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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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보당 소개

2. 주요 사진 자료 소개

3. 묘지명

4. 신도비

5. 한시 소개

6. 각종 문헌 자료 소개

7. 안사연 참배기

 

 

본문

p11.png 4. 신도비

1)신도비명  

(2005. 2. 17.주회(안) 제공)

출전 : 二樂亭集 卷之十三

永嘉府院君金公神道碑銘

 

天以機警才智出衆之資。賦之人者。豈徒厚其人而已歟。將以用於世也。然有其資而不偶於時者亦多。如有兼得之而不負天所賦與之意者。則眞可謂大賢君子人也。而世亦蒙其休矣。領議政金公諱壽童。字眉?。其得于天。遇于時。行其所蘊畜。望隆于世。而流美於後者大而遠。所謂賢君子者。其不在?乎。公之先。出於安東。安東多鉅姓。金爲最著。公考諱?。官至僉知中樞府事。視公勳秩。贈議政府領議政。祖同知中樞府事諱宗淑。贈議政府領議政。曾祖同知中樞府事諱陞。贈議政府左贊成。贊成是開國功臣左政丞上洛府院君諱士衡之子。遠祖諱方慶。仕高麗有大勳勞。世爲名閥。毓慶畜祉。繼出賢豪多大官。僉知事聘承政院同副承旨安質女。以天順丁丑正月己卯生公。自?孩端溫明穎。已有出衆氣幹。年甫五。失所依。七歲。學綴句。人奇其秀發。伯叔上洛府院君金?深重之曰。此兒不墜世業。將能更大吾門也。早年學大成。中成化甲午生員試。登丁酉文科。補權知承文院副正字。選授藝文館檢閱。轉弘文館正字兼承文院正字。公善於隷法。能書事大表奏。一時諸僚咸推爲第一。自是至陞通政。常帶承文職。己亥。拜承政院注書。秩滿。授軍器寺主簿。歷司憲府監察,禮戶兩曹佐郞,世子侍講院司書。重入弘文館。爲副修撰。轉陞修撰。遷司諫院正言。未幾。還拜修撰。弘治戊申。陞校理。己酉。授吏曹正郞。尋拜議政府檢詳。陞舍人。辛亥秋。遭內憂。送終居廬。極其誠哀如存之孝。人稱爲難及。服?。授司?寺僉正。轉司憲府掌令,世子侍講院弼善。甲寅冬。成廟禮陟。翼年乙卯。皇帝遣使。弔祭前王。冊封新君。朝廷以舊例中朝使到國。必審問詔?頒迎之儀。多往復難定。擇練達典故。詳於禮儀者。以公充問禮官。明使見公儀度。聽言講禮。彼此意達。一無疑沮。蓋心服之也。是年夏。拜弘文館典翰。秋。陞直提學。丙辰秋。特超三階。陞拜副提學。丁巳春。拜承政院同副承旨。累陞至左承旨。階加嘉善。戊午秋。出爲全羅道觀察使。冬。以繼母病辭任。拜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階陞嘉靖。己未。以聖節使進賀皇朝。還拜慶尙道觀察使。庚申。拜同知中樞府事。辛酉。轉刑,吏兩曹參判。壬戌。爲京畿觀察使。癸亥春。特加資憲。除刑曹判書兼弘文館提學,知春秋館事。秋。移判吏曹。餘如舊。仍兼知義禁府事,都摠府都摠管。甲子夏。階加正憲。冬。加崇政。乙丑秋。陞崇祿。拜議政府右贊成。仍兼判吏曹。餘如舊。時主心昏荒。朝政紊舛。自甲子夏。罪網高張。人鮮得脫。追罪大臣臺諫之言事?切者。誅竄殆盡。雖細民。一觸時禁。竝處顯戮。大小遑遑。重足以待。公爲推官。務從寬緩。凡可以盡吾心者。無不極力。賴公全活者亦多。丙寅二月。丁繼母憂。時短喪制。違者罪重。五月制盡。還授右贊成。懼違時制。不得守情。七月。陞右議政。九月。翊聖主登大位。卽乞身守服。聖上以弊政之餘。凡改紀之事。施措之方。當與大臣共圖。勉留輔政。賜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號。陞左議政。封永嘉府院君。公更乞解官終喪。哀懇不已。始蒙允許。戊辰夏。服?。復封府院君。兼領經筵事。己巳夏。考試文科殿試。取金正國等十八人。庚午春。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勳封如舊。考試文科殿試。取李?等三十三人。辛未春。考試文科殿試。取姜台壽等十六人。壬申春。?疾。累月不?。再上疏辭職。不允。仍給由。遣內醫。常處左右救藥。又數遣承旨問疾。公以久病在家。不受祿。上聞之。特命賜之。至七月病革。初七日戊寅夜絶?。享年五十有六。訃聞。上慟傷。輟朝三日。賻贈有加。自公卿大夫。下至士庶。莫不哀悼。寮友之弔祭者日踵門。是年九月二十三日甲申。開吉兆于陽川縣治南將軍所里乙坐辛向之原。遂?焉。易名曰文敬。稱也。嗚呼哀哉。公資性敏達。操履恭謹。友兄弟睦親戚。無不得其歡悰。簡 自飭。不致飾服美。守心溫恕。與物無?。早捷科第。敭歷三朝。?事精幹。出入經?,臺閣。按節三道。踐履六卿。卒登台鉉。以佐聖主中興之治。世方倚以爲重。而年未耳順。天奪之速。痛哉。公配。乃軍器寺判官李季禧女。無子。副室有二男一女。男長曰渾。以勳蔭授修義副尉副司勇。餘幼。喪旣終。夫人追慕公。久而彌篤。凡爲公治後事。無不盡心。欲更?石于神道。記公行治事業。垂示後來。乃介公之季弟僉知事壽卿。請碑銘于用漑曰。旣蒙幽堂之誌。幸卒其惠。?亡人行迹無昧於後。意甚哀切。用漑自玉署?僚之後。陪侍僚席非一再。得公之實甚詳。況蒙許可。常示心服。不作崖岸。銘公之碑。義不敢辭。遂爲銘曰。

