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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려실 기술 내 기록 내용 종합> (2003. 11. 17. 윤만(문) 제공 (1)▣ 연려실기술 제13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동서(東西) 당론(黨論)이 나누어지다 ▣
○ 이이가 우의정노수신을 보고 말하기를, “심ㆍ김 두 사람은 모두 학문하는 선비들이니, 흑ㆍ백과 사(邪)ㆍ정(正)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다가 진정으로 틈이 벌어져서 기필코 서로 해치려는 것도 아니오. 다만 말세의 풍속이 시끄럽고 말이 많아 이로 인해 조금 사이가 벌어지고 근거 없는 말들이 오가느라 어지러워서 조정이 조용하지 못하니, 두 사람을 다 외직(外職)으로 내보내어서 쓸데없는 논의를 진정시켜야 하겠는데, 대신이 경연에서 그 사유를 아뢰어야 하겠소.” 하니, 수신이, “만일 경연에서 아뢰면 더욱 소란하게 될지 어찌 알겠소.” 하였다. 그 후 사간원이 이조를 탄핵하여 체직시키자, 노수신이 의겸의 세력만이 성할까 의심하여 곧 상께 아뢰기를, “요사이 심의겸ㆍ김효원 두 사람이 서로 헐뜯어 이로 인해 사람들의 말이 소란스러우니 사림이 불안할 조짐이 있을 듯합니다. 두 사람 모두 외직으로 보임하여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이 서로 말하는 것은 무슨 일들인가?” 하였다. 수신이 아뢰기를, “서로 지난날의 허물을 말할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조정에 있는 선비로서 화합하여야 할 터인데, 서로 헐뜯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 두 사람 모두 외직에 보임하여야 하겠다.”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이 두 사람이 반드시 깊게 틈이 벌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나라의 인심이 경망하고 조급하며, 말세의 풍속이 소란스러워 두 사람의 친척과 벗들이 제각기 듣는 대로 말을 전하여 마침내 시끄러워진 것이니, 대신이 진정시켜야 하므로 두 사람을 외방으로 내보내어 쓸데없는 말들의 근원을 없애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아셔야 할 일은, 지금은 비록 조정에 분명하게 드러난 간인(奸人)이 없으나, 또한 어찌 반드시 소인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소인이 있어서, 이것을 붕당(朋黨)이라고 지목하여 두 편을 다 퇴치할 모략을 한다면 반드시 사림의 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홍문관 정자(正字)김수(金睟)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시고 두 사람의 재주가 모두 쓸 만하니, 반드시 외직으로 보임시키지 않더라도 저절로 풀려 화합하게 될 것입니다.”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그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지로 원수가 되어 서로 해치려 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얄팍한 시속이 안정되지 못하여 뜬소문을 지어내는 것이니, 만일 두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반드시 뜬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외직으로 보임시켜서 뿌리를 끊어야 합니다.” 하였다. 승지(承旨)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두 사람을 부르시어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을 모두 풀게 한다면, 서로 용납하여 같이 조정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임금이 친히 정사를 보이게 하였으니 특지(特旨)로 효원을 경흥 부사(慶興府使)로 제수하면서 이르기를, “이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조정이 조용하지 않으니, 먼 고을에 보임시켜야 하겠다.” 하자, 이조 판서 정대년(鄭大年)과 병조 판서 김귀영(金貴榮)이 같이 아뢰기를, “경흥은 먼 국경 지대로서 오지(奧地)의 호인(胡人)과 접근하여 있으니, 서생이 진정시키고 다스릴 곳이 아닙니다.” 하고 여러 번 아뢰어 마침내 부령(富寧)으로 제수하였고, 심의겸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임명하니, 이에 젊은 선비들이 더욱 심하게 두려워하고 의심하였는데, 이이가 중간에 서서 장차 이들을 무마하여 안정시키려 하니 양편의 사림들이 모두 의지하고 기대하였다. 수신이 효원을 외직으로 내보내자 허엽이 수신에게 경솔하게 발언한 것을 나무랐더니, 수신이 선비들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편당에 가담하는마음이 없었음을 해명하면서 재삼 맹서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웃었다.《하담록》
(2)▣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수륙으로 동정하여 왜적이 철환(撤還)하다 ▣
황제가 남원에서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도독 동일원(董一元)ㆍ유정(劉綎)과 수군 도독 진린(陳璘)에게 여러 장수의 병마와 수군을 통솔하여 길을 나누어서 동정할 것을 명하였다. 정유년 겨울에 형개가 서울에 도착하였으므로 윤두수ㆍ이원익을 접반사로 삼았다.
○ 무술년 1월에 유정ㆍ동일원이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김수(金睟)ㆍ이충원(李忠元)을 접반사로 삼았다. 진린은 절강의 군사 5백여 척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서 당진(唐津)에 정박하였다.
○ 2월에 산동 포정사사(山東布政使司) 우참의 양조령(梁祖齡)이 소응관(蕭應官)을 대신하여 나왔다.
○ 3월에 찬획 주사 서중소(徐中素)가 정응태를 대신해서 왔는데 감군을 겸하였다. 7월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돌아갔다.
○ 그때 왜적이 남쪽 변경에 주둔하여 웅거하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이 때맞추어 농사를 짓지 못하니, 곤궁하여 굶주림이 날로 심하였다. 중국 조정에서 산동의 좁쌀 백만 섬을 보내어 구제해 주었다.
○ 여름 4월에 행장이 요시라(要詩羅)을 임실(任實)에 보내와서 화친하기를 청하므로, 옥에 가두었다가 이내 중국에 보내어 베어 죽였다. 《일월록》
(3)▣ 연려실기술 제20권 폐주 광해조 고사본말(廢主光海朝故事本末) 박응서(朴應犀)의 옥사(獄事)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다. 엄성(嚴惺)은 내쫒기고 이덕형(李德馨)은 서울을 떠났다. 정온(鄭蘊)의 소도 아울러 부록하였다. ▣
○ 4월 25일에 포도청에서 아뢰기를, “지난 3월 경에 조령(鳥嶺) 길목에서 은 수백 냥을 강탈하고, 상인을 칼로 찔러 죽인 도적의 괴수 서얼 박응서는 도망하였고, 도적 허홍인(許弘仁)과 그의 종 덕남(德男) 등은 이미 잡혀서 매 한 대 맞기 전에 낱낱이 자백했습니다. 같은 무리 몆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밖에 있었고 어떤 사람은 먼저 도망쳤는데 지금 계책을 세워 끝내 잡겠습니다” 하였다. 신시에응서가 옥중에서 비밀리에 상소를 올리므로 이것을 상께 아뢰니 명하여 그날 친히 국문하였다. 응서가 공술(供述)하기를, “병이 있고 정신이 흐려 말로서 상세히 아뢸 수 없으므로 역적 무리들의 반역 진상을 별지(別紙)에 써서 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반역을 꾀했다는 사실과 약조를 한 곡절에, “서양갑ㆍ박치의가 주모자가 되어 종성 판관(鍾城判官)정 협(鄭浹)ㆍ전 수문장 박종인(朴宗仁)ㆍ서얼 심우영ㆍ허홍인,출신(出身)유인발(柳仁發) 등과 함께 용사들을 사귀어 사직을 도모하려고 한 지가 거의 4, 5년에 이르렀다. 선왕(先王 선조(宣祖))이 승하한 후에 중국 사신이 오게 되자 홍인과 양갑이 활과 화살을 가지고 남별궁(南別宮) 밖에 와서 중국 사신을 쏘아 맞추고 고의로 변고가 발생했다고 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는데. 중국 사신의 호위가 엄중하므로 그 계책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직재(金直哉)의 변이 일어날 때 이문학관(吏文學官)이경준이 흥의군문(興義軍門)이란 칭호를 하고 격문을 만들어 사대문(四大門)에 붙이고, 민심을 움직여 이로 인해 군사를 일으킬 계획을 꾸몄다. 그런데 직재의 변이 매우 치성하자 경준은 격문을 도로 빼앗아 불살라 버렸다. 양갑은 세상에 뛰어난 웅걸(雄傑)로 자처하여 먼저 반역의 꾀를 일으켰다. 그 후에 양갑ㆍ우영ㆍ홍인ㆍ유효선(柳孝先) 등은 여강(驪江)에 같이 거주하면서 날마다 반역을 의논하기를, “우리들은 탁월한 재사지만 당대의 서얼금고(庶孽禁錮) 법에 묶여서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있다. 대장부가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왕 죽을 바에는 큰 명성을 내야한다” 하고 드디어 장사 호걸인 출신(出身)유인발ㆍ무사 박치의ㆍ만호(萬戶)김평손ㆍ수문장 박종인ㆍ사인(士人)김비(金斐) 즉 김수(金晬)의 손자와 사귀었는데, 금이나 은없는 것을 한으로 여겼다. 신해년 가을에 서양갑이 해주(海州)땅에서 소금 장사를 하다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해 왔다. 지난 해 봄에 정 협(鄭浹)ㆍ홍인 등이 거짓으로 임금의 사신이라 일컫고 부자 이승숭(李承崇)의 집에 들어가 도적질을 하였다. 지난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홍인 등이 영남을 세 번이나 왕래하였다. 금년 봄에 은 장수를 때려 죽이고 은 6, 7백 냥을 얻었다. 지금 결정한 계책은 장사 3백여 명을 이끌고 밤을 이용하여 몰래 대궐 안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는데, 그보다 먼저 친한 무사를 시켜 조정에 뇌물을 써서 선전관(宣傳官)이나 내금위장(內禁衛將)ㆍ수문장으로 임관되어 안에서 호응하게 하려고 하였다. 또 국정(國政)을 맡은 사람에게 금과 은으로 뇌물을 주어 정 협을 훈련대장(訓練大將)으로 임관되게 하고 금과 비단을 다 흩어 주어 장사들을 사귀어 3백여 명을 얻은 후에 밤을 틈타 대궐을 범하여 먼저 임금을 범하고 다음은 세자를 범하고, 그런 후에 급히 국보(國寶 국새(國璽))를 가져와서 대비에게 드리기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서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기를 청하고 성문을 닫고 변을 일으켜 모든 벼슬아치들을 거조(擧條)하되 척리(戚里)와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호위하는 관원을 먼저 죽인 뒤에 동당(同黨)을 조정에 널리 배치하고, 양갑은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지금 귀양가 있는 무리들을 놓아 주고 높은 관직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같이 하게 하여 대군을 받들어 임금으로 세운 후에 사신을 보내어 중국 조정에 아뢰기로 하였다 하였는데, 그 말은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권일용(權日龍)은 장사이며 날래기는 달리는 말에 버금갔다. 병서(兵書)와 고금의 진도(陣圖)가 양갑ㆍ홍인ㆍ우영 세 사람의 집에 쌓여 있었다. “신은 세신(世臣)의 아들로서, 이 몹시 간절한 충정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모두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아래도 같다.
(4) ▣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병 신년에 왜병이 철환하다. ▣
○ 9월에 명 나라 조정에서 임회훈위도독첨사(臨淮勳衛都督僉事) 이종성(李宗誠)을 일본 책봉 정사(日本冊封正使)로 임명하고 도독첨사양방형(楊邦亨)을 부사로 삼았다.
○ 을미년 4월에 종성 등이 나왔다. 책보(冊寶)와 금백(金帛)을 가지고 가서 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봉하려 하는데, 우리 서울에 머물면서 왜적이 다 철수한 다음에 가게 하였다. 소서비탄수(小西飛彈守)가 명 나라 복식을 꾸려서 부하에 맡겨 놓고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그 부하와 함께 다녔다. 경이 함께 와서 먼저 부산으로 갔다.
○ 호조 판서김수(金睟)와 이조 판서이항복을 정사 부사 접반으로 삼았다.
○ 황신(黃愼)이 유경의 접반이 되어서 왜군 진영에 따라 들어갔다. 행장이 유경을 접대하면서 접반사에게는 앉으라는 말도 없으므로 황신은 발끈 성을 내어 일어나 나가려 했다. 행장은,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느라고 정신이 쏠려 매우 예모에 실수가 있었다.”하고, 영접하여 앉게 하고 사죄하며, “조선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이러한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유경이 행장에게, “왜병이모두 철수한 뒤에 명나라 사신이 내려올 것이다.” 하였다. 행장이 유경을 진중에 머물러 있게 한 후 직접 작은 배를 타고 가서 수길에게 이 말을 전하고 곧 바다를 건너 돌아와서 우리 나라 통신사도 아울러 청하였다.
○ 행장이 비로소 담도사(譚都司)를 돌려보냈다. 한 책에는 담이 청정(淸正)의 진영에 구금되어 있다가 꾀로써 탈출하였다는 말도 있다.
