄開國一等勳十二月拜門下右侍中爵封上洛伯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丙子十二月以門下右政丞爲五道兵馬都統處置使聚五道兵船擊一岐對馬島將行太祖出南門外餞之授以鉄銊3) 賜鞍馬毛冠甲弓矢藥箱敎書略曰卿衣冠胄族廊廟宏材禀氣森嚴立志弘毅揆度庶政咸當於理薦進人材允適其宜明足以識虛實智足以制寇亂是用授以節鉞佐以同列以重其威庶幾諸將俯伏以聽命盜賊聞風而破膽卿其坐運籌策指示將帥4) 謀無再擧以圖萬全其有將帥之失律守令之稽緩法所當懲無問大小便卽處決翌年正月凱旋丁丑加兼判司憲府事戊寅之變偕趙浚赴闕率百官請立嫡爲嗣定宗旣受禪錄定社功一等己卯以右政丞入賀建文皇帝登極上幸弘濟院以餞之十二月公自陳盛滿累乞避位久乃蒙爲相八年以寬簡濟之坐鎭廟堂物議歸重太宗辛巳三月復拜左政丞壬午十月罷爲領司平府使踰月以上洛府院君就第丁亥七月三十日卒享年六十七訃聞撤朝三日遣左副代言尹須祭于殯賜諡翼元崇德報功之道宜其如是也史稱公沈深有智5) 重寡言內無城府外無圭角不營財産不喜聲色自筮仕至屬纊未嘗一見彈劾爲大司憲踰年朝廷肅然每拜一官時稱得人善始克終罕有其比卽此數語皆爲據實直書可以當汝南之月朝矣今於世代綿遠之後何用塗附而床疊哉配馬韓國大夫人竹山朴氏三司左使竹山君挺女生二男一女男陸同中樞密直司使女申孝昌判院事諡齊靖陞子宗浚領護軍宗漢生員宗潤典籤宗淑同中樞贈領相宗浚子璜吏曹叅議女柳垠司正宗漢子貴德宗潤子琛監察副正宗淑子礩文左相佐翼功臣諡文靖文刑判諡孝昭牧使贈領相工判靖國功臣豐陽君女洪義達大司成璜子繼智縣監貴智終智縣監女許誡文府尹尹希奎文正字崔松達進士貴德子乙萬通贊琛子善孫縣監女權志直長璘子有義有禮縣監有信女閔寧府使礩子義童牧使吉安君禮童經歷智童府使誠童文府使贈大司憲利童牧使女富林君李湜辛銛生員碏子孟諴僉正仲諴縣監季諴縣監弟諴奉事女申友灝奉事淑儀爲成廟後宮磧子壽童文領相靖國功臣諡文敬壽卿叅議靖國功臣贈戶參永安君碔子仁錫叅議義錫郡守禮錫元錫女鄭宗輔牧使巨官崇秩繼世烜赫豈非德厚而蔭遠者耶公之墓在楊平郡中隱洞乙坐原以朴氏祔焉舊有豐碑歲久殘缺今其嗣孫叅奉榮珌欲爲像設而其族主事在純謁余爲文老病垂死此豈理筆硯時而公是當時八俊之一太祖潛邸時故交也太祖嘗幸平州駐駕野次召公論自少相得之情開國勳勞之事盃酒相屬親如舊時風雲際會之盛寔所景仰而且嘉在純追遠之誠遂不以蕪拙爲辭樂爲之銘銘曰

於維忠烈卓爲傑英文英貞簡繼世公卿公復應時流光揚聲匪伊爲己弘濟民生誠在定社功存開國忌盈戒盛累辭其職聖心嘉乃潛邸相得存順沒寧子姓時億維楊之原有峨其域片石可語過者宜式

公沒後五百二十六年甲戌春三月資憲大夫行侍從院卿弘文學士李愚冕撰

十八世孫聖默謹篆

二十世孫珵會謹書

 

<전액(篆額)>

조선 상락백(上洛伯부원군(府院君(익원(翼元김 공(金公신도비명(神道碑銘)