 

永嘉之金。根深而厚。功積于先。慶遠于後。生才與智。位亦大受。?惟文敬。天富其有。明敏之資。端謹之性。發以文學。乃施於政。宜小宜大。不有厥躬。顯敭樞要。望重名隆。中遭屯否。民苦疾威。國步將顚。宗?失依。天啓聖主。代虐以寬。公能捧日。轉危而安。山河策勳。台鉉著績。士有領袖。國倚柱石。年齡未?。何不?遺。天理茫渺。予奪難知。芳名茂業。不與身亡。銘?貞珉。庶垂永長。

 

형태서지   권수제 二樂亭集    판심제 二樂亭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1682年刊    권책 本集 15권ㆍ附錄ㆍ拾遺 합 3책    행자의 수 10행 21자 반곽의 크기 19.5×15.1(㎝)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번호 奎4035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7    

저자   성명 신용개(申用漑)    생년 1463년(세조 9)    몰년 1519년(중종 14)    자 漑之    호 二樂亭, 松溪, 休休子, 睡翁    본관 高靈    시호 文景  

 

 2) 신도비 탁본 사진 소개 (2008. 11. 5. 발용(군) 제공)

   가. 건립시기 : 1517(중종 12)

   나. 최초 건립 장소 : 양천현(현 서울시 양천구 신월동)

   다. 실전과정 : 1970년대 초, 묘소를 양주 진전면으로 이안할 당시 신도비가 너무 커서 그 자리에 신도비를 묻었다고 함.   현재 신월동이 도시화 되어 쉽지않은 일이겠으나 당시 자리를 알수만 있다면 신도비를 찾아 문경공의 묘소에 다시 모시는 것도 생각해 볼 일임.

   라. 서자 :  해서체의 달인 유연재(悠然齋)공 김희수(希壽)

   마. 찬자 : 이락정(二樂亭) 신용개(申用漑)의 문집에 전해져 알고 있습니다만,  

   바. 사진 자료 출처 : 일본 교또대학 소장 탁본

 

김수동신도비(金壽童神道碑)

1517년(중종 12) 동생 수경(壽卿)에 의해 세워진 김수동(金壽童)의 신도비이다. 찬자는 우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한 조선 전기의 문신 신용개(1463~1519)이며, 서자는 해서체를 잘 썼던 조선 중기의 문신 김희수(1475~1527)이다.