○ 종성 등이 연달아 사자를 보내어 왜적들에게 바다를 건너 갈 것을 독촉하였다. 이에 행장이 먼저 웅천 몇 진과 거제(巨濟)ㆍ장문(場門)ㆍ소반포(蘇伴浦) 등지에 주둔한 군대를 철수시켜서 신용을 보이고, 또 유경을 시켜 자문을 전하였는데, “행장이 명나라 사신을 기다렸으나 이제까지 온다는 소식이 없으므로 여러 장수가 평양에서처럼 속임을 당한 것인가 의심하니, 원컨대 천사가 속히 왜군 진영에들어오면 마땅히 약속대로 다 이행하겠다.” 하였다. 《일월록》
(5) ▣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임진왜란 때의 의병 ▣
그때 삼도(三道 충청ㆍ전라ㆍ경상)의 병사(兵使)ㆍ수사(水使)들이 모두 백성의 인심을 잃고 있었다. 백성들은 병정과 군량의 징발을 독촉하는 사람을 밉게 보았으며, 또 관군은 적병을 만나면 무너지고 마니 도내 큰 문중(門中)의 이름 있는 사람들과 유생들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창의(倡義)주D-001하자 듣는 자들이 격동되어 멀고 가까운 여러 곳에서 의병에 응모하였다. 비록 이 의병들이 크게 이긴 것은 없었으나 사람들의 마음과 나라의 명맥이 여기에 힘입어 유지되었는데 이때 영남의 유생 곽재우(郭再祐)ㆍ전 장령 정인홍(鄭仁弘)ㆍ호남의 첨지중추부사 고경명(高敬命)ㆍ전 부사 김천일(金千鎰)ㆍ호서의 전 제독관(提督官) 조헌(趙憲)이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었다. 《조야첨재》
○ 처음에 김성일(金誠一)이 붙잡혀 직산(稷山)에 이르렀을 때 특사(特赦)를 명하고, 경상 우도(右道)의 초유사(招諭使)를 삼아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성일이 호남으로부터 남원(南原)에 이르러 경성(京城)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이어 영남을 향해 가다가 전라도로 도망오는 김수(金睟)를 만나자 말하기를,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신하는 마땅히 그 맡은땅에서 죽어야 할 것이어늘 어찌하여 여기에 이르렀소, 한 도(道)를 완전히 잃어 버리고도 구출하지 못하면서, 필마 단기로 멀리 가서 남에게 의탁하면 가망이 있을 줄 아오.” 하였다. 성일은 영남에 이르자 도내(道內)에 널리 격문(格文)을 발송해서 타일러 깨우치고, 조정에서도 또 영천(榮川) 사람 김륵(金玏)을 〈경상좌도〉 안집사(安集使)로 삼아 임금의 전지를 가지고 본도(本道 영남)에 와서 멀고 가까운 곳의 모든 충성스럽고 의기(義氣) 있는 선비들에게 두루 유시(諭示)하게 하였다. 그 뒤 달포 만에 성일이 경상좌도(慶尙左道)감사(監司)에 임명되어 강을 건너가려 하자, 우도(右道)의 선비들이 길을 막고 유임(留任)하기를 청하니 성일이 말하기를, “이미 명령이 있다.” 하고 드디어 강을 건너갔다. 〈성일이〉 우도(右道) 선비들의 왜적 토벌한 일을 일일이 논공(論功)하여 조정에 아뢰었는데 여러 사람의 기대에 매우 합당하였다. 오래되지 않아서 성일이 다시 경상우도의 감사로 임명되었으니, 이는 합천(陜川)에 사는 진사 박이문(朴而文) 등의 유임을 청원하는 상소(上疏)에 조는 것이었다.
[주 D-001] 창의(倡義) : 관군(官軍)에 속하지 않은 민간인이 의용병(義勇兵)을 선창(先倡)하여 모집하는 것이다.
(6) ▣ 연려실기술 제14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기축년 정여립 (鄭汝立)의 옥사(獄事)인용한 기축록 중에 동인 기축록(東人己丑錄)은 청점(靑點)으로 표시하고, 서인 기축록(西人己丑錄)은 홍점(紅點)으로 표시하였다. ▣
○ 6월에 강해(姜海)뒤에 현(涀)이라고 고쳤다. ㆍ양천경(梁千頃) 등이 조응기(趙應麒)에게, “길삼봉은 곧 최영경이다.” 고 말하니, 응기는 그 말을 전라감사 홍여순(洪汝諄)에게 보고 하였다. 여순이 비밀히 장계하기를, “길삼봉은 곧 최영경입니다…….”하고, 한편으로는 경상 병사 양사형(梁士瑩)에게 공문을 보냈더니, 양사형은 경상 도사 허흔(許昕)과 감사 김수(金睟) 등의 말에 의하여 먼저 영경을잡아 놓았다. 국청에서 청하여 홍여순에게 캐어물으니 여순은 제원 찰방(濟源察訪) 조응기를 끌어대고, 응기는 김극관(金克寬)을 끌어대고 극관은 강해ㆍ양천경을 끌어댔다.《노서집(魯西集)》
○ 진주 품관(品官)정홍조(鄭弘祚)는 판관 홍정서(洪廷瑞)를 말하였고 정서는 밀양 교주 강경희(康景禧)를 말하였고, 경희는 감사 김수(金睟)를 말하였고 김수는 도사 허흔을 말하였고, 허흔은 양사형을 말하였다. 《괘일록》
○ 9월 9일에 사간원의 아룀에 답하기를, “최영경이 지경을 넘어서 역적과 상종했다는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인가. 말의 근거를 자세히 아뢰라.”하였다.
○ 10일에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역적이 영경에게 보낸 서찰에, ‘두류산(頭流山)에서의 약속’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평소에 친밀했던 것이 의심할 바 없고, 역적이 영경을 와서 보았다는 것은 판관 홍정서(洪廷瑞)가 도사 허흔(許昕)에게 말한 것입니다.” 하니, 즉시 명하여, 홍정서와 허흔과 최영경을 잡아 가두었다. 영경이 진술하기를, “신에게 생기는 화의 단서는 지나간 병인ㆍ정묘년간입니다.그때 이이가 출세하자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옛날 어진 사람이 다시 나왔다.’ 하고 좋아하였으나, 신은 홀로, ‘그렇지 않다.’고 웃었더니, 그 뒤에 혹자가 신을 가르켜 선견지명이 있다고 하여 이 때문에 이이의 신에게 대한 분노가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그 친구들이나 문생들 중에 청류(淸類 동인을 가르킴)에 용납되지 못하는 자들이 신을 원망하여 거짓 비방의 말을 만들어서 거리마다 방을 붙였고, 마침내는 서울과 지방에서 말을 합쳐서 형적도 없는 것을 꾸며냄이 이 지경으로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역변이 나자 집집마다 서찰을 다 불에 던져 태웠으나, 신의 삼봉(三峯)에 대한 말을 들은 지가 3, 4삭(朔)이 지났으나 마음이 담담하므로 무룻 잡문서(雜文書)도 불에 태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고, 허흔의 진술에는, “경상 감사 김수(金晬)에게서 들었다.” 하므로, 즉시 승정원에 명하여 김수를 불러다가 물었더니, 김수는, “진주 훈도 강경희(康景禧)에게 들었다.” 하였고, 경희는, “홍정서에게서 들었다.” 하고, 정서는, “정홍조(鄭弘祚)에게서 들었다.” 했다. 정서와 홍조에게는 한 차례의 형을 내린 뒤에 놓아 보냈고 영경은 옥에서 죽었다. 《기축록》
○ 이황종(李黃鍾)이 지성으로 영경을 섬기더니, 영경이 잡혀간 뒤에는 밤마다 목욕하고 영경이 놓여 나오기를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가 누런 종이에 쓴 서간이 영경의 문서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수년 전에 조보(朝報)를 보낼 때 같이 보냈던 것으로서, 그 속에 쓰였기를, “김자앙(金子昻 김수(金晬)의 자(字))이 부제학이 되고 홍시가(洪時可 성민(聖民))가 경상 감사가 되었으니, 세상 일은 다 알 수있는 것이오.”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철에게 미움을 받아서 마침내 죽었다. 《괘일록》
(7) ▣ 연려실기술 제18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동서남북론(東西南北論)의 분열 ▣
선조 신묘년(1591)에 대간이 정철(鄭澈) 등의 죄에 대해 논했는데, 이산해(李山海)가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옥당도 또한 장차 차자를 올리려고 부제학 김수(金晬)가 사성 우성전(禹性傳)의 집으로 가서 의논하니, 성전은 이렇게까지 파급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김수를 만류하며 가지 못하게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사간 홍여순(洪汝諄)이 성전을 탄핵하여 삭직하자 남북(南北)의 논의가 처음 갈라졌는데, 과격파를 북이라고 지목하고 온건파를 남이라고 지목하였다. 임진년(1592)에 이르러 이산해와 홍여순은 귀양가고 유성룡(柳成龍)도 파직되니 윤두수(尹斗壽)가 정승이 되어 정권을 잡았다가, 계사년에 환도(還都)한 뒤에는 성룡이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하담록(河潭錄》
(8) ▣ 연려실기술 제13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이이(李珥)가 졸서(卒逝)하다 이제신(李濟臣)의 귀양간 사실을 붙임 ▣
○ 유학(幼學)신급(申礏)이 상소하여 이이ㆍ성혼의 어짊과 박근원ㆍ김응남(金應南)ㆍ우성전(禹性傳)ㆍ홍혼(洪渾)ㆍ김첨(金瞻)ㆍ김수(金晬) 등의 무리가 조정에서 마음대로 권세를 행사한다고 아뢰니, 답하기를, “그대의 아우 입(砬)이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는데, 그대가 또 이렇듯 기특한 절개가 있으니, 한 집안에 충과 의가 함께 났도다.” 하였다.《계미기사(癸未記事)》
(9) ▣ 연려실기술 제19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가장 먼저 유영경(柳永慶)을 죽이다. ▣
○ 처음에 이조판서 성영(成泳)이 영경의 당이라고 탄핵당하여 파직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이광정(李光庭)ㆍ김수(金晬)ㆍ이정귀(李廷龜)를 후임에 추천하였다. 임금이 망(望)을 더 내라고 명하므로, 신흠(申欽)을 천거하였으나 또 망을 더 내라고 명하였다. 임금은 정창연(鄭昌衍)에게 뜻을 둔 것이었고, 창연은 왕비의 외숙이었다. 원익은 부득이 김신원(金信元)ㆍ한효순(韓孝純) 및 창연을 추천하니드디어 창연이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뭇 사람이 시끄럽게 의논하고 외척의 권세가 성하게 되었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정경세는 대구부사(大丘府使)로 있다가, 국정에 대한 곧은 말을 구한다는 교지에 응하여 소를 올려서, 임금이 즉위한 뒤 처음으로 정사의 잘못됨을 심한 어조로 말하였는데, “마음에 둔” 그 사람이 들어있지 않으면 망에 더 넣기를 명하고 또 들어있지 않으면 또 망을 더하기를 명하여, 반드시 그 사람의 성명이 들어간 뒤에야 낙점(落點)하니, 전하께서 자기의 사사로운 뜻을 개입시켜 마음대로 낮추었다 높였다 하시는 것이 이에 이르러 심합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아무개 이산해 는 세자를 책립(策立)하게 한 공이 있다고 자처하여 그 아들이 무슨 벼슬이 되었고, 아무개 기자헌 는 세자를 보호한 공으로 자처하여 자신이 아무 벼슬이 되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화를 내어 이르기를, “정경세가 선왕을 책하였으니 내가 죄를 다스리고자 하나 언로를 막는 것이 될까 주저하여 그냥 두노라”하였다. 정경세의 소에 대간에 저촉된 말이 있었으므로 대간이 모두 피혐하면서 우물쭈물하는데 정언 정홍익(鄭弘翼)만이, “망을 더하여 추천한 것은 정승으로서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고 하여 말이 지극히 준절하니 이날 정사(政事)에 수찬(修撰)으로 이임(移任)시켰는데 그의 논란을 꺼린 때문이었다. 임연(任兗)이 임금의 심중을 엿보고 비위를 맞추고자 하여 피혐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사람을 쓸때에는 어진 이를 가리는데 제한이 없는 것인데, 경세라는 자는 말썽부릴 제목이 좋은 것(망을 더하여 추천하게 한 것을 간하는 제목)을 취하여 창연을 쫓아낼 계책을 꾸몄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대신이 의논하라는 말을 내렸는데 수 백마디나 되었다. 대략적인 내용, “경세는 선왕의 경악(經幄)의 신하로서 선왕의 허물을 폭로하였으니 내가 변방으로 귀양보내려 한다”라는 말이 있었다. 대신들은, 모두 “나라 일을 말하다가 죄를 받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하였고, 윤승훈(尹承勳)은, “전일에는 경세에 대한 처분을 그만두라 하시다가 이제는 귀양보내라 하시어 전후의 하교가 달라서 전하의 말씀으로서 체면에 손상이 있을까 합니다”하니 경세는 파직만 되었다. 홍가신(洪可臣)이 물러나서 시골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서 임연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고, 어진 이를 질시한 죄를 논하였더니 답하기를, “경은 훈구중신(勳舊重臣)으로서 편당을 면하지 못하니, ‘하북(河北)의 적을 없애는 것이 쉽다’라는 말이 참 말이로다”하였다. 연은 더욱 의기양양하여 피혐하기를, “경세가 앞소리를 매기면 홍익은 뒷소리로 화답하고, 가신은 칼을 들고 일어납니다”라는 말까지 하였다. 드디어 전랑(銓郞)에 임명되니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다. 이 해 겨울에 장령 이유록(李綏祿)이 정경세의 죄를 공박하는 소 가운데, 세자를 보호하였다고 자처하였다는 사람은 기자헌을 지목하는 것이고, 세자를 책립하였다고 자처하였다는 사람은 이산해를 지목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첨(爾瞻)의 무리는 세자를 보호하였다고 자처한 사람이라는 것은 정인홍을 지목한 것이다” 하여 경세를 공격하는데 더욱 힘썼다. 《하담록》
(10) ▣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홍문관(弘文館) ▣
○ 옥당관이 으레 지제교를 겸무하는데 이를 ‘내지제교(內知製敎)’라 하고, 다른 벼슬로서 겸무하는 자는 이를 ‘외지제교(外知製敎)’라 한다. 무릇 시급한 교서는 반드시 옥당관에게 짓도록 명하였다. 선조조에 홍모(洪某)가 옥당관으로 있었는데, 글재주가 졸(拙)하여 교서를 능히 지어 바치지 못하였으므로 곧 벼슬을 사퇴하고 갔으니, 대개 공론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지봉유설》