<비문(碑文)>

순충분의좌명동덕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同德開國功臣추충협찬정난정사공신(推忠協贊靖亂定社功臣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 좌정승(議政府左政丞(삼훈관(三勳官영경연사(領經筵事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세자부(世子傅상락백부원군(上洛伯府院君(익원(翼元김 공(金公신도비명(神道碑銘병서(幷序)

운명(運命)의 변화와 운수(運數)의 변천으로 세상은 오래도록 평화로울 수 없으니 반드시 혼란스럽고 멸망하는 때가 있게 마련이다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울 때면 하늘은 반드시 그 혼란을 평정할 인물을 내서 억조창생(億兆蒼生)의 군주(君主)가 되게 하고아울러 반드시 그 군주를 보필하는 신하로 걸출한 인재를 내서 군주의 곁에서 군주를 섬겨 성공할 수 있도록 하니 돌아가신 재상 익원공(翼元公김 공(金公같은 분이 바로 그러한 분이시다.

공의 휘()는 사형(士衡), ()는 평보(平甫), ()는 낙포(洛圃)로 안동인(安東人)이니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시다고조부 휘 방경(方慶)은 첨의중찬(僉議中贊상락공(上洛公)으로 시호가 충렬(忠烈)이시니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문무(文武)를 모두 갖추어 크나큰 공훈(功勳)을 세우셨다증조부 휘 순()은 판삼사사(判三司事상락백(上洛伯)으로 시호가 문영(文英)이시다조부 휘 영후(永煦)는 첨의정승(僉議政丞상락후(上洛侯)로 시호가 정간(貞簡)이시다아버지 휘 천()은 영삼사사(領三司事상락군(上洛君)이시며어머니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현풍곽씨(玄風郭氏)로 포산군(苞山君곽원진(郭元振)의 따님이시다.

공께서는 고려 충혜왕 신사년(1341충혜왕 복위 2)에 태어나셨다젊어서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거치셨는데이르는 곳마다 직책을 훌륭하게 수행하셨다임신년(1392조선 태조 1) 7월에 여러 장수 및 재상들과 함께 우리 태조를 추대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로 승진하셨다곧이어 병조전서(兵曹典書응양위 상호군(鷹揚衛上護軍6) )을 겸하시고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시었다. 12월에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으로 제수되시고작위와 봉읍(封邑)은 상락백(上洛伯식읍 일천호(食邑一千戶식실봉 삼백호(食實封三百戶)에 봉해지셨다병자년(1396태조 5) 12월에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으로서 오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가 되어 5()의 병선(兵船)을 모아서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對馬島)를 치게 되었는데공이 떠나실 때 태조께서 남대문(南大門밖까지 나오시어 공을 전송하면서 부월(鈇鉞)7) 을 하사하시면서 안장 얹은 말털가죽으로 만든 방한모갑옷활과 화살약상자(藥箱子)를 내리셨다그 당시 교서(敎書)는 대략 ()은 대대로 벼슬살이를 한 문벌(門閥)이자 조정(朝廷)의 뛰어난 인재로서 타고난 기품이 엄숙하며 마음속에 간직한 뜻이 크고 굳세어 다방면의 정사(政事)를 처리하는 데 사리에 맞고 인재(人材)를 천거하여 기용하면 참으로 그 소임에 합당하니 명철함이 허()와 실()을 잘 파악하고 지혜(智慧)가 왜구가 일으킨 난리를 제압하는 데 충분하다이에 절월(節鉞)8) 을 주어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좌토록 함으로써 그 권위를 중하게 하니 바라건대 모든 장수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주의 깊게 명령을 듣도록 하라도적들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떨어질 것이니 경()은 계책을 운용해서 장수들을 지휘하여 두 번 군대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도모하라장수나 군사가 군율을 어기거나 수령(守令)이 태만하면 법에 따라 징계하고사안의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즉시 처결하라.” 하니 다음 해 정월에 개선하셨다.