김수동(1457~1512)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1474년(성종 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7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를 거쳐 사헌부장령에 올랐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전한(典翰)·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에는 승정원동부승지를 제수받고,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그해 여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다시 이듬해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성학동심법(聖學心法)』4권을 구하여 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경기관찰사·형조판서겸지춘추관사·홍문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1504년(연산군 10) 47세 때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해 갑자사화 때 그는 폐비윤씨의 회릉(懷陵) 추숭을 주장, 시행함으로써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연산군에게 충실하였다고 사림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1510년(중종 5) 영의정에 올라, 그때 일어난 왜변의 진압을 총지휘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품성이 단정하였으며,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비문의 초반부에는 가계도와 어려서부터 재주가 출중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며, 중반부에는 승문원정자(兼承文院正字)로 있을 때 예서(隷書)를 잘 쓰고 중국에 바치는 표문(表文)과 주문(奏文)을 잘 썼으므로 동료들이 모두 김수동을 제일인자로 추대했다는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후반부에는 문과전시(文科殿試)를 고시하여 여러 관리들을 선발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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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敬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大匡輔國

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

文館春秋館觀象監事永嘉府院君 贈謚文敬

公金公神道碑銘幷序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知 經筵事弘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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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申用漑 撰

奉正大夫成均館司藝兼承文院校勘宗學導

善金希壽 書

天以機警才智出衆之資賦之人者豈徒厚其人

而已歟將以用於世也然有其資而不偶於時者

亦多如有兼得之而不負天所賦與之意者則眞

可謂大賢君子人也而世亦蒙其休矣領議政金

公諱壽童字眉叟其得于天遇于時行其所蘊蓄

望隆于世而流美於後者大而遠所謂賢君子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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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不在玆乎公之先出於安東安東多鉅姓金爲

最著公考諱磧官至僉知中樞府事視公勳秩

贈議政府領議政祖同知中樞府事諱宗淑 贈

議政府領議政曾祖同知中樞府事諱陞 贈議

政府左贊成贊成是開國功臣左政丞上洛府院

君諱士衡之子遠祖諱方慶者仕高麗有大勳勞

世爲名閥毓慶蓄祉繼出賢豪多大官僉知事聘

承政院同副承旨安質女以天順丁丑正月己卯

出公自嬰孩端溫明穎已有出衆氣年甫五矢

所依七歲學綴句人奇其秀發伯叔上洛府院君

金礩深重之曰此兒不墜世業將能更大吾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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早年學大成中成化甲午生員試登丁酉文科補

權知承文院副正字選拔藝文館檢閱轉弘文館

正字兼承文院正字公善於隷法能書事大表奏

一時諸僚咸推爲第一自是至升通政常帶承文

職己亥拜承政院注書秩滿授軍器寺主簿歷司

憲府監察禮戶兩曺佐郞 世子侍講院司書重入

弘文館爲副脩撰轉升脩撰遷司諫院正言未幾

還拜脩撰弘治戊申升校理己酉授吏曺正郞尋

拜議政府檢詳升舍人辛亥秋遭內憂送終居廬極

其誠哀如存之孝人稱爲難及服闋授司䆃寺僉

正轉司憲府掌令 世子侍講院弼善甲寅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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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廟禮陟翼年乙卯 皇帝遣使吊祭前 王冊

封新君 朝延以舊例中朝使到國必審問詔勅頒

迎之儀多往復難定擇練達典故詳於禮儀者以

公充問禮官明使見公儀度聽言講禮彼此意達

一無疑阻盖心服之也是年夏拜弘文館典翰秋

升直提學丙辰秋特超三階爲通政升拜副提學

丁巳春拜承政院同副承旨累升至左承旨階加

嘉善戊午秋出爲全羅道觀察使冬以繼母病辭

任拜禮曺參判兼同知春秋館事階升嘉靖己未

以 聖節使進賀 皇朝還拜慶尙道觀察使庚

申拜同知中樞府事辛酉轉刑吏兩曺參判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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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京畿觀察使癸亥春特加資憲除刑曺判書兼