○ 옥당에 번 드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괴롭게 여겨서 회피하였다. 선조조에 성낙(成洛)이 가장 심하여서 번 차례를 어기고 들지 아니하거나 혹 들었다가도 곧 나갔다. 허봉(許葑)ㆍ김수(金睟)ㆍ김찬(金瓚)ㆍ이성중(李誠中)ㆍ이원익(李元翼)ㆍ김응남(金應男)이 함께 옥당에 있었는데, 서로 약속하기를, “성낙이 만약 번을 들거든 우리는 두어 달 한정하고 교대하지 말도록 하자.” 하였다. 약속이 정해진뒤에 성낙이 번에 들었는데, 겨우 하루가 되자 또 나가고자 하여 관(館)의 아전을 회초리로 때려서 몹시 잔혹하게 하였다. 아전이 교대할 사람을 찾아서 여러 집을 다녔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고, 원익에게는 그가 이제 겨우 번에서 나왔으므로 감히 청하지 못하였다. 사태가 급박하여 시험삼아 원익에게 갔더니 원익이 처음에는 답하지 않으므로, 아전이 슬피 울면서, “80살 된 늙은 어미가 차가운 옥에 갇혀서 운명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원익이 마침 모친을 모시고 있다가 측은하게 여겨서 허락하였더니, 아전이 문밖으로 뛰어 나가며 손뼉을 치면서, “이 교리는 참 성인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식소록》
○ 선조조에 유희춘(柳希春)을 오랫동안 부제학에 임용하여 다른 벼슬로 옮기기를 허락하지 아니하더니, 뒤에 품계가 올라서 자헌(資憲)이 되었다. 정2품을 강등시켜서 부제학에 제수하는 예가 없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유모(柳某)가 부제학에 적임이니 비록 전례가 없더라도 제수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뒤에 김수(金睟)도 자헌(資憲)으로서 특히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니 이 준례를 쓴 것이었다.《지봉 설》 그 뒤에 정경세(鄭經世)ㆍ정엽(鄭曄)ㆍ조익(趙翼)에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영조조 조엄(趙儼)에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11) ▣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곽재우(郭再祐) 제일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기재갑기》에 그를 승지(承旨) 규(赳)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조야첨재》에는 감사 월(越)의 아들이라 하였다. ▣
임진년 4월 27일에 곽재우(郭再祐)가 군사를 일으켜 적병을 토벌하였다.
재우는 목사(牧使) 월(越)의 아들로서, 군사를 일으킬 때 그 아버지의 무덤에 가서 울며 하직하기를, “아버지께서 만약 살아 계셨다면 왜놈들의 창궐(猖獗)이 어찌 걱정되겠습니까.” 하였다.
○ 재우는, 자는 계수(季綏)이며,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의령(宜寧)에 살았으며, 나이 40이 넘자 과거보기를 단념하고 낚시질로 스스로 즐기더니, 이때에 이르러 각 고을의 성(城)이 잇달아 함락된다는 말을 듣자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타이르기를, “적병이 이미 박두하였으니 우리의 부모 처자는 장차 적병의 포로가 될 것이다. 이에 우리 동네에 나이 젊어 싸울 수 있는 자가 수백 명은 될 것이니만약 마음을 같이 하여 정암나루[鼎岩津]에 의거하여 지킨다면 우리 고장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것인가.” 하고 드디어 자기 집 재물을 처분하여 군사를 모집하였는데, 자기 옷을 벗어 싸움할 군사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벗겨 군사의 처자에게 입혔으며, 용감한 장사 심대승(沈大升) 등 십여 명을 얻자 사생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하였다. 장사(壯士) 50여 명을 모아 가지고 의령(宜寧)ㆍ초계(草溪)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끌어내고, 또 거름강[岐江]에 버려져 있는 배에 실려 있는 세미(稅米)를 가져다가 군사에게 먹이니,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 하고 어떤 이는 그가 도적노릇을 한다고 하였으며, 합천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은 그를 육지의 도둑이라고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김성일이 그의 이름을 듣고 격려하며 일어나기를 권하니 군사들이 도로 모여들었다. 재우는 적병의 많고 적은 것을 묻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앞으로 달려들었다. 재우는 싸울 때 항상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첩리[帖裏]를 입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을 갖추고 스스로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이라 일컬으면서 말을 달려 적진을 스쳐 지나가곤 하였는데, 숨었다 나타났다 종작이 없이 하여 적이 그 단서를 잡을 수 없게 한 뒤에, 말을 돌려 돌아와서 북을 치며 천천히 행진하니 적은 그 병력의 많고 적은 것을 알지 못하여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조차 못하였으며, 잇달아 척후(斥候)를 두었으므로 적이 백리밖에 이르면 우리의 진중에서 먼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대처하기에 편하고 수고스럽지 않았다. 또 사람을 시켜 적이 바라볼 수 있는 산 위에서 다섯 가지[枝]로 된 횃불을 들고 밤새도록 함성을 질러 서로 호응하게 하니, 천만 명이나 있는 것 같았으므로 적의 무리가 바라보고 곧 도망쳤으며, 정예한 군사를 뽑아 요해처에 숨겨 두었다가 적이 이르기만 하면 문득 쏴 죽이니, 적이 홍의장군이라고 부르면서 감히 언덕에 올라오지 못하였다. 또 군중에 약속하기를, “〈적의〉 머리를 베어 공을 자랑하는 것은 성심(誠心)이 아니다. 적을 죽일 뿐이다.”하였으므로 끝까지 적의 머리를 조정에 바치는 일이 없었다. 김수(金睟)의 진영에 있는 무사(武士)김경로(金敬老)등이 재우를 죄로 얽으려 하고 재우 또한 도망 다니는 감사 김수의 하는 짓을 통분하게 여기니 드디어 틈이 생기게 되었다. 성일이 삼가(三嘉) 고을의 군사를 재우에게 예속시켜 주니 재우는 두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에 그는 윤탁(尹鐸)을 대장(代將)으로 삼고 전 부사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으니, 고을의 부자들이 차례로 쌀을 내고 소를 잡아 날마다 군사를 먹여 군사의 명성이 크게 떨쳐서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 등 세 고을을 수복하였으므로 백성들이 평일과 같이 농사를 지울 수 있었다.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적병이 거의 물러가자 재우는 정암나루에 진을 치고 강 상하의 적병을 수비하였다. 《일월록》
○ 재우가, “김수(金睟)가 달아났다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옮겨 먼저 그를 치고자 하니 김성일이 준엄하게 책망하여 중지시켰다. 재우는 드디어 격서(檄書)를 보내어 수의 일곱 가지 죄목을 지적하면서 “내 장차 너의 머리를 베어 귀신과 사람의 분함을 풀겠다.” 하였다. 그때 수(晬)는 산음(山陰)에 머물러 있다가 재우의 격서를 보자 놀라고 분하게 생각하여 군관 김경눌(金敬訥)을 시켜격서로 답하면서 재우를 도적으로 지목하였다. 재우는 그때 막 진주(晋州)를 구원하려 달려가다가 말에 기대서서 회답을 쓰되, “의사와 도적의 구분은 하늘과 땅이 알며, 옳고 그른 것의 판단에는 공론이 있다.” 하였다. 일찍이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재우의 성공을 시기하여 조정에 올린 계사(啓辭) 가운데, ‘재우가 의심스럽다’고 한 일이 있고 또한 수의 계사에도 재우를 헐뜯으니 재우도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고, 수의 허물을 극력으로 말하였다. 이에 이르러 삼가(三嘉) 고을의 진사 윤언례(尹彦禮) 등이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재우가 무고당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자, 수가 또 소를 올려 스스로 변호하고 또 재우가 와서 저를 칠까 염려하여 성일과 김면(金沔)을 시켜 서한을 재우에게 보내게 하여 화해하려 하니 재우가 마지못해 따랐다. 성일이 말하기를, “조정의 처치를 알 수 없으나 마땅히 재우의 이 위태한 목숨을 구해야 한다.” 하고 거듭 조목을 들어 설명하고 피차를 미봉하였더니 임금이 특히 온정(溫情)있는 유시(諭示)를 내렸기 때문에 무사할 수가 있었다. 《명시록》ㆍ《일월록》
○ 수(晬)는 처사(處事)가 조급하고 각박하여 인심을 매우 잃더니 왜변을 당한 시초에 계책을 세워 대처하지 못하고 적병을 피하여 전라도로 갔기 때문에 지방 사람들의 나무람을 많이 받았다. 재우가 이미 세력을 쥔 후로는 법도를 따르지 않는 일이 많으므로 수가 그것을 곧 바로잡으려 하였더니 재우가 심히 성을 내고 드디어는 격서(檄書)를 보냈다고 한다. 《기재잡기》
○ 수(晬)가 소환되고 성일이 대신 감사가 되자 재우가 또 소를 올려 수를 베어 죽이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이 함부로 감사를 죽이고자 하니 도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없애버리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염려된다.”하였다. 이에 윤두수(尹斗壽)가 아뢰기를, “그 사람의 하는 짓은 한 미친 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베어 능히 향리(鄕里)를 보전하였으며, 동ㆍ서로쫓아다니면서 달려가 〈백성을〉구원하며 험난한 것을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 의사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상소 또한 반드시 의기(義氣)의 격동하는 바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실은 스스로 죽을 죄에 빠지는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총칼이 어수선한 날에 어찌 사람마다 모두 예법으로써 책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드디어 더 묻지 아니하였다. 《기재잡기》
(12) ▣ 연려실기술 제15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3도 근왕병(勤王兵)이 용인서 패전하다 6월 ▣
이때 경상도에 좌우 순찰사를 두기로 하고 이성임(李聖任)을 좌순찰사로 삼았으니 그것은 적병이 깔려 있어 좌우도에 호령이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 방어사 곽영(郭嶸)이 조방장 이지시(李之詩) 등을 거느리고 금산(金山)에서 전주로 돌아왔다.
○ 5월에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병사(兵使)최원(崔遠)에게 전라도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 4만 혹은 2만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 목사 이경복(李慶福)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고, 조방장 이지시를 선봉으로 하여 용안에서 강을 건너 임임천(林川) 길을 거쳐 전진하였다. 방어사 곽영은 2만병을 거느리고 광주 목사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삼고, 조방장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으로 하여 여산(礪山) 길을거쳐 금강(錦江)을 건넜다. 경상 우감사 김수(金睟)는 수하 군사 수백 어떤 데는 겨우 군관 30여 명이라고 기록되었다. 을 거느리고, 충청 감사 윤국형(尹國馨)은 수만 명을 징발하고 충청 방어사 이옥(李沃)과 병사 신익(申益)도 수만 병사를 거느리고 근왕(勤王)하기를 서로 약속하여 같은 날 일제히 전진하니 10만 군사라 칭하였다. 《자해필담》ㆍ《조야기문》
○ 이때 임금의 교지(敎旨)가 호남에 도착하였는데 은밀히 경상우도에 통하도록 한 것인데 전 경내(境內) 군사를 모아 와서 구원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반 조각의 얇은 종이에 자잘한 글씨로 쓴 것이 겨우 글자 모양을 이루어,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수가 남원에서 전주로 오니 이광은 김수를 패전한 장수라고 받아들이지 않자 일행의 군사와 말이 점차 도망하여 흩어졌다.김수가 광을 보고 함꼐 출발하기로 약속하였다. 원정에 이르니 순창(淳昌)ㆍ옥과(玉果)의 군사들이 멀리 가기가 싫어서 형대원(邢大元)ㆍ조인(趙仁)을 맹주(盟主)로 추대하여 갈재[蘆嶺]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본군(本郡)으로 군사를 돌려 향사당(鄕社堂)을 불태웠다. 이광이 병사 최원을 시켜 진군하여 토벌해서 베어 죽였다. 담양ㆍ남원ㆍ구례ㆍ순천 군사들은 도중에서 모두 흩어지고, 광주ㆍ나주 군사는 용안까지 와서 역시 흩어졌다. 수령(守令)들이 길에서 군사를 소집해도 일제히 모이지 않고 이광 역시 중도에서 망설이고 전진하기를 싫어하는 뜻이 있었다. 《일월록》
○ 대군이 모두 무너지자 이광은 전주로 돌아가고 윤국형은 공주로 돌아가고 김수는 경상우도로 돌아갔다. 권율과 동복 현감 황진(黃進)은 군사를 손상없이 온전히 하여 돌아갔다.