정축년(1397태조 6)에 판사헌부사(判司憲府事)를 더하여 겸직하셨다무인년(戊寅年)의 변란9) 에 조준(趙浚)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적자(嫡子)를 세워 사자(嗣子)10) 로 삼도록 청하니 정종(定宗)께서 왕위를 물려받은 뒤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책록되시었다기묘년(1399정종 1)에 우정승(右政丞)으로서 건문 황제(建文皇帝)11) 의 등극을 축하하러 명나라로 들어가자 주상(主上)께서 홍제원에 거둥하시어 전송하셨다. 12월에 공이 스스로 넘치도록 가득 찼다고 말씀하시고 여러 차례 직위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는데오래 되어서야 윤허를 받았다정승으로 8년 동안 재임하면서 관대함과 간편함으로 도움을 줌으로써12)  저절로 조정(朝廷)이 평온해지니 평판(評判)이 중히 여겼다태종 신사년(1401태종 1) 3월에 다시 좌정승에 제수되어 임오년(1402태종 2) 10월에 좌정승을 사임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使)가 되었다가 그 달을 넘겨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으로서 자택으로 물러나셨다정해년(1407태종 7) 7 3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이시다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사흘 동안 조정(朝廷)의 조회를 멈추고좌부대언(左副代言윤수(尹須)를 보내 빈소에서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으며시호를 익원(翼元)으로 내리셨다덕 있는 이를 높이고 공 있는 이에게 보답하는 도리13) 는 이와 같은 것이 당연하다.

사관(史官)이 이르기를 공께서는 침착하고 슬기로우며점잖고 중후하여 과묵하였다속으로는 숨기는 것이 없고겉으로는 남에게 모난 것이 없었다재산 늘리는 일을 꾀하지 않고 음악과 여색(女色)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살이를 시작할 때부터 임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탄핵을 당한 일이 없었다대사헌(大司憲)에 임명돼 그 해를 넘기자 조정(朝廷)이 숙연해졌다.14)  관직에 제수될 때마다 훌륭한 인재를 얻었다고 일컬었으니 시작을 잘하고 마지막도 훌륭하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없다.”라고 하였다이 몇 마디 말은 모두 사실에 의거해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이니 여남(汝南)의 월조평(月朝評)15) 이라 할 수 있다지금 면면히 이어져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어찌하여 쓸데없이 진흙 위에 또 진흙을 덧붙이리오.16)

배필은 마한국대부인(馬韓國大夫人죽산박씨(竹山朴氏)로 삼사좌사(三司左使죽산군(竹山君박정(朴挺)의 따님이시다. 2 1녀를 낳으시니 장남 육()은 동중추(同中樞), 차남 승()은 밀직사사(密直司使)이다사위 신효창(申孝昌)은 판원사(判院事)로 시호는 제정(齊靖)이다()의 아들 종준(宗浚)은 영호군(領護軍), 종한(宗漢)은 생원(生員), 종윤(宗潤)은 전첨(典籤), 종숙(宗淑)은 동중추(同中樞)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종준(宗浚)의 아들 황()은 이조참의(吏曹叅議), 사위 유은(柳垠)은 사정(司正)이다종한(宗漢)의 아들은 귀덕(貴德)이다종윤(宗潤)의 아들은 침()이 감찰(監察), ()이 부정(副正)이며()17) 이 있다종숙(宗淑)의 아들 질()은 문과에 급제하고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좌익공신(佐翼功臣)이며시호는 문정(文靖)이다()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이며시호는 효소(孝昭)이다()은 목사(牧使)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는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정국공신(靖國功臣)이며풍양군(豐陽君)이다사위는 홍의달(洪義達)로 대사성(大司成)이다()의 큰아들 계지(繼智)는 현감(縣監)이며둘째는 귀지(貴智)이다셋째 종지(終智)는 현감(縣監)이다큰사위 허계(許誡)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府尹)이다둘째 사위 윤희규(尹希奎)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이다셋째 사위 최송달(崔松達)은 진사(進士)이다귀덕(貴德)의 아들 을만(乙萬)은 통찬(通贊)이다()의 아들 선손(善孫)은 현감(縣監), 사위 권지(權志)는 직장(直長)이다()의 아들은 유의(有義)와 현감(縣監유례(有禮), 유신(有信)이며사위 민영(閔寧)은 부사(府使)이다()의 아들 의동(義童)은 목사(牧使)로 길안군(吉安君)이다예동(禮童)은 경력(經歷), 지동(智童)은 부사(府使), 성동(誠童)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역임했는데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이동(利童)은 목사(牧使)이다큰사위는 부림군(富林君이식(李湜)이며둘째 사위 신섬(辛銛)은 생원(生員)이다()의 아들 맹함(孟諴)은 첨정(僉正), 중함(仲諴)은 현감(縣監), 계함(季諴)은 현감(縣監), 제함(弟諴)은 봉사(奉事)이다사위 신우호(申友灝)는 봉사(奉事)이며둘째 따님은 숙의(淑儀)로 성종(成宗)의 후궁(後宮)이다()의 아들 수동(壽童)은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領議政)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이며시호는 문경(文敬)이다수경(壽卿)은 참의(叅議)로 정국공신(靖國功臣)이며 호조참의(戶曹參議)18) 에 추증된 영안군(永安君)이다()의 아들 인석(仁錫)은 참의(叅議), 의석(義錫)은 군수(郡守)이며예석(禮錫)과 원석(元錫)이 있다사위 정종보(鄭宗輔)는 목사(牧使)이다.