弘文館提學知春秋館事秋移判吏曺餘如舊仍

兼知義禁府事都摠莩摠管甲子夏階加正憲

冬加崇政乙丑秋升崇祿拜議政府右贊成仍兼

判吏曺餘如舊時主心昏荒朝政紊舛自甲子夏

罪網高張人鮮得脫追罪大臣臺諫之言事讜切

者誅竄殆盡雖細民一觸時禁竝處顯戮大小遑

遑重足以待公爲推官務從寬緩凡可以盡吾心

者無不極力頼公全活者亦多丙寅二月丁繼母

憂時短喪制違者罪重五月制盡還授右贊成懼

違時制不得守情七月升拜右議政九月翊 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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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登大位卽乞身守服 聖上以弊政之餘凡改

紀之事施措之方當與大臣共圖勉留輔政 賜

表忠奮義翊運靖國功臣號升左議政封永嘉府

院君公更乞解官終喪哀懇不已始蒙 允許戊

辰夏服闋復封府院君兼領 經筵事己巳夏考

試文科 殿試取金正國等十八人庚午春拜領

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

事勳封如舊考試文科 殿試取李膂等三十三

人辛未春考試文科 殿試取姜台壽等十六人

壬申春遘疾累月不瘳再上疏辭職 不允仍給

由遣內醫常處左右救藥又數遣承旨問疾公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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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病在家不受祿 上聞之 特命賜之至七月

病革初七日戊寅夜絶纊享年五十有六訃聞

上慟傷輟朝三日賻贈有加自公卿大夫下至士

庶莫不哀悼寮友之弔祭者日踵門是年九月十

三日甲申開吉兆于陽川縣治南將軍所里乙坐

辛向之原遂窆焉嗚呼哀哉易名曰文敬稱也公

資性敏達操履恭謹友兄弟睦親戚無不得其歡

悰以簡素自飭不致飾服美守心溫恕與物無忤

早捷科第敭歷三朝莅事精幹出入經帷臺閣按

節三道踐履六卿卒登台鉉以佐 聖主中興之

治世方倚以爲重而年未耳順天奪之速痛哉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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配乃軍器寺判官李季禧女無子副室有二男一

女男長曰渾以勳蔭授修義副尉副司勇餘幼喪

旣終夫人追慕公久而彌篤凡爲公治後事無不

盡心欲更竪石于神道記公行治事業垂示後來

乃介公之季弟僉知事壽卿請碑銘于用漑曰旣

蒙幽堂之誌幸卒其惠俾亡人行迹無昧於後意

甚哀切用漑自玉署忝僚之後陪侍僚席非一再

得公之實甚詳況蒙許可傷示心腹不作崖岸銘

公之碑義不敢辭遂爲銘曰

永嘉之金 根深而厚 功積于先 慶遠于後

生才與智 位亦大受 猗惟文敬 天富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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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 明敏之資 端謹之性 發以文學 乃施

於政 宜小宜大 不有厥躬 顯敡樞要 望

重名隆 中遭屯否 民苦疾威 國步將顚

宗祊失依 天啓 聖主 代虐以寬 公能捧

日 轉危而安 山河策勳 台鉉著績 士有

領袖 國倚柱石無齡未耉 何不慗遺 天理

茫渺 予奪難知 芳名茂業 不與身▨ 銘

玆貞珉 庶垂永長

正德十二年丁丑三月 日 竪

 

문경공(文敬公) 신도비명

유명조선국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증시(贈諡) 문경공(文敬公) 김공(金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 서문(序文)을 아울러 기록하였다.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신용개(申用漑)가 비문을 짓다.

봉정대부(奉正大夫) 성균관사예 겸 승문원교감 종학도선 김희수(金希壽)가 비문의 글씨를 쓰다.