○ 이때 충청ㆍ경상 두 도는 모두 다 적의 분탕질을 당했으나 전라도 한 지방만은 물력(物力)이 전성(全盛)하여 군기ㆍ갑옷ㆍ치중(輜重)이 4, 50리에 가득 찼으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듣고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고 조정에서도 역시 날짜를 세며 첩보를 기다렸다. 김수는 군사를 잃고 패전한 끝에 겨우 군관 백여 명을 거느리고 광에게 붙었으니 광이 거느린 정용병(精勇兵)들은 김수 일행을 모두 멸시하고업신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광은 또 용렬하고 겁이 많아 병법을 알지 못하고 행군하기를 마치 양(羊) 몰고 다니듯 하니 규율이 문란해서 통제가 없고 앞 군사와 뒤 군사는 서로 알지도 못하였다. 처음에 광언ㆍ지시가 광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비록 많다 하나 모두 여러 고을에서 모은 오합지졸이니 병력의 많음과 적음을 논하지 말고 모두 그 고을 수령을 장수로 삼아 어느 고을은 선봉을 하고 어느 고을은 중군을 시켜 한 곳에 모이지 말고 10여 둔으로 나누어 있으면 한 진이 비록 패하더라도 곁에 있는 진이 계속해 들어가서 차례차례 서로 구원하게 되니 이긴다면 반드시 완전히 이길 것이고, 패하더라도 전부가 패하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나 이광이 듣지 않고 용인현 남쪽 10리에 나아가 진을 쳤다. 광언ㆍ지시가 바로 적의 진터까지 달려들어 나무하고 물긷는 적병 10여급을 베어 오니 모든 군사들이 적을 가볍게 여기고 교만한 기색이 보였다. 밤이 되어 광언 등을 시켜 적의 진을 기습하여 울타리를 넘어 바로 들어가 칼을 휘두르고 마구 찍어 머리 10여 개를 베었으나 마침 짙은 안개가 꽉 차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진중에 있던 적이 모두 언덕에 올라 안개를 이용해서 총을 쏘고 뒤에서 엄습하니 광언 등이 모두 죽고 날이 새고 안개가 걷히자 적의 군사 4, 5천이 우리 진과 서로 2, 3리 거리에서 대치하여 적의 총소리가 한 번 나자 우리 대군은 마침내 무너졌다. 이광 등은 흰 옷으로 갈아입고 계속해 달아나고 8만 군사가 잠깐 동안에 모두 흩어졌다. 패전한 소식이 행재소에 들어오니 상하가 서로 쳐다보며 한숨과 탄식만 내뿜을 뿐이었다. 《기재잡기》
(13) ▣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정인홍(鄭仁弘)ㆍ손인갑(孫仁甲)ㆍ김준민(金俊民) ▣
○ 합천(陜川)에 사는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인홍은 평소에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인물이었다. 전 좌랑 김면(金沔)ㆍ전 현감 박성(朴惺)ㆍ유생 곽준(郭䞭)ㆍ전 현감 곽율(郭●) 및 인홍의 제자 하혼(河渾)ㆍ조응인(曹應仁)ㆍ문경호(文景虎)ㆍ권양(權瀁)ㆍ박이장(朴而章)ㆍ문홍도(文弘道) 등으로 더불어 고을의 군사를 모아 합치고, 또 전 첨절제사손인갑(孫仁甲)을 얻어 중위장(中衛將)을 삼았다. 김수(金晬)가 삼가(三嘉)ㆍ초계(草溪)ㆍ성주(星州)ㆍ고령(高靈)의 군사를 그에게 배속시켜 주었다. 《순영록》
○ 인갑이 죽으니 인홍이 순찰사 김수(金晬)에게 청하여 권양(權瀁)을 김준민(金俊民)과 바꾸고 김준민을 인갑에 대신하게 하였다.
○ 준민이 처음에 거제(巨祭)의 현령(縣令)이 되었더니 왜란이 일어나던 초기에 성을 수리하고 죽음으로써 지킬 계획을 하였다. 김수가 근왕(勤王) 한다고 핑계하여 자기가 데리고 가서, 용인(龍仁)에서 3도의 군사가 무너질 때까지도 아직 김수의 휘하에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허락하여 보내 주었다.《순영록》
(14) ▣ 연려실기술 별집 제8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진관(鎭管) ▣
○ 선조 신묘년 24년 에 조정에서 왜란의 병화를 깊이 걱정하였다. 유성룡 등이 조종조의 진관의 법을 닦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국초에는 군사가 모두 진관에 소속되어 변이 있으면 속읍(屬邑)을 통솔하고 주장의 호령에 따라 한 진이 불리하면 다른 진이 또 이어서 막았던 것입니다. 지난 을묘년 후부터는 분군법으로 고쳐, 각 읍을 순변사ㆍ방어사ㆍ조방장(助防將)ㆍ도원수와 병(兵)ㆍ수사(水使)에게분산하여 소속시키니, 비록 진관의 이름은 있지마는 그 실상은 서로 연결이 되지 않아 한번 급한 경보(警報)가 있으면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함께 움직이고, 만약 갑자기 도적이 쳐들어와 접전하게 되면 군사의 마음이 놀라고 두려워하니 이는 반드시 패하는 길입니다. 평시에는 훈련하기 쉽고, 일이 있으면 조정 소집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옛 제도를 닦는 것만 같지 못하며, 또 앞뒤가 서로 응하게 하고, 안팎이 서로 의지하게 하여 일에 편리하도록 각 도에 지시하소서.” 하였는데, 경상 감사 김수(金睟)가 말하기를, “제승방략을 시행한 지 이미 오래여서 갑자기 변경할 수 없다.” 하여, 논의가 드디어 지식되었다.
(15) ▣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진주성(晉州城)의 함락과 명병(明兵)의 철환(撤還) ▣
○ 10월에 김수(金睟)를 보내어 적의 정세를 알리고 명 나라의 장수와 재상들이 속여 엄폐(掩蔽)한 사실을 모두 진술하여 장수와 재상이 과도관(科道官)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우리 나라를 원망하여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모두 교활하고 간사하여 은덕을 원수로써 갚으니 인심의 험악하기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너희 나라가 나를 죽일까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16) ▣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호서(湖西) 의병 ▣
○ 이산겸(李山謙)은 토정(土亭)이지함(李之菡)의 서자이다. 조헌(趙憲)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다.
○ 한산(韓山) 사람 전 참의 신담(申湛)이 의병을 일으켰다.
○ 호서(湖西) 노 정승 심수경(沈守慶)이 의병을 일으켜서 조대곤(曺大坤)을 부장으로 삼고, 건의(健義)자 기를 세워서 징표를 삼았다. 대곤이 전에 우병사로 있다가 탈직당하고, 김수(金晬)를 따라서 임금이 있는 행조(行朝)로 가려는 것을 수경이 말려서 부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조정(朝廷)에서 건의군의 장수를 팔도 의병 도대장(八道義兵都大將)으로 삼고 인장과 어도(御刀)를 하사하였다.
(17) ▣ 연려실기술 제15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임진왜란 임금의 행차가 서도(西道)로 파천(播遷)가다 ▣
○ 변방의 사정을 아는 재신(宰臣)을 골라 하삼도(下三道)를 순찰케 했다. 김수(金晬)를 경상 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로 삼고, 윤선각(尹先覺)일명 국형(國馨)을 충청 감사로 삼아 병기를 준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케 하였다. 이때 오랫동안 태평이 계속되었으므로 서울과 지방이 편한 것만 알고 부역을 꺼려 원성이 가득하였다. 양남(兩南)에 쌓은 성은 모두 모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크고넓게 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에만 힘썼다. 《징비록》
○ 감사 김수(金晬)가 각읍 수령(守令)에게 명을 내려 계속해서 군사를 올려보내게 했으나, 혹은 도중에서 도망치고 혹은 문을 나서자 달아나고 혹은 적을 보지도 않고 달아나 버렸다. 초계 군수 이유검(李惟儉)은 군사를 풀어 놓아 흩어보내고 자기도 도망쳤다. 《기재잡기》
○ 이때 김수가 진주에서 동래로 가는 도중, 부산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달려가 다시 영산(靈山)으로 돌아갔다.《일월록》《일월록》
○ 적이 좌병영(左兵營)을 함락시켰다. 이때 이각(李珏)과 우후(虞侯)원응두(元應斗)가 먼저 달아났고 열세 고을 군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궤멸되었다. 이각은 무예(武藝)가 뛰어나서 본 직책에 제수되었는데 포(砲)를 쏠 때에 따로 탄알 같은 해마석(海磨石)을 열 말 남짓 써서 시험하였으므로 소문과 기세가 크게 떨쳐 사람들이 자못 기대하였다. 그러나 탐욕이 한이 없고 성질이 또 겁이 많아가는 곳마다 먼저 달아났다.
○ 이때 김수(金晬)는 어찌할 줄 모르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백성에게 피란하기만 권하였다. 이런 까닭에 도내가 모두 비게 되어 더욱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징비록》
○ 박지는 김수의 사위이므로 이일이 김수의 도움이 있을까 해서 수행하기를 청했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일월록》○박지는 18세에 장원하였다.
○ 적병의 한 패는 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함락시키고, 한 패는 장기(長鬐)로부터 영일(迎日)ㆍ안동(安東)ㆍ풍기(豐基)를 함락시켰다. 수령들은 달아나고 감사 김수는 거창(居昌)으로 돌아와서 이유검(李惟儉)을 베었다. 적이 의령(宜寧)에 들어가자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이 달아났다. 이때 영남 60여 고을이 모두 무너지고 우도(右道) 6, 7고을이 겨우 전화(戰禍)를 면했으나 군졸은 이미 흩어졌다.《일월록》
○ 28일에 적병이 충주에 들어갔다. 도순변사 신립(申砬)과 종사관 김여물(金汝岉)이 패하여 죽었다.
○ 처음에 신립(申砬)이 떠날 때 임금이 불러 보고 보검을 내리면서, “이일(李鎰) 이하 영(令)을 듣지 아니하거든 이 칼을 쓰라.” 하였다. 《조야기문》ㆍ《징비록》
2) 백사집의 몽촌공 기록 자료 (2004. 4. 9. 태서(익) 제공) (1) 김 접반(金接伴-수(目+卒))이 월성(月城)에서 시를 부쳐왔으므로 인하여 그 운에 차하다.