높은 품계의 벼슬아치가 대대로 빛나니 이 어찌 덕()이 두터워 조상의 음덕(蔭德)이 먼 후손에까지 끼친 것이 아니겠는가공의 묘는 양평군(楊平郡중은동(中隱洞을좌의 언덕에 있으며배위 박씨를 합장(合葬)하였다공의 공덕(功德)을 기린 비석이 옛날에 있었는데세월이 오래 되어 이지러졌다이제 그 사손(嗣孫)인 참봉(叅奉영필(榮珌)이 석물(石物)을 설치하고자 하여 그 일가(一家)인 주사(主事재순(在純)이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내가 늙고 병들어 거의 죽을 때가 되었으니 붓을 잡는 것이 어찌 합당하겠는가그러나 공께서는 그 당시 팔준(八俊)19)  중의 한 분이시고또한 태조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오랫동안 사귀어 온 벗이시다태조께서 예전에 평주(平州)에 거둥하여 야차(野次)에 어가(御駕)를 멈추시고는 공을 불러 젊은 시절에 서로 의기투합한 정()에서부터 나라를 개국(開國)한 공훈(功勳)에 관한 일에 이르기까지 말씀을 나누시면서 서로 술을 권하시는데 옛날과 마찬가지로 친밀하시니 어진 임금과 훌륭한 신하가 서로 만난 성대한 일은 참으로 사모하여 우러러보는 바였다또한 재순(在純)이 선조(先祖)를 추모하는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마침내 문장이 거칠고 졸렬하나 사양하지 못하고 기꺼이 명()을 짓는다()은 이러하다.

於維忠烈 우리 충렬공

卓爲傑英 탁월한 영웅이시고

文英貞簡 문영공과 정간공께서

繼世公卿 대를 이어 공경(公卿되셨다네

公復應時 공이 다시 때에 맞추시어

流光揚聲 길이 빛날 명성 떨치시니

匪伊爲己 자신 위한 일이 아니오라

弘濟民生 널리 백성 구제 위해서네

誠在定社 참으로 사직(社稷안정시키시고

功存開國 나라 세운 공이 있건만은

忌盈戒盛 차고 넘치는 일 경계하여

累辭其職 여러 차례 관직 사양했네

聖心嘉乃 임금께서 아름다이 여기시어

潛邸相得 잠저(潛邸때도 마음 서로 맞고

存順沒寧 순리대로 살다 편히 돌아가시니20)

子姓時億 자손들이 억만(億萬)으로 번성하네

維楊之原 양평(楊平)의 언덕에

有峨其域 위엄 서린 묘소 있어

片石可語 조각 빗돌 세워 알리노니

過者宜式 오고 가는 자들 삼갈지라

공께서 돌아가신 지 526년 뒤인 갑술년(1934 3월 일.

자헌대부(資憲大夫(시종원경(侍從院卿홍문학사(弘文學士이우면(李愚冕지음.