 

하늘이 일반사람보다 기민(機敏)함과 재지(才智)가 뛰어난 자질을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은 어찌 공연히 그 사람에게 두터이 해준 것뿐이겠는가? 장차 그를 세상에 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질을 펼칠 수 있는 때를 만나지 못한 자도 많다. 만약에 자질도 있고 때를 만났으면서 하늘이 부여한 뜻을 저버리지 않는 자가 있다면 참으로 대현군자(大賢君子)라고 말할 수 있으며, 세상도 그의 덕(德)을 입는다.

영의정(領議政) 김공(金公)은 이름이 수동(壽童)이요, 자(字)가 미수(眉叟)이다. 그는 하늘에서 자질을 얻어 그 자질을 펼칠 수 있는 때를 만나 그가 가슴 속에 품은 뜻을 행하여 세상에서 명망(名望)이 높고 후세에 아름다움을 전한 것이 크고도 오래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현군자(賢君子)라는 것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공의 선조는 안동에서 나왔는데, 안동에는 거성(巨姓)이 많지만 그 중에서 김씨가 가장 저명하다. 공의 아버지는 이름이 적(磧)으로, 벼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공의 공훈(功勳)에 의해서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숙(宗淑)으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증조부는 동지중추부사 승(陞)으로,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찬성(贊成)은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좌정승(左政丞)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사형(士衡)의 아들이다. 원조(遠祖)인 방경(方慶)은 고려 때에 벼슬하여 큰 공로를 세워 대대로 유명한 벌열(閥閱)이 되었다. 경사와 복을 쌓아서 계속 현인과 호걸을 배출하였으며, 대관이 많았다. 첨지중추부사가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안질(安質)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천순(天順) 정축년(1457, 세조 3) 정월 기묘일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단아하고 영리하여 이미 출중한 재간이 있었다. 나이 겨우 5살에 부모를 잃었다. 7살에 글 짓는 것을 배우니 사람들이 그의 우수함을 기이하게 여겼다. 백숙(伯叔)인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질(金礩)이 매우 애지중지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대대로 이어온 가업을 실추시키지 않고 장차 다시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어린 나이에 학문이 크게 이루어져 성화(成化) 갑오년(1474, 성종 5)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정유년(1477, 성종 8)의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고, 예문관겸열(藝文館檢閱)로 선발되었으며, 홍문원정자(弘文館正字) 겸 승문원정자(兼承文院正字)로 옮겨졌다. 공이 예서(隷書)를 잘 쓰고 중국에 바치는 표문(表文)과 주문(奏文)을 잘 썼으므로 한 시대의 동료들이 모두 공을 제일인자로 추대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를 때까지 항상 승문원(承文院)의 직임을 맡고 있었다. 기해년(1479, 성종 10)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임명되었다가 임기가 만료되자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제수하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예조와 호조, 두 조(曹)의 좌랑(佐郞),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사서(司書)를 역임하였다. 재차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가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으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겨졌다. 얼마 있다가 도로 수찬에 임명되었고, 홍치(弘治) 무신년(1488, 성종 19)에 교리(校理)로 승진되었다. 기유년(1489, 성종 20)에 이조좌랑(吏曹正郞)에 제수되었고, 얼마 안 되어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다.