출전 : 백사집 제1권 시(詩) 골짝의 비가 산을 연하여 저물도록 내리니 / 峽雨連山晩作霏 객창엔 온종일 애써 돌아가기만 생각하네 / 客窓終日苦思歸 봄이 오니 병든 풀이 먼저 은택을 입고 / 陽廻病草先施澤 추위는 궁음에 꺾이어 비로소 위엄을 거두누나 / 寒勒窮陰始戢威 누가 계자의 해진 갖옷주D-001을 불쌍하게 여기랴 / 誰悶弊裘存季子 고분을 가지고 한비에게 물어보고 싶어라주D-002 / 欲將孤憤問韓非 강성의 이별의 한이 모년을 재촉하는데 / 江城別恨催遲暮 사막에도 봄이 오니 나무가 무성하구나 / 沙磧春生樹木依 상자 속의 밝은 구슬주D-003 한 움큼이 가득 차는데 / 拂篋明珠入把盈 낭랑히 읊으니 다시 외로운 여정에 위로가 되네 / 朗吟聊復慰孤征 소매엔 걱정될 때의 눈물을 닦을 데가 없고 / 袖無可拭憂時淚 봄은 나라 떠난 정을 위로해 주지 못하누나 / 春不能寬去國情 신 훔쳤다고 오히려 맹씨를 의심하려 하는데주D-004 / 竊屨尙將疑孟氏 금 받은 건 누가 진평을 위해 해명해 줄꼬주D-005 / 受金誰爲解陳平 유언비어가 끝내는 다투어 북을 던지게 하니주D-006 / 流言到底爭投杼 비로소 시호가 세 사람에게서 이루어짐을 믿겠네주D-007 / 始信三人虎已成 이때 이상(李相)이 나를 탄핵한 계(啓)가 있어, 김 접반이 시(詩)로써 나를 위로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억지로 촌로들과 섞이어 새해를 축하하노니 / 强和村老祝新年 남쪽 백성들 편안히 자는 것을 보고 싶어라 / 願見南氓奠枕眠 무슨 방도로 몸 부수어 큰 바다를 메울꼬 / 何術碎身塡巨海 오직 머리 잘라서 높은 하늘을 때우고 싶네 / 唯思斫首補高天 의이로 길이 뼈가 녹는 걸주D-008 누가 불쌍히 여기랴 / 誰憐薏苡長銷骨 궁검 차고 오래 변방에 있는 게 부끄럽구나 / 自愧弓刀久在邊 잘 가서 각건을 쓰고 옛 업을 찾아 / 好去角巾尋舊業 문 닫고 일생 동안 나의 도를 지키리라 / 閉門終歲守吾玄
[주 D-001] 계자의 해진 갖옷 : 계자는 전국 시대 소진(蘇秦)의 자이다. 소진이 일찍이 연황설(連橫說)을 가지고 진 혜왕(秦惠王)을 수차 설득하였으나, 그의 말이 쓰이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가 집에서 가지고 나온 담비갖옷이 다 해지고 황금 백 근이 다 떨어져서, 크게 곤경을 당했던 데서 온 말이다. 《戰國策 秦策上》 [주 D-002] 고분을 가지고 한비에게 물어보고 싶어라 : 고분은 《한비자(韓非子)》의 편명인데, 그 뜻은 바로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여 분개함을 이른 말이다. [주 D-003] 밝은 구슬 : 남의 시문(詩文)을 찬미하여 이른 말이다. [주 D-004] 신 훔쳤다고 오히려 맹씨를 의심하려 하는데 : 맹자(孟子)가 등(滕) 나라에 가서 상궁(上宮)에 묵고 있을 적에, 관인(館人)이 들창 위에 신들 두었다가 잃어버리고는 맹자의 종자(從者)가 흠쳐간 것으로 의심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下》 [주 D-005] 금 받은 건 누가 진평을 위해 해명해 줄꼬 : 한 고조(漢高祖) 때 주발(周勃)ㆍ관영(灌嬰) 등이 고조에게, 진평(陳平)이 제장(諸將)들로부터 금을 받고서 금을 많이 낸 사람에게는 좋은 자리를 주고 금을 적게 낸 사람에게는 나쁜 자리를 주었다고 진평을 참소한데서 온 말이다. 《史記 陳丞相世家》 [주 D-006] 유언비어가 끝내는 다투어 북을 던지게 하니 : 참언(讒言)이 계속하여 이르면 끝내 임금이 그 말을 믿게 됨을 뜻한다. 증자(曾子)의 어머니가 세 사람으로부터 차례로 증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는, 끝내 의아하게 여기어 짜던 베틀의 북을 던지고 담장을 넘어 달아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戰國策 秦策》 [주 D-007] 비로소 시호가 세 사람에게서 이루어짐을 믿겠네 : 이 역시 참언이 끈질기게 이르면 임금이 끝내 그 말을 믿게 됨을 뜻한다. 시호(市虎)는 저자에 범이 있다는 뜻인데, 한 사람이 와서 시장에 범이 있다고 말하면 믿지 않다가, 또 다른 사람이 두 번, 세 번까지 와서 말하면 끝내 그 말을 믿게 된다는 데서 온 말이다. 《戰國策 魏策》 [주 D-008] 의이로 길이 뼈가 녹는 걸 :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무근의 비방을 듣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후한 때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 있다가 돌아올 적에, 종자(種子)로 삼기 위해 의이실(薏苡實)을 수레에 가득 싣고 왔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남방(南方)의 진괴(珍怪)라고 비방했던 데서 온 말이다.
(3) 김 접반(金接伴)의 운에 차하다. 벼루 못에 송연묵 담그어 갈아놓고는 / 硯池浴出起松烟煙 졸고 나서 시 생각하며 책상 가에 기대 있네 / 睡後尋詩倚案邊 현안이 글을 본 것은 병이 있기 때문이요주D-001 / 玄晏看書緣有病 동파가 녹을 생각한 건 토지가 없어서였지주D-002 / 東坡懷祿坐無田 진부한 사람은 자고로 게을러 얼굴에 때가 끼고 / 陳人自古懶膏面 젊은 귀인들은 지금 흔히 매미를 잡는도다 / 新貴卽今多捕蟬 눈에 스치는 영고 성쇠가 본디 이러하나니 / 過眼榮枯本如此 세간에 그 무엇이 모두 그렇지 않으리오 / 世間何物不皆然 온종일 갠 창 아래 향 연기 마주하노니 / 終日晴窓對篆煙 한 봄의 시름겨운 마음이 눈썹 가에 있도다 / 一春愁緖在眉邊 계응은 진작 순채 생각하는 흥취가 있었거니와주D-003 / 季鷹久有思蓴興 원량은 어찌 차조 심을 토지가 없었으리오주D-004 / 元亮那無種秫田 사나운 매야 어찌 바다 제비를 시기하랴만 / 鷹隼豈須猜海嚥 버마재비는 찬 매미를 쫓아 잡거나 말거나 / 螳螂遮莫逐寒蟬 재능 없고 병 많은 것 모두가 가소로우니 / 不才多病俱堪笑 그 누가 양양의 맹호연주D-005을 생각하리오 / 誰憶襄陽孟浩然 이상은 회포를 쓴 것이다. 양류의 연기 뭉게뭉게 봄을 흔들어 대는데 / 靄靄搖春楊柳煙 태양은 숲 밖의 문천 가에 떠 있도다 / 陽浮樹外蚊川邊 삼 년 동안의 봄빛엔 귀밑머리가 희어졌고 / 三年春色白侵鬢 하룻밤의 빗소리엔 온 밭이 푸르러졌네 / 一夜雨聲靑滿田 세상일은 참으로 파초에 덮인 사슴주D-006과 같은데 / 世事眞成覆蕉鹿 생애는 정히 가을을 맞는 매미와 방불하구려 / 生涯政類迎秋蟬 좋은 회포를 백세토록 펼 수가 없으니 / 好懷百歲開不得 언제나 말술을 마시고 바야흐로 탁연해질꼬주D-007 / 斗酒何時方卓然 일만 가호에 연기 나지 않는 게 상심되어라 / 萬戶傷心不起煙 늙은 선비가 무슨 수로 변방을 맑히리오 / 老儒何術可淸邊 한가한 꽃은 미쁨 있어 피어서 이슬 머금고 / 閑花有信開含露 들판의 물은 사람 없이 절로 논에 가득하네 / 野水無人自滿田 전사들은 새 칼집을 닦아 어루만지고 / 戰士拂摩新劍匣 관기들의 옛 전선주D-008은 적막하기만 하구나 / 官娥零落舊鈿蟬 예부터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의 번복이 많았으니 / 從來理亂多翻覆 천심의 일이 혹 그런 건가를 물어보고 싶네 / 欲問天心事豈然 이상은 봄을 감상(感傷)한 것이다. 묵적의 굴뚝은 해마다 검어지지 않아라 / 墨突年年不着煙 반평생을 서쪽 변새와 남쪽 변방서 지내도다 / 半生西塞又南邊 길이 신진을 따르면 무슨 좋은 일이 있으랴 / 長隨新進有何好 고원을 가려고 하나 한 뙈기 밭도 없네그려 / 欲去故園無寸田 왜 이동을 가지고 지마를 가지런히 보며주D-009 / 等把異同齊指馬 어찌 치힐을 가지고 당선을 계교하는고주D-010 / 豈將癡黠較螳蟬 고치실의 머리와 끝을 찾기 어려운 곳에 / 繰絲頭緖難尋處 한밤중에 속으로 탄식하는 걸 누가 알런고 / 誰識中宵默悵然 종남산 빛은 바람과 연기가 아득하여라 / 終南山色杳風煙 대궐 곁에 있는 장안을 한 번 바라보노니 / 一望長安在日邊 역마는 매양 주인 생각에 우는 것이 애처롭고 / 櫪馬每憐鳴戀主 고향 생각은 오직 전원에 돌아갈 꿈만 있다오 / 鄕心唯有夢歸田 일은 마치 백척 간두의 새알처럼 위태롭고 / 事如百尺竿頭卵 사람은 마치 늦가을 나뭇잎 속의 매미 같구나 / 人似三秋葉底蟬 이 인생 요량하느라 인하여 잠 못 이루고 / 料理此生仍不寐 새벽의 호가 소리 속에 쓸쓸히 앉았노라 / 曉笳聲裏坐蕭然 이상은 고향에 돌아가기를 생각한 것이다.
[주 D-001] 현안이 글을 본 것은 병이 있기 때문이요 : 현안은 진(晉) 나라 때 은사(隱士)인 황보밀(皇甫謐)의 호인데, 그는 평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뒤에는 풍질(風疾)까지 얻어 신음하면서도 끝내 책 읽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晉書 卷五十一》 [주 D-002] 동파가 녹을 생각한 건 토지가 없어서였지 : 동파는 소식(蘇軾)의 호인데, 소식의 차운주개조장관견기시(次韻周開祖長官見寄詩)에 “점차 전사를 꾀하면서도 녹봉에 연연하고, 파도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또 물가를 곁하였네[漸謀田舍猶祿 未脫風濤且傍洲].”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十九》 [주 D-003] 계응은 진작 순채 생각하는 흥취가 있었거니와 : 계응은 진(晉) 나라 때 장한(張翰)의 자인데, 그가 낙양(洛陽)에 들어가 벼슬을 하다가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자기 고향 오중(吳中)의 순채국[蓴羹]과 농어회[鱸魚膾]를 생각하면서 “인생은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고는, 즉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갔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九二》 [주 D-004] 원량은 어찌 차조 심을 토지가 없었으리오 : 원량은 도잠(陶潛)의 자이다. 그가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이 되었을 때, 현(縣)의 공전(公田)에다 모두 차조[秫]만 심으라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항상 차조술에 취하기만 한다면 족하겠다.” 하였는데, 처자(妻子)들이 메벼[秔] 심기를 굳이 청하자, 이에 1경(頃) 50묘(畝)에는 차조를 심고, 50묘에는 메벼를 심도록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卷九十四》 [주 D-005] 양양의 맹호연 : 맹호연은 성당(盛唐) 시대의 시인(詩人)인데, 그는 젊어서부터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일찍이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다가, 40세가 넘어서야 장구령(張九齡)의 부름을 받고 형주 종사(荊州從事)가 되었으나, 그후 등창이 나서 신음하다가 죽었다. 《唐書 卷二百三》 [주 D-006] 파초에 덮인 사슴 : 인간의 득실(得失)이 꿈과 같이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옛날 정(鄭) 나라의 한 나무꾼이 사슴을 잡아 파초잎으로 가려 놓았다가 이내 그 장소를 잊어버리고는 이를 꿈이라고 여기어, 옆 사람에게 그 꿈 얘기를 한 결과, 옆 사람이 도리어 그 꿈 얘기를 이용하여 그 사슴을 취해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周穆王》 [주 D-007] 언제나 말술을 마시고 바야흐로 탁연해질꼬 : 탁연은 의기(意氣)가 높아짐을 뜻하는데,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초수는 닷 말 술을 마셔야 바야흐로 탁연해져서, 고상하고 웅걸한 담론이 온 좌중을 경탄게 하네[焦遂五斗方卓然 高談雄辯驚四筵].”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集 卷二》 [주 D-008] 전선 : 부녀자들의 양쪽 빰에 붙이는 매미 모양의 금화(金花)를 가리킨다. [주 D-009] 왜 이동을 가지고 지마를 가지런히 보며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손가락으로써 손가락의 손가락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 손가락 아니 것으로써 손가락의 손가락 아님을 깨우치는 것만 못하고, 말로써 말의 말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 말 아니 것으로써 말이 말 아님을 깨우지는 것만 못하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以馬喩馬之非馬 不苦以非馬喩馬之非馬也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한 데서 온 말로, 즉 천지 만물의 사이에 시비 진위(是非眞僞)의 차별을 두지 말고, 모두 상대적으로 보아서 하나로 귀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 D-010] 어찌 치힐을 가지고 당선을 계교하는고 : 목전(目前)의 이익만 탐하여 후환(後患)을 돌보지 않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즉 매미가 나무 위에서 울고 있을 때, 버마재비는 그 뒤에서 매미 잡을 것만 생각하고 황작(黃雀)이 곁에서 저를 쪼려고 하는 것은 모르며, 황작은 또 버마재비만 쪼려 하고 아래에서 탄환(彈丸)으로 저를 쪼려고 하는 것은 모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說苑 正諫》