18세손 성묵(聖默삼가 전액(篆額)을 씀.

20세손 정회(珵會삼가 글씨를 씀.

 

1)  이 비문은 익원공( 士衡)께서 1407(태종 7)에 돌아가신 지 526년 뒤인 갑술년(1934 3월에 사손(嗣孫)인 참봉 영필(榮珌)이 주도하여 세운 신도비문이다비문은 후손 재순(在純)의 부탁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시종원경(侍從院卿홍문학사(弘文學士이우면(李愚冕)이 지었다비문(碑文)은 임금이나 조정(朝廷)을 뜻하는 글자 또는 일부 글자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의도적으로 띄어 썼다이 공간은  표시를 넣었다.

이우면은 1850(철종 1)에 태어났으며, 1937년에 졸하였다()는 유석(維石), ()는 성원(聖元),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1881(고종 18)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홍문관 교리와 사헌부 장령으로 뛰어난 문명(文名)을 날렸다그 뒤 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승정원 우승지한성부 좌윤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비서원승(秘書院丞), 회계원경(會計院卿)을 거쳐 1902년에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1905년 예식원 장례경(禮式院掌禮卿임시서리궁내부대신사무·비서감경(秘書監卿)으로서 을사조약 반대 상소를 올리고오적신(五賊臣)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06년에 궁내부 특진관·비서감경·홍문관 학사·장례원경이 되었다가 다음 해에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가 되었다.

2)  左議政 : ‘左政丞의 잘못번역문에는 좌정승(左政丞)’으로 고쳐 적었다.

3)  鉄銊 : ‘鈇鉞의 오자(誤字).

4)  將帥 : 조선왕조실록 1396(태조 5) 12 3일조 <일기도·대마도를 정벌하러 떠나는 우정승 김사형 등에게 내린 교서>에는 將師로 적혀 있다.

5)   : 원문에 으로 적혀 있는데조선왕조실록 1407(태종 7) 7 30일조 <상락부원군 김사형의 졸기>靜重寡言으로 적혀 있다. ‘鄭重행동거지가 점잖고 엄숙하다.’의 뜻이다.

6)  응양위 상호군(鷹揚衛上護軍) : 조선왕조실록 1407(태종 7) 7 30일조 <상락부원군 김사형의 졸기>에는 進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衛上將軍錄功一等賜奮義佐命開國功臣之號라 하여 상장군(上將軍)’으로 기록돼 있는데, ‘상장군(上將軍)’은 고려조 26(二軍六衛)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고려 말엽에 상호군(上護軍)으로 개칭되었으므로 이 비문에서는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7)  부월(鈇鉞) : 임금이 장수나 제후에게 생살권(生殺權)을 부여한다는 뜻에서 주는 도끼 모양의 의장(儀仗). ‘부월(斧鉞)’과 같은 뜻이다.

8)  절월(節鉞) : ‘절부월(節斧鉞)’이라고도 하는데조선시대에 관찰사(觀察使유수(留守병사(兵使수사(水使대장(大將통제사(統制使)가 부임할 때 임금이 내려주는 절()과 부월(斧鉞)을 가리킨다()은 수기(手旗)와 같고부월(斧鉞)은 도끼처럼 만든 것으로 군령(軍令)을 어긴 자에 대한 생살권(生殺權)을 상징한다.

9)  무인년(戊寅年)의 변란 : 1398(태조 7) 8월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으로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을 가리킨다. ‘방원(芳遠)의 난또는 무인정사(戊寅定社)’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한다조선 개국에 공이 큰 정도전 일파와 그에 못지않은 공을 세운 이방원 일파 사이의 권력 다툼이다.

10)  사자(嗣子) : ()를 이을 아들여기서는 왕위를 이을 세자(世子)’의 뜻으로 쓰였다.

11)  건문 황제(建文皇帝) : 명나라 제2대 황제 건문제(建文帝주윤문(朱允炆).

12)  도움을 줌으로써 : 이 구절은 조선왕조실록 1407(태종 7) 7 30일조 <상락 부원군 김사형의 졸기>에 기록된 士衡與趙浚竝相八年浚剛果不疑專斷國政士衡以寬簡濟之坐鎭廟堂物議歸重의 내용을 줄인 것이다따라서 以寬簡濟之濟之는 조준(趙浚)의 과감한 정치에 부족한 관대함과 간편함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뜻이다.