신해년(1491, 성종 22) 가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상례를 치르고 시묘살이하기를 정성과 슬픔을 지극히하여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효도하듯이 하니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렵다고 칭찬하였다. 삼년상을 마치자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에 제수되었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으로 옮겨졌다. 갑인년(1494, 성종 25) 겨울에 성묘(成廟 : 성종) 임금이 승하하고 다음해 을묘년(1495, 연산군 1)에 황제가 사신(使臣)을 보내 전왕(前王 : 성종)을 위해 조문(弔問)하고 치제(致祭)하고서 새 임금을 책봉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전례(前例)에 중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반드시 조칙(詔勅)을 맞이하고 반포(頒布)하는 의식에 대해 자세히 묻는데, 서로 상의하여도 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으므로 전고(典故)에 밝고 예의(禮儀)에 대해 상세히 아는 사람을 골랐다. 그리하여 공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충원하였는데, 명나라 사신이 공의 거동하는 태도를 보고 말을 듣고 예(禮)를 강론(講論)하니 피차가 뜻이 통하여 전혀 의심꺼리가 없었으니 이는 마음으로 복종하였기 때문이다. 이해 여름에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에 임명되었고, 가을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되었다. 병진년(1496, 연산군 2) 가을에 세 품계를 뛰어넘어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되었다. 정사년(1497, 연산군 3) 봄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으며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무오년(1498, 연산군 4) 가을에 외직(外職)으로 나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겨울에 계모(繼母)의 병으로 사임(辭任)하였다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兼同知春秋館事)에 임명되었고, 품계는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되었다. 기미년(1499, 연산군 5)에 성절사(聖節使)로 황조(皇朝 : 명나라)에 진하(進賀)하러 갔으며, 돌아와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경신년(1500, 연산군 6)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고, 신유년(1501, 연산군 7)에 형조와 이조, 두 조(曹)의 참판에 옮겨졌으며, 임술년(1502, 연산군 8)에 경기관찰사가 되었다. 계해년(1503, 연산군 9) 봄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되어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지춘추관사(兼弘文館提學知春秋館事)를 제수를 받았다. 가을에 이조판서에 옮겨졌고 나머지 관직은 예전과 같았으며, 이어서 겸 지의금부사도총부도총관(兼知義禁府事都摠莩摠管)에 임명되었다. 갑자년(1504, 연산군 10) 여름에 품계가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고, 겨울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으며, 을축년(1505, 연산군 11) 가을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라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었고, 그대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나머지 관직은 예전과 같았다.

당시에 임금의 마음이 어리석고 음탕하며 조정의 정사(政事)가 문란하였다. 갑자년(1504, 연산군 10) 여름부터 죄의 그물을 높이 펼쳐서 소급해서 치죄(治罪)하는 것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대신(大臣)과 대간(臺諫) 중에서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거의 다 죽이고 찬배(竄配)하였으며, 하찮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일단 당시의 금령(禁令)을 범하기만 하면 모두 공개적으로 처벌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이 어찌 할 바를 몰라 두려워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공이 추관(推官)이 되어 될 수 있으면 너그러운 쪽으로 처리하여 내 마음을 다할 수 있는 경우에는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공의 덕을 보아 온전히 살아난 자도 많았다. 병인년(1506, 연산군 12) 2월에 계모의 상(喪)을 당했는데, 당시에 단상제(短喪制)를 어긴 자는 죄가 무거웠다. 5월에 복제(服制)가 다하자 도로 우찬성(右贊成)에 제수하였는데, 당시의 제도를 어기는 것이 두려워 삼년상을 치르지 못하였다. 7월에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9월에 성주(聖主 : 중종)를 도와서 대위(大位)에 등극하도록 하고 즉시 벼슬에서 물러나 거상(居喪)하였다.

성상(聖上)이 폐해가 많은 정치가 시행되던 끝에 개혁하는 일과 조치할 방도를 대신과 함께 도모해야 하므로 힘써 만류하여 정사를 돕게 하고,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좌의정에 승진시켜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하였다. 공이 다시 관직을 벗고 삼년상을 마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슬프고 간절한 청을 그치지 아니하여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무진년(1508, 중종 3) 여름에 삼년상을 마치자 다시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하였다. 기사년(1509, 중종 4) 여름에 문과전시(文科殿試)를 고시(考試)하여 김정국(金正國) 등 18인을 뽑았다. 경오년(1510, 중종 5) 봄에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에 임명되었으며, 훈봉(勳封)은 예전과 같았다. 문과 전시를 고시하여 이려(李膂) 등 33인을 뽑았다. 신미년(1511, 중종 6) 봄에 문과전시를 고시하여 강태수(姜台壽) 등 16인을 뽑았다.