(4) 김 접반(金接伴)의 운에 차하다. 의관은 망가지고 귀밑머리 쇠잔하여라 / 衣冠凋落鬢摧殘 그 누가 황당의 참찬관임을 믿어줄꼬 / 誰信黃堂參贊官 가기는 입술을 뒤집어 병졸함을 조롱하고 / 歌妓反脣調病拙 아동들은 손뼉을 치며 가난함을 비웃도다 / 衙童拍手笑酸寒 하늘이 기니 돌아가는 들에 바람이 불다 끊기고 / 天長歸埜風吹斷 집이 머니 편지 전함에 글자가 반은 이지러지네 / 家遠傳書字半漫 장기 물가에 한 번 누워 살 마음이 끊어지니 / 一臥瘴濱生意絶 봄이 오매 모자의 둘레가 헐렁해졌구나 / 春來嬴得帽圍寬 저문 날에 고성에 기대어 슬피 노래를 하니 / 薄晩悲歌倚古城 아득한 세월 속에 나그네 마음 놀래어라 / 歲華迢遞客心驚 동남쪽 끓는 바다엔 고래가 아직 노하는데 / 東南海沸鯨猶怒 서북쪽 황량한 하늘엔 기둥이 기울려 하네 / 西北天荒柱欲傾 이 때 남쪽 정벌도 끝나지 않았는데, 서북쪽에 모두 호변(胡變)이 있으므로 언급한 것이다. 누가 신정에 올라 장한 눈물을 흘리려나주D-001 / 誰向新亭垂壯淚 장차 서검을 가지고 깊은 정이나 의탁하리주D-002 / 且將徐劍托深情 상음의 한 곡조에 한이 무궁하여라 / 商音一曲無窮恨 양보음주D-003 이루고 나니 귀밑머리 반쯤 희었네 / 梁甫吟成鬢半明
[주 D-001] 누가 신정에 올라 장한 눈물을 흘리려나 : 시세(時世)를 근심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일찍이 동진(東晉)의 명사(名士)들이 신정(新亭)에 올라가 연음(宴飮)하면서, 쇠잔한 국운(國運)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던 데서 온 말이다. [주 D-002] 장차 서검을 가지고 깊은 정이나 의탁하리 : 춘추 시대 오(吳) 나라 계찰(季札)이 상국(上國)에 사신 가는 길에서 서(徐) 나라에 들렀을 때, 서 나라 임금이 계찰의 보검(賓劍)을 보고 좋아하면서도 차마 말을 못 하였는데, 계찰은 그의 생각을 알기는 했으나 사신을 가는 길이라 보검을 그에게 선사하지 못하고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서 나라에 들르니, 서 나라 임금은 이미 죽었으므로,그 보검은 그이 묘소의 나무에 걸아 놓아서 일찍이 그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뜻을 편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吳太伯世家》 [주 D-003] 양보음 : 사람이 죽어서 양보산(梁甫山)에 장사 지낼 때에 부르는 만가(挽歌)인데, 제갈량(諸葛亮)이 지었다고 한다
(5) 김 접반(金接伴)이 앞의 운을 누차 사용하여 나를 군색하게 하다. 연소자의 예봉을 꺾고 기세 이미 당당하여 / 年少摧鋒氣已盈 호방함을 가지고 외로운 사람 누르려 하네 / 欲將豪縱壓寒惸 문단에선 내 깃대 먼저 넘어진 게 부끄럽고 / 騷壇愧我旗先仆 시루주D-001에선 군의 북소리 자주 울림을 보겠네 / 詩壘看君鼓屢鳴 오초의 정예한 군사는 천하에 용감한데 / 吳楚銳師天下壯 조후의 견고한 성벽엔 밤중에 경동하도다주D-002 / 條候堅壁夜來驚 지도에서 옥벽 무는 걸 사양치 않을 것이니주D-003 / 不辭道勤銜檗 쾌히 춘풍을 향해 개가를 연주하며 가소서 / 好向春風奏凱行
[주 D-001] 시루 : 시단(詩壇)과 같은 뜻이다. [주 D-002] 오초의 정예한 군사는 천하에 용감한데 / 吳楚銳師天下壯 조후의 견고한 성벽엔 밤중에 경동하도다 : 조후(條侯)는 한(漢) 나라 문제(文帝)ㆍ경제(景帝) 때의 장군 주아부(周亞夫)의 봉호이다. 경제 때에 앞서 제왕(諸王)들로 봉해진 오(吳)ㆍ초(楚)ㆍ조(趙)ㆍ교서(膠西)ㆍ교동(膠東)ㆍ치천(菑川)ㆍ제남(濟南) 등 7개국이 강력한 군대로써 서로 연합하여 모반하자, 주아부가 태위(太尉)로서 명을받고 그들을 정벌하러 나갔는데, 이 때 주아부는 그들에게 먼저 싸움을 걸지 않고 성벽(城壁)을 견고히 하여 지키고만 있던 가운데, 어느 날 밤에 주아부의 군중(軍中)이 경동(驚動)하여 내란(內亂)이 일어났던 데서 온 말이다. 그런데 그 내란은 이내 진정되었고, 끝내 주아부의 군사가 7개국을 크게 격파하여 평정했었다. 《史記卷 五十七》 [주 D-003] 지도에서 옥벽 무는 걸 사양치 않을 것이니 : 항복을 하겠다는 뜻이다. 지도는 진왕(秦王)자영(子嬰)이 백마소거(白馬素車)를 타고 나가서 패공(沛公)에게 항복을 했던 지명이다. 옥벽(玉璧)을 입에 문다는 것은 역시 항복하는 예로서,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여 손을 뒤로 결박하였으므로, 부득이 상대에게 바칠 예물인 옥벽을 입에 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左傳僖公 六年》
(6) 백사집의 몽촌공 시 (2004. 4. 13. 태서(익) 제공) 출전 : 백사집 제1권. 시 오랫동안 월성(月城)에 묵고 있다 보니, 박 부윤(朴府尹)이 나의 고적함을 민망히 여기어 나를 초대하여 시냇가에 가서 고기를 잡았는데, 김 접반(金接伴)이 시로써 그 일을 기록하였으므로, 인하여 그 운에 차하다.
객지에서 달이 아홉 번 둥근 것을 보았더니 / 月魄殊方看九盈 사군이 나를 맞이해 외로움을 씻어주누나 / 使君邀我破孤惸 뗏머리선 살진 고기 잡으니 팔짝팔짝 춤추고 / 楂頭得雋翩翩舞 병혈주D-001에선 사어 올리니 발랄하게 우는도다 / 丙穴登梭撥剌鳴 갈수에는 이미 신통한 잉어가 빠져나가 없으나 / 碣水已無神鯉脫 동진에는 응당 늙은 교룡이 있어 놀라리라 / 東津應有老蛟驚 하인들까지 모두 생선을 배불리 먹었으니 / 飽霑僕隷猶均飫 요리사가 후일에 이번 일을 이야기하겠네 / 饔子他時說此行
[주 D-001] 병혈 : 가어(嘉魚)가 생산된다는 동혈(洞穴)의 이름이다.
3) <국역 국조인물고>에서 김수(金睟) (2004. 5. 15. 윤식(문) 제공) ▲ 출전 : <국역 국조인물고> 제4집 179~184쪽
비명(碑銘). 신흠(申欽) 지음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聖上 인조대왕을 지칭함)께서 난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리고 영묘(靈妙)히 대업을 이어받아 능히 신명과 하늘에 제사하셨다. 그래서 죽은 자를 조위(弔慰)하고 산 자를 문안하며 어두운 것을 밝히고 굽은 것을 바루어 천하와 함께 다시 시작하고 이조(吏曹)를 시켜 고신(故臣) 김수의 벼슬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회복하게 하셨는데, 그 아들 김신립(金信立) 씨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울며 청하기를 “선군자(先君子)께서 폐출(廢黜)되고 삭직(削職)되어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어 묘지가 황폐하였거니와, 불초자는 다행히 억울한 죄를 입고도 죽지 않아서 은혜가 지하에 베풀어져 작위(爵位)와 직질(職秩)이 예전대로 된 것을 볼 수 있었으나, 오히려 선군자의 아름다움이 오랠수록 더욱 잃어 가는데도 손을 빌리지 못하다가 지하(地下)에서 선군자를 뵙게 될세라 두렵게 여겨 이미 비석(碑石)을 갖추었으므로 감히 당신에게 글을 지어 주기를 바라는데, 화를 입고 유리(流離)하느라 보첩(譜牒)이 없어져서 그 대개를 말하지 못하니, 또한 당신이 평소에 알던 것을 서술하여 요약해 주시오.” 하였다.
나 신흠이 일찍이 한 마을에 살아서 공의 평생을 알 수 있거니와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으랴마는, 얼마 안 되어 김신립 씨가 서거하자 김신립 씨의 아들 김개(金祴)가 상복을 입고 와서 거듭 청하니, 나 신흠이 그 아들로 바뀐 것을 슬퍼하며 드디어 그 가장에 의거하여 서술한다.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먼 옛날에 원류와 분파를 갈라서 우리 동방의 귀족이 되었다.
공(公)이 제사를 받든 조상으로 말하면, 고조 김숙연(金淑演)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김희수(金希壽)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으며, 할아버지 김노(金魯)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는데, 대사헌ㆍ첨지중추부사가 다 문학으로 나타나고 필법(筆法)이 대를 이어 아름다웠으므로, 세상에서 <진(晉)나라 때의> 왕희지(王羲之)와 그 아들 왕헌지(王憲之)와 같이 일컬으며, 아버지 김홍도(金弘度)는 사재감 정(司宰監正)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는데 공이 귀히 되었기 때문이다.
의정공(議政公)은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권귀(權貴)를 거슬러 함경도 유배지에서 졸서(卒逝)하니, 사람들이 그 곧바른 것을 아까워하고 그 뒤를 기대하였는데, 공이 과연 만력(萬曆)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서 제3명으로 급제하여 분관(分館)되기 전에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ㆍ저작(著作)에 제수되었다가 예문관으로 돌아와 봉교(奉敎)가 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올랐으며, 호조(戶曹)ㆍ병조(兵曹)에 모두 좌랑(佐郞)으로 조용(調用)되고 정언(正言)에 제수되었으며, 병조로 체차(遞差)되었다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 가을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동지(冬至)를 진하(陳賀)할 때에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에 서용(敍用)되고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 봄에 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에 승진되었으며 여름에 수찬ㆍ교리에 제수되었다.
선조가 공에게 명하여 <십구사략(十九史畧)>을 개수(改修)하고 주단(注斷)을 첨가하여 넣게 하였는데, 그 발문(跋文)이 세상에 유행한다.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에 헌납(獻納)을 거쳐 이조에 들어가 좌랑이 되고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정랑(正郞)이 되었으며, 어사로서 평안도를 무안(撫按)하였는데,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에 공이 변진(邊陣)에서 병이 심하자, 선조가 하교하기를, “김수는 아까운 사람이니 특별히 의약(醫藥)을 보내어 구료(救療)하라.” 하였으니, 대개 특이한 예우이다.
가을에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ㆍ사인(舍人)과 응교(應敎)ㆍ전한(典翰)으로 옮기고 명을 받들어 서로(西路)를 무안하였는데 도중에 직제학(直提學)에 제수되었다.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에 승지(承旨)에 오르고 차례로 올라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정해년(丁亥年 1587년 선조 20년) 가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가 사고로 면직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특별히 경상도 관찰사로 서용되고 임기가 만료하니 명하여 잉임(仍任)하게 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임금이 직접 결정하여 공에게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제수하여 소환하고, 이윽고 대사헌ㆍ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옮겼으며, 가을에 초탁(超卓)하여 병조 판서를 제수하였는데, 공이 해면을 청하니, 형조로 옮기고 특별히 부제학을 제수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 여름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시의(時議)에 배척받은 것이다. 공이 겨우 도계(道界)에 이르러서 왜(倭)가 크게 침입하여 난이 일어났는데, 소홀하던 군사는 여러 번 무너지고 공도 해직되어 돌아와 한성 판윤(漢城判尹)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되고 의정부 우참찬 호조판서 겸 세자 우빈객 지경연사(議政府右參贊戶曹判書兼世子右賓客知經筵事)가 되고,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지중추부사를 사직하였다.
병 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다시 호조판서에 제수되고 겸대(兼帶)도 전과 같았는데, 지춘주관사(知春秋館事)를 더하였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 병 때문에 중추부로 갔다.