13)  ……도리 : 원문 崇德報功之道서경(書經) <무성(武成)>믿음을 돈독히 하고 의리를 밝게 하며덕 있는 이를 높이고 공 있는 이에게 보답하니 옷자락을 늘어뜨리고 팔짱을 낀 채로 천하가 다스려졌다(惇信明義崇德報功垂拱而天下治).”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임금이나 황제가 아무 하는 일 없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지는 태평성대를 뜻한다.

14)  대사헌(大司憲)……숙연해졌다 : 조선왕조실록 1407(태종 7) 7 30일조 <상락부원군 김사형의 졸기>庚午以知密直司事兼大司憲俄陞知門下府事在臺踰歲朝廷肅然累轉三司左使(경오년에 지밀직사사로서 대사헌을 겸하였으며곧바로 지문하부사로 승진하였다대사헌에 재임하여 해를 넘기자 조정이 숙연해졌다.)”라고 적혀 있는데, ‘경오년(庚午年)’은 고려 공양왕 2년인 1390년이다고려사세가 권제45 공양왕 2년 윤4월 기묘(己卯)조에 以鄭道傳爲政堂文學金士衡爲密直使兼大司憲李詹爲左副代言我太宗爲右副代言韓尙質爲右常侍[정도전을 정당문학으로김사형을 밀직사 겸 대사헌으로이첨을 좌부대언으로우리 태종(이방원)을 우부대언으로한상질을 우상시로 각각 임명했다.]”라고 적혀 있다신도비문에 적힌 내용은 바로 이때의 일을 가리킨다.

15)  여남(汝南)의 월조평(月朝評) : 원문 汝南之月朝汝南之月朝評을 줄인 말이다후한(後漢시대에 여남(汝南)에 살고 있던 허소(許劭)가 그의 종형 허정(許靖)과 함께 매월 초하루마다 향리 인물들에 대한 품평을 하곤 했는데이 고사에서 여남(汝南)에 월단평(月旦評풍속이 생겼다고 한다조조(曹操)가 허소를 찾아가 자신을 평해 달라고 하자 허소가 조조를 비루하게 여겨 응대하지 않다가 마지못해 그대는 태평시대에는 간적이 될 것이고난세에는 영웅이 될 것이다(君淸平之奸賊亂世之英雄).”라고 한 이야기가 전한다. ‘월단평(月旦評)’매달 첫날의 평이라는 뜻으로인물에 대한 비평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여기서는 익원공에 대한 서술이 사실에 근거하여 허소의 월단평처럼 정확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월조평(月朝評)’은 본래 월단평(月旦評)’인데조선 태조의 이름이 ()’이라 피휘(避諱)한 것이다.

16)  쓸데없이……덧붙이리오 : 원문 塗附시경(詩經) <각궁(角弓)>원숭이에게 나무타기를 가르치지 말라진흙에 진흙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라(毋敎猱升木如塗塗附).”라고 한 내용을 빌려 온 표현이다.

17)  () : 안동김씨성보(安東金氏姓譜)(경진보, 1580)화김래파사적약변 <보첩>에는 벼슬이 대경(大卿)’으로 적혀 있다.

18)  호조참의(戶曹參議) : 기미대동보(1979)에는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추증되었다고 적혀 있다.

19)  팔준(八俊) : 같은 시대에 함께 관직에 진출한 여덟 사람의 뛰어난 인재를 뜻하는 말로서 후한(後漢)의 이응(李膺순욱(荀彧두밀(杜密유우(劉祐왕창(王暢위랑(魏朗조전(趙典주우(朱寓)를 가리킨다전하여 훌륭한 신하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20)  순리대로……돌아가시니 : 원문 存順沒寧은 장재(張載) <서명(西銘)>살아서는 순리에 따라 섬기고 죽어서는 내가 편안하리라(存吾順事沒吾寧也).”라고 한 글귀를 빌려 온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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