임신년(1512, 중종 7) 봄에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낫지 않았으므로 재차 상소(上疏)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이어서 말미를 주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항상 곁에 거처하면서 치료하도록 하였다. 또 몇 차례 승지(承旨)를 보내어 병문안을 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병을 앓아 집에 있었다는 이유로 녹봉을 받지 않으니 성상이 이 일을 듣고 특별히 명을 내려 하사하였다. 7월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져서 7일 무인일 밤에 절명(絶命)하니, 향년은 56세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성상이 애통해하며 3일간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규정보다 더 많이 치부(致賻)하였다. 공경(公卿)과 대부(大夫)로부터 아래로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애도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조문하고 제사하기 위해 오는 동료와 벗이 날마다 끊이지 않았다. 이해 9월 13일 갑신일에 양천현(陽川縣) 남쪽 장군소리(將軍所里) 을좌(乙坐 : 남동쪽을 등지고 앉은 자리) 신향(辛向 : 북북서의 방향)의 언덕에 길지(吉地)를 열고 마침내 하관(下棺)하였다. 시호(諡號)를 문경(文敬)이라고 하니 걸맞다.

아! 슬프도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민첩하고 행실이 공손하고 신중하며, 형제와 우애하고 친척과 화목하여 기뻐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간략하고 소박함으로 스스로 단단히 경계하여 의복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았으며, 온화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켜 사람들과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3대의 임금을 두루 섬기는 동안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요령이 있었다. 경연(經筵)과 대각(臺閣)을 출입하고, 삼도(三道)의 관찰사가 되었으며, 육경(六卿)의 자리를 거쳐 마침내 삼정승에 올랐으니, 성주(聖主)가 중흥시키는 정치를 보좌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이 한창 공을 의지하여 신망(信望)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이순(耳順 60세)이 되지 않아 사망하니, 애통하도다.

공의 부인은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이계희(李季禧)의 딸로 자식이 없었다. 측실(側室)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혼(渾)은 공훈을 세운 음덕(蔭德)으로 수의부위사용(修義副尉副司勇)에 제수되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상(喪)을 마치고 나서 부인이 공을 추모하는 마음이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그리하여 공을 위해 훗날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다시 신도(神道)에 비석을 세우고 공의 행적과 사업을 기록하여 후세에 드리워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공의 막내 동생 막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수경(壽卿)을 보내 나 용개(用漑)에게 비명(碑銘)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이미 고인(故人)의 지석(誌石)을 지어주셨으니 부디 그 은혜를 마무리하여 고인의 행적이 후세에 사라지지 않도록 해주소서.” 하였는데, 뜻이 매우 애절하였다. 나 용개가 옥서(玉署 : 홍문관)에서 동료로 지내게 된 뒤로부터 같은 관사(官司)에서 모시게 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공의 실상에 대해서 매우 상세히 알고 있다. 더구나 항상 속마음을 보여주고 거리감을 두지 않는 은혜를 입었으니 공의 비명(碑銘)을 의리에 있어 사양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명(銘)을 지었다.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영가(永嘉 : 안동)의 김씨는

뿌리가 깊고 두터우니

선대(先代)에서 공을 쌓아

후대에까지 복이 멀리 미쳤다.

재주와 지혜를 타고나서

벼슬자리도 크게 받았으니

아! 문경공(文敬公)은

하늘이 그의 소유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명민(明敏)한 자질과

단정한 성품을

문학으로써 발현하고

정사에 시행하였다.

작은 일이나 큰일을 모두 합당하게 처리하되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다.

주요한 관직을 두루 거쳐

명망이 두터웠다.

중도에 어려운 시기를 만나

백성이 학정(虐政)에 시달리니

나라의 운명이 전복(顚覆)되려 하고

종묘와 사직이 의지할 곳을 잃었다.

하늘이 성주(聖主)를 인도하여

학정 대신에 너그러움으로 다스리게 하니

공이 임금을 받들어

위기를 전환하여 안정시켰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공적(功績)을 기록하고

삼정승의 자리에서 뚜렷한 업적을 세우니

선비들은 지도자를 두었고

나라는 주춧돌처럼 의지하였다.

나이가 채 육십도 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남겨두지 않았단 말인가.

하늘의 이치는 아득하니

목숨을 주고 빼앗는 것을 알기 어렵도다.

아름다운 이름과 성대한 업적은

몸과 함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 옥돌에 새겨서

아마도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정덕(正德) 12년인 정축년(1517, 중종 12) 3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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