경자년(更子年 1600년 선조 33년)에 호조판서가 되고,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에 지중추부사로서 도총관(都摠管)을 겸대하였다가 곧 형조판서(刑曹判書)로 개차되고, 겨울에 우참찬에 제수되었다.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 봄에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 겸 경기관찰사(判中樞府事兼京畿觀察使)에 오르고,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에 임기가 만료되어 중추부로 체차되었다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로 옮겼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에 호조 판서가 되었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숭록대부(崇祿大夫)로 가계(加階)되고,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1년)에 조사(詔使)의 관반(館伴)에 충차(充差)되었으며, 경술년(庚戌年 1610년 광해군 2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에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가계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올랐으나 숙배(肅拜)하기 전에 유고한 정승이 중추부로 옮겨와서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므로 공은 그대로 판중추부사로 있었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공의 손자 김비(金祕)가 역적이 거짓으로 끌어대어 옥에서 죽었으므로 대간(臺諫)이 공을 논핵(論劾)하여 관직을 삭탈하였다. 이때 공은 이미 건망증을 앓아 수년 동안 직무를 폐기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 8월 17일에 졸서(卒逝)하였으며, 이 해 10월 모갑(某甲)에 금천(衿川) 번당리(樊堂里) 간좌(艮坐)인 언덕에 장사하였는데 선대의 묘역에 따른 것이다.
공의 자(字)는 자앙(子昻)이고 호는 몽촌(夢村)이며 정미년(丁未年 1547년 명종 2년) 6월 25일에 태어났고 향년은 69세이다.
부인 성씨(成氏)는 광흥창 수(廣興倉守) 성호문(成好問)의 딸로서 겸손하고 유순한 덕이 있어 집안을 잘 다스렸으며 공보다 몇 해 앞서 작고하였는데, 공과 합장하였으며 나이는 몇 세였다.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며 측실(側室)에서 아들 한 사람을 낳았다. 아들로 맏이 김경립(金敬立)은 호조 좌랑이고 김의립(金義立)은 학생이며 김신립(金信立)은 사헌부 감찰로 승지에 증직되었고 그 다음은 일찍 죽었으며, 김태산(金泰山)은 측실 소생이다.
딸 맏이는 교리 박호(朴箎)에게 출가하고 그 다음은 일찍 죽었다. 김경립은 주부(主簿) 강윤서(姜允緖)의 딸을 아내로 맞아 한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김잉(金礽)이고 딸은 도사(都事) 윤교(尹璬)에게 출가하였다.
김의립은 현령(縣令) 심우성(沈友成)의 딸을 아내로 맞아 한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일찍 죽고 딸은 현감(縣監) 유여성(柳汝惺)에게 출가하였다.
김신립은 판관(判官) 이막(李邈)의 딸을 아내로 맞아 두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아들 맏이 김비(金祕)는 자식이 없고 그 다음 김개(金祴)는 증 직제학(贈直提學) 조수인(趙守寅)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며, 박호는 두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다 일찍 죽고 딸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현(李灦)에게 출가하였다.
윤교는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맏이가 윤창안(尹昌安)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유여성은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맏이가 유진린(柳珍璘)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김개는 두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이현은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맏이가 이성민(李聖敏)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공은 일찍 부모를 잃어서 외가에서 길렀는데, 겨우 이를 갈자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고, 13세에 사우(師友)를 따라 놀았는데 뛰어나게 영리하여 능히 문부(文賦)를 지었으며, 조금 장성하여서는 학문에 뜻을 두고 게을리 하지 않아서 20세에 소과(小科)에 입격하였다.
추류(醜類)를 바르게 처치하여 선비가 다 존경하고 따랐으며, 벼슬길에 올라서는 명망이 컸다. 오래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주대(奏對)가 정확하고 행동에 상도(常度)가 있으며, 임금에게 착한 것을 아뢰어 나쁜 일을 못하게 한 것이 많고 망령되게 말하여 시비를 가리지 않고 남을 따르지 않았다.
법도에 따라 자율(自律)하여 마음을 충신하게 지키고 청검(淸儉)으로 일을 이루어 능히 맡은 것을 처리하였으므로, 지위가 상경(上卿)에 이르러서도 집에 사사로 찾아뵈는 사람이 없었고 곳간에 저축이 없었다. 오직 직무에 부지런하여 관아에 일찍 가서 늦게 물러나오고 풍우(風雨)를 피하지 않았으며, 공무에 물러나오면 남을 만나지 않아 온 집안이 안정(安靜)하였다.
공이 호조판서이었을 때에는 임진왜란을 겪은 뒤이므로 팔도[八路]가 폐허가 되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으며, 명나라 문무 장수와 관리가 10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경상(境上)에서 적과 대진하고 있었는데, 모두 군용으로 재물을 징수하는 법을 써서 군량을 독촉하여 들이고 공은 밤낮으로 관아에서 산가지를 잡고 알맞게 처리하며 갖가지로 애써서 군에서 쓰는 것을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대었으므로, 수십 년 이래로 회계를 맡은 자를 꼽으면 공을 첫째로 친다 한다.
신묘년(辛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홍여순(洪汝淳)이 함정을 놓아 사류(士流)를 몰아내려 하였는데, 공을 끌어들여 위중(威重)하게 하려고 공의 집에 여러 번 갔으나 공이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공도 조정에서 편안하지 못하였는데, 군자들이 이를 칭찬하였으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공이 정승 벼슬을 떠나 전야(田野)에 있을 때에 공의 졸서를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라의 충신을 잃었다.” 하였다. 아! 공의 이행(履行)을 열거할 수 있으나 감히 조금도 꾸며서 묘중(墓中)에 아첨하지 못하는 것은 공을 알기 때문이다. 명(銘)은 이러하다.
성대한 명예와 덕행은 밝아도 나타내지 않으나, 김매고 북돋우어 여물어서 공이 그 창성함을 맞이하였다. 성실한 선비가 부지런히 종사하여 더욱 널리 베푸니, 나가서는 쓰여지고 들어와서는 모범이 되었다. 만년에 이 일을 당하여 공이 어찌 살피지 못하였으랴? 완전한 몸을 부모에게 돌리니 이미 생동(生動)하였다가 정식(靜息)하였다. 삭직되기도 하고 복직(復職)되기도 한 것이 공에게는 손익(損益)이나, 길흉(吉凶)이 서로 바뀌는 것이 세상을 이루는 덕이니, 명정(銘旌)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것은 그 말이 곧바르다.
4) <성소부부고>에서 (2005. 3. 24. 태서(익) 제공) 눌암공과 몽촌공이 한 자리에 출전 : 성소부부고 제22권. 설부 1 說部一 성옹지소록 상 惺翁識小錄上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에 번(番)드는 일은 누구나 괴롭게 여겨 피하려 들지만, 선왕(先王 선조를 가리킴) 때의 승지 성낙(成洛)은 특히 더 번들기를 거절하였고 번을 들더라도 곧 나가버렸다. 당시에 나의 중형(仲兄)과 판원사(判院事) 김수(金?)ㆍ이조 판서 김찬(金瓚)ㆍ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ㆍ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ㆍ좌의정 김응남(金應男)이 함께 옥당에 있었다. 서로 약속하기를, "성(成)이 번에 들거든 정해진 일수대로 하도록 교대해 주지 말자."하였다. <하략>
5) <데라우치문고> 김상용(金尙容)의 선배시첩 속에 정유길의 별장시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선배시첩 속의 시. 鄭惟吉 別章詩(己卯年金子昻赴京時) (紙本墨書. 30.0x26.1cm <先輩詩帖>)
기묘년(1579) 김자앙(金子昻:金 目卒)이 연경에 갈 때의 별장(別章) (己卯年金子昻赴京時別章) 임당(林塘:鄭惟吉)
삼 대 동안 교제하고 백발만 드리운 채 / 三世論交白髮垂 여전히 병든 학은 외로운 가지 지키는데 / 依然病鶴守孤枝 얼음 언 깊은 골짜기 맑아서 볼 만하고 / 氷生絶壑淸堪玩 서리 내린 먼 길 늠름하게 버티네 / 霜滿行鹿凜自持 촛불 사그라지는 오랑캐 여관의 밤 / 官燭消殘蠻館夜 어향(御香) 번져 오문(午門)에 날아올 때 / 御香飄到午門時 마지막 구(句)는 잊어서 적을수 없다. / 惟末句忘不能記云
6)<퇴계전서>에서 출전: 퇴계문인록(退溪門人錄) (1983년 李熙大 編著) (1) 夢村 金睟 (2007. 1. 8. 태영(군) 제공) 이조 宣祖 때의 文臣의 金睟의 字는 子昂이고 호는 夢村이며 본관이 安東이다.
明宗2年 丁未(154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陶山에 내려와 退溪先生 門下에서 수학한 몽촌은 才質이 뛰어나 일찍이 司馬試에 合格한 후 26세 때인 宣祖 6年(1573년) 文科에 급제하여 藝文館 檢閱에 발탁되면서 宦路에 나서게 되었다.
그후 弘文館 修撰, 司諫院 正言과 司諫, 弘文館 直提學, 戶曹參議, 承政院 承旨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후 壬辰倭亂 때에는 慶尙道 觀察使가 되어 招諭使 金鶴峯과 義兵大將 郭再祐의 抗戰을 뒷받침했으나 慶尙道 전역이 왜군에 함락되자 패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다음해(宣祖 26年 癸巳)에 判度支使로 다시 관직에 등용되어 10萬 明나라 援軍의 왜적 격퇴작전을 지원하면서 都摠管을 엮임하였으며 壬亂이 끝난 후에는 戶曹判書에 올랐다가 晩年에는 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나 身病을 이유로 이내 사임 하였다. 十九史略을 개수하여 注를 달기도 한 夢村은 학문에도 뛰어났으며 光海君 7年(1615년)에 서거하니 향년 69세였다. 청렴결백하여 淸白吏錄에 올랐고 사후 昭懿公의 시호가 내렸다.
先生 易簀時 24세의 젊은 선비였지만 先生의 서거를 지극히 애도하며 다은과 같은 祭文을 지어 남겼다.
(2) 祭文 (퇴계선생께 올리는 몽촌공의 제문) (2007. 1. 8. 태영(군) 제공) 산림에 해가 길어 학문을 강한 공이 깊도다, 왼쪽은 그림이요, 오른쪽은 箴인데 오직 날로 바라고 바랐도다. 敬을 지키고 이치를 연구하니, 두 가지에 아무데도 치우치지 않았도다. 정하게 생각하고 힘써 행하기를 해가 다하도록 마지 아니하였도다. 학문의 지경이 이미 깊으니, 밝고 선 곳에 우뚝 높아서 푸른 하늘의 맑음이요, 태산의 喬嶽이었다. 거룩한 시대의 참 선비요, 온 백성의 선각자로서 布帛 같은 글과 菽粟 같은 글씨를 일삼으니 또한 晋魏를 뛰어 넘었도다. 아아! 先生은 世上에 드물게 빼어나서 깊이 기르고 두텁게 쌓아 펴 놓으니 크게 이루었도다. 소문을 듣고 義를 사모하여 찾는 사람이 멀리서 오니, 대접하기는 和로써 하고 가르침에는 게으르지 않아서, 이끌고 타이르고, 가르쳐서 먼저 근본을 세우고 차례가 있어 순수히 나아가니 어둡고 어리석음을 열어 주었도다. 맑고 깊으며 크고 넓으니 사람을 대함이 끝이 없었도다.
(3) 뇌문(誄文) (2007. 1. 8. 태영(군) 제공) 삼가 생각건데 선생께서는 타고 나신 자질이 도(道)에 가까워서 스승의 전수(傳授)를 기다리지 않고도 온오(蘊奧)한 진리를 일찍이 탐구하셨습니다. 자나 깨나 수사(洙泗)에 대한 생각이요 염락(濂洛)을 가슴에 복응(服膺)하여 탁연(卓然)한 그 지취(志趣)가 성현(聖賢)을 배울만 하였습니다. 대본(大本)이 이미 확립하여 넉넉하면 벼슬하거니, 장차 그 배양(培養)한 바를 미루어서 크게 세상에 베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임금이>하고프지 않으니 슬프구나 운이 막힌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그렇다면 거두어 안고 본래의 뜻이나 추구함이 나았습니다. 바라보니 저 낙동강 물이 끝이 없이 흘러가거니, 도(道)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를 버리고 어디로 찾아 가리오. 산림(山林)에 해가 길어 강학(講學)의 공이 깊어서 오른쪽엔 도서(圖書)요 왼쪽엔 잠규(箴規)라, 매일을 하루같이 공경하여 탐구 하였습니다. 경(敬)을 협지(夾持)하고 이(理)를 궁구(窮究)하니, 두 가지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정밀히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깨어있는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니 조예(造詣)가 이미 깊어서 수립한 바가 탁연(卓然)하였습니다. 푸른 하늘에 빛나는 태양이요 높은 태산(泰山)에 우뚝한 교악(喬嶽)이라, 성스러운 시대의 참된 선비요, 하늘 백성의 먼저 깨달은 자였습니다. 포백(布帛)같은 글이 숙속(菽粟)의 맛이라, 여사(餘事)로 하는 문장이 이 또한 진위(晉魏)의 그것을 초월 하였습니다. 훌륭하구나 선생이시여! 간세(間世)의 기품(氣稟)으로 정출(挺出)하여 배양(培養)이 깊고 축적(蓄積)이 두터워서 참으로 크게 이루었습니다. 풍성(風聲)을 듣고 의리를 사모하여 멀리서부터 배우러 찾아오니, 접응(接應)이 화기(和氣)롭고 교회(敎誨)가 여일(如一)하였습니다. 이끌어 가르쳐서 근본을 세워주니 순리에 따라 질서가 있어서 가리워 우매(愚昧)함을 천발(闡發)해 주었습니다. 정밀하고 심오하고 호대(浩大)하고 광박(廣博)하여 매사(每事)의 응대(應對)에 궁함이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아 성학(聖學)이 면면(綿綿)히 이어 오는 한 오리의 털끝과 같았거늘, 선생을 얻어서 비로소 거의 끊어져가던 것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이루고 다시 남을 이루어 주는 것이 이것이 어찌 두 가지의 일이겠습니까? 경전(經傳)을 박흡(博洽)하고 의리(義理)를 천명(闡明)하되 털끝처럼 실올처럼 나누고 쪼개어서 언 것이 녹고 얼음이 풀리듯 하였습니다. 자양(紫陽)의 글에 평생의 공력(功力)을 바쳤으니, 번잡을 덜고 강요(綱要)를 추려서 이를 입도(入道)의 표적(標的)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후인(後人)들이 여기서 얻은 바가 있었으니, 도(道)를 보위(保衛)하여 후세에 전해서 우리 동방(東方)의 유일한 분이 되었습니다. 언덕의 학의 울음이 멀리 울리고 귀인(貴人)의 행차가 깊은 산골로 들어오니, 나아가기 어렵고 물러나기는 쉬워서 소명(召命)이 있으면 문득 사양 하였습니다. 벼슬을 하거나 그만두거나, 조정에 오래 있거나 빨리 떠나거나 함이 모두 의리(義理)와 시기(時期)의 절당(切當)함을 따라서 하였으니 전원(田園)에서 의리를 마치는 것이 그것이 어찌 기필(期必)한 것이었겠습니까? ‘십도(十圖)’의 그림에서 성학(聖學)을 지적하고 ‘육조(六條)’의 상소(上疏)’에서 치리(治理)를 논하였으니, 간절하고 지성스러워서 오르지 생각하는 것은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성인(聖人)의 덕(德)이 중정(中正)하니 그 베품이 응당 넓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하늘이 이리도 인색하여 철인(哲人)을 그만 세상을 떠나게 한단 말입니까? 아 선생이시여! 여기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육신을 따라 도(道)가 또한 멸몰(滅沒)하여 우리의 도가 잘못되는 것입니까? 나라에는 주석(柱石)이 없어지고 세상은 시귀(蓍龜)를 잃었습니다. 선생이 살아계시면 사문(斯文)이 부지(扶持)되고 선생이 가시면 사문이 고단(孤單)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어리석은 소자(小子)가 다행으로 가르침을 받았으니, 지난 해의 첫겨울 초하룻날에 남쪽으로 돌아와서 문간을 쓸고 봄바람이 이는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선생님께서 소경이요 귀먹어리인 자를 열어서 인도 하셨습니다. 반복하여 순순(諄諄)해서 면려(勉勵)함이 깊고 절실했으니 미련하고 우매(愚昧)함이 비록 고질이 되었지만 역시 경중(敬重)하여 법도(法度)로 삼을 줄 알았습니다. 헤어진 지 그 사이에 얼마나 되었습니까? 아직 한달이 채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갑자기 부음(訃音)이 닦치니 가슴을 쓸어 내리며 최절(摧折)하여 통곡(痛哭)합니다.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남아 있는데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안됩니다. 대들보가 무너졌으니 오당(吾黨)이 장차 어디에 의지합니까? 금옥(金玉)같이 정수(精粹)하고 윤택(潤澤)한 모습을 다시는 뵈올 수가 없습니다. 의문이 있은들 누구에게 물어보며 물어본들 누가 대답을 합니까? 끊어진 통서(統緖)가 망망(茫茫)하기만 하니 마음이 어찌 비감(悲感)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변변치 못한 몸이 또한 자유롭지 못하여 달려가 통곡할 길이 없으니 영원히 가시는 길을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남쪽을 바라보며 길이 호곡(號哭)하니 마음만그저 측달(惻怛)할 뿐입니다. 정(情)과 의(義)를 모두 저버렸으니 감한(憾恨)과 참괴(慙愧)가 아울러 몰아 닥칩니다. 천리(千里)에 애사(哀辭)를 봉함(封緘)하여 보내면서 미약한 정성이나마 기탁합니다. <문인 생원 김수(門人 生員 金晬)> 출전: 퇴계전서29권
(4) <퇴계학보에서> (2007. 9. 30. 태영(군) 제공)
「奉次金子昻睟, 和余天淵臺韻」 「삼가 김수가 내가 지은 천연대시의 각운자에 화답한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출전: 퇴계학보 제 118 집
每上江臺獨喟然 / 강가의 높은 곳 오를 때마다 홀로 “아아!” 탄식하였는데, 如今君亦詠天淵 / 지금 그대 또한 천연을 읊조리네. 沂公妙處淳公發 / 기공의 오묘한 곳 백순이 폈으니, 千載誰能續舊編 / 천년이라 뉘라서 옛 글 이을 수 있겠는가? 子思鳶飛魚躍之旨, 明道以爲與必有事焉而勿正之意同, 知此然後知天淵之妙 자사의 “연비어약”의 뜻을 명도는 “반드시 일이 있어야 그렇게 하라고 하지 말라”는 뜻과 같다고 생각 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뒤라야 천연의 묘미를 알게 된다.
1) 김자앙(金子昻): 김수(金睟1547~1615)의 자,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몽촌(夢村)으로 서울에서 살았다. 선조6년(1573)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교리(校理),승지,평안도.경상우도 관찰사,한성판윤,호조판서등을 거쳐 영중추부사까지 올랐다. 문집으로「몽촌집」이 있고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2) 기공(沂公):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공급(孔伋BC483~BC402)을 말함. 송 휘종(徽宗) 숭녕(崇寧) 원년(1102) 기수후(沂水侯)에 봉해졌으며 원 문종(文宗) 지순(至順) 원년(1330)에는 다시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에 봉하여졌으므로 이렇게 부름.
「次子昻精舍曉起聞雞有感韻」 「김수의 정사에서 새벽에 일어나 닭우는 소리를 듣고 느낌이 있어라는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雞鳴喔喔警人聞 / 닭 꼬끼오 울어대어 사람들에게 경계들려 주는데, 舜蹠孶孶事劇雲 / 순임금과 도척 부지런히 하는 일 매우 많았다네. 悟歎獨吟山月下 / 잠 깨어 탄식하며 홀로 산의 달 아래서 읊조리니, 知君善利不迷分 / 그대 선과 의의 분간 미혹되지 않음 알겠네.
1) 계명악악(雞鳴喔喔): “악악”은 닭이 우는 소리를 형용하는 의성어.
2) 순척자자(舜蹠孶孶): 「맹자· 마음을 다함[盡心]상」“닭이 울면 일어나 부지런히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순인금의 무리이다. 닭이 울면 일어나 부지런히 이록을 챙기는 일을 한 사람들은 도척의 무리이다. 순임금과 도척의 차이를 알고자 한다면 다름이 아니라 이익과 선의 사이에 있는 것이다.
이황 [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경상북도 예안(禮安) 출생. 본관 진성(眞城).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이기호발설이 사상의 핵심이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산서원을 설립,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저서에《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聖學十圖·自省錄·朱書記疑·心經釋疑·宋季之明理學通錄·古鏡重磨方·朱子書節要·理學通錄·啓蒙傳疑·經書釋義·喪禮問答·戊辰封事·退溪書節要·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5)<간이집>에서 (2007. 10. 6. 태영(군) 제공) 1) 방백(方伯) 김공(金公) 수(晬) 이 조남명(曺南冥)의 집을 방문하고 지은 시에 차운하다.
시내 따라 떠나는 걸음 더디고 더딘 게 당연하니 / 沿谿莫怪遲遲去 처사께서 당년에 이 집에 거 하셨음이로다. / 處士當年此着家 산고수장(山高水長) 그 풍도 흠모하러 찾았을 뿐 / 山水高長風可挹 학이나 매화를 구태여 보려고 온 것이 아니로세. / 不應在鶴在梅花
조남명(曺南冥): 조식(曺植)의 호가 남명(南冥) 임.
산고수장(山高水長): 영원히 전해질 고결한 인품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임.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에 “구름 낀 산 푸르고 푸르듯, 저 강물 곤곤히 흐르고 흐르듯, 선생의 풍도 역시 산고수장(山高水長)이로세[雲山蒼蒼 江水泱泱 先生之風 山高水長]”라는 말이 나옴.
2) 방백(方伯) 김자앙(金子昻) 수(睟)에게 바치다.
황화의 재주가 노씨보다 앞섬에 / 皇華才調是盧前 새로 지은 두 수의 시어 다시 아름답네 / 兩首新詩語更圓 푸른 바다 동쪽 끝에 와서 객을 전송함에 / 滄海東頭來送客 누 가득한 등 그림자 달과 밝음 다투누나 / 滿樓燈影月爭鮮
사월 초파일날 저녁 동루(東樓)의 전송하는 자리에서 상사(上使) 황송당(黃松堂) 윤길(允吉)이 지은 詩의 韻을 차하여 방백(方伯) 김자앙(金子昻) 수(睟)에게 바치다.
황화(皇華)의 재주: 황화는 본디《시경(詩經)》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인데, 사신으로 가서 시를 짓는 재주를 말한다.
노씨(盧氏): 당 나라 초기의 시인인 노조린(盧照鄰)을 가르 킨다. 당 나라 초기에 왕발(王勃), 양형(梁炯), 노조린, 낙빈왕(洛賓王)을 사걸(四傑)이라 칭하였는데, 양형이 “내가 왕발의 뒤에 있는 것은 부끄럽고 노조린의 앞에 있기는 어렵다.” 하였다.
* 출전: 간이집(簡易集) * 최립 [1539~1612] : 본관 통천(通川). 자 입지(立之). 호 간이(簡易)·동고(東皐). 이이(李珥)의 문인. 1555년(명종 10)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여러 외직(外職)을 거쳐 1577년(선조 10)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 녀왔다. 1581년 재령군수(載寧郡守) 때 기민구제(飢民救濟)에 힘썼으며 1584년 호군(護軍)으로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 1592년 공주목사(公州牧使), 1593년 전주부윤(全州府尹) 등을 지냈다. 1594년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95년 판결사(判決事) 등을 거쳐 형조참판에 이르러 사직, 평양에 은거했다. 국내외에서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시(詩)에 탁월하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고 문장은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뛰어나 차천로(車天輅)의 시, 한호(韓濩)의 글씨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 저서에《간이집(簡易集)》《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십가근체(十家近體)》가 있다.
* 황윤길 [黃允吉, 1536~?] : 본관 장수(長水). 자 길재(吉哉). 호 우송당(友松堂).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3년 정언, 1567년 지평이 되었다. 1585년(선조 18) 황주(黃州)목사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590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접견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장차 일본이 반드시 내침(來侵)할 것이므로 대비하여야 할 것이라고 복명하였다.이때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의 보고와 서로 상반되었으나, 조정은 동인(東人) 세력이 강성하였으므로 서인인 그의 의견을 묵살하였다. 1592년 봄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그의 말을 조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고 전한다.
(6)<학봉집>(鶴峰集)에서 (2009. 9. 3. 은회(익) 제공)
출전 : 학봉집(鶴峯集) 제2권 다시 앞 시의 운을 써서 방백(方伯) 김자앙(金子昻) 수(睟) 에게 바치다.
皇華才調是盧前-황화(주1)의 재주가 노씨(주2)보다 앞섬에 兩首新詩語更圓-새로 지은 두 수의 시어가 다시금 아름답네 滄海東頭來送客-푸른 바다 동쪽 끝에 와서 객을 전송함에 滿樓燈影月爭鮮-누각 가득한 등 그림자 달과 밝음을 다투누나
[주1]황화(皇華)의 재주 : 황화는 본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인데, 사신으로 가서 시를 짓는 재주를 말한다.
[주2]노씨(盧氏) : 당 나라 초기의 시인인 노조린(盧照鄰)을 가리킨다. 당 나라 초기에 왕발(王勃), 양형(梁炯), 노조린, 낙빈왕(洛賓王)을 사걸(四傑)이라 칭하였는데, 양형이 “내가 왕발의 뒤에 있는 것은 부끄럽고 노조린의 앞에 있기는 어렵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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