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렴사공파(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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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설립일시

 2. 사무실 및 연락처

 3. 문중회 소개

 4. 연  혁

 5. 회  칙

 6. 임원명단

 7. 주요 조상님 소개

 8. 세거지별 내력

 9. 파 계 도

10. 교지 소개

11. 여주 지역 묘비 탁본 소개

12. 일실사효 정려

13. 갑인보 경매 입수

14. 병인보 소개

15. 분당 세거지

16. 안사연 여주 판교공 종중 참배기

17. 파종회보

 

본문

p02.png 8. 안렴사공 후손 세거지별 내력

안렴사공 후손의 분파상황

 

오은공의 장자 안렴사 휘侃(간)은 무후이고, 2자 휘仁庇(인비)는 출가하여 입사문하였고, 3자 정랑 휘違(위)는 무후이고, 4자 절도사 휘 (제)는 무남2녀를 두어 1녀는 전의인 이사혜이니 효정공(이정간)의 자부이다. 이씨문에서 5세기를 지낸 지금까지 년향으로 외손 上墓를 행하고 있다. 2녀는 정랑 이훈이다. (본관불명) 5남이신 소윤공 휘 (약)께서는 子지주사공 휘遇周(우주)와 더불어 오은공을 평총으로 모시고 묘하에서 호천명인하기를 마지 아니하다. 별세하여 부자분 역시 평총으로 하게 하였다.

 

지주사공(*우주)의 子 휘丸(환)께서 여주 백양동으로 이거하여 비로소 과시에 응시하여 친시에서 합격되어 사정으로 한림주서를 거쳐 벼슬이 승문원판교에 끝이었다. 그아들 사헌부감찰 휘宗孫(종손)께서 아들 4형제를 두시었으니 장자 군수공 휘城(성)이고, 장자 안원군 휘公亮(공량)이요 그 장자 현감공 휘浣(완)께서는 천안 원이도에 거하시어 후손으로 (01)德坪派(덕평파)라 하고 2자 목사공 휘滌(척)께서는 전라도 나주에 계시어 후손이 (02)光山派(광산파)가 되고 3자 화산군 휘澍(주)께서 여주에 계시었고 후에 음죽 율목 (금 이천지내) 에 거하여 (03)花山君派(화산군파)가 되고 군수공(*성)의 2자 도정공 휘公奭(공석)께서 거여주하여 (04)여州派(여주파)가 되고 3자 목사공 휘公望(공망)께서는 거양주하여 후에 (05)揚州派(양주파)라 칭하고 일운 金浦派(김포파)라고도 한다.

 

감찰공(*종손)의 2자 현령공 휘土+遲(지)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장자 사직공 휘公傑(공걸)의 후손이 괴산문광에 살아서 (06)文光派(문광파)라 하고 2자 승지공 휘公藝(공예)께서는 숙부 신창현감공 휘 (계)에게로 출계하였고 3자 참봉공 휘公彦(공언)께서는 목천 광기에 계시어 후손이 (07)廣基派(광기파) 일파 운 延豊派(연풍파)가 되고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장자 참의공 휘繼賢(계현) 그의 아들 판관공 휘夢瑞(몽서) 후손으로 (08)三山派(삼산파)라 하고 2자 진사공 휘應瑞(응서) 후손으로 (09)北二派(북이파)라 하고 3자 삼함당공 휘河瑞(하서) 후손으로 (10)陽地派(양지파)라 하고 4자 사마공 휘洛瑞(낙서) 2자 민숙공 휘王+言(언) 후손으로 (11)論山派(논산파)라 하고

군자감정공(*공연) 2자 휘繼良(계량)은 무후이고 3자 참의공 휘繼貞(계정) 후손이 (12)靑川派(청천파)가 되고 4자 휘繼雄(계웅) 후손을 (13)庇安松谷派(비안송곡파)라 하고 5자 증참판공 휘繼英(계영) 후손을 (14)盤灘派(반탄파)라고 호칭하고 있다.

 

감찰공(*종손) 3자 신창현감공 휘 (계) 후손으로 (15)梧根陰地派(오근음지파) 신창공파라 하고

4자 무안현감공 휘土+保(보) 장자 휘公達(공달) 후손으로 (16)梧倉塔里派(오창탑리파)로 하고 2자 휘公逸(공일) 후손으로 (17)保寧派(보령파)라 하고

 

지주사공(*우주) 2자 양성현감공 휘吹(취) 후손으로(18)陶山派(도산파)라 하고

3자 휘演(연) 후손으로 (19)內板派(내판파)라 하고

4자 휘石+勵(려) 후손으로 (20)鐵原派(철원파)라 한다.

 

안렴사공(*사렴) 6자 좌랑공 휘湜(식) 장자 직장공 휘自麗(자려) 장자 대구교수공 휘 (극) 후손으로 (21)永同派(영동파)라 하고 2자 휘擲(척)은 무후이고 3자 생원공 휘 (린) 후손으로 (22)鎭川派(진천파)라 하고 4자 휘려(려) 후손으로 (23)黃澗派(황간파)라 하고

좌랑공(*식) 2자 서령공 휘自荊(자형) 후손으로 (24)曾坪派(증평파)라 하여 등?으로 분파가 형성되어 있다.

 

오은 안렴사공 증손 휘丸(환)께서는 상재지향인 오근서 출사하기가 미안해서 여주땅으로 이거하여 과시에 합격하여 승문원 판교에 이르렀고, 그 아들 휘宗孫(종손)께서는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그의 장자 휘城(성) 군수공께서는 여주에 계시고, 2자 휘 (지)께서는 문의현령으로 있다가 퇴임후 오근으로 돌아오시고, 3자 휘 (계)께서는 현 충남 온양 근지인 신창현감으로 있다가 역시 고향 오근으로 돌아오시고 4자 휘土+保(보)께서는 전라도 무안현감으로 충청도 보령으로 이임되시어 보령에서 영주한 일파가 있고 고향인 오창 농소리(탑리)에 돌아와 세거한 일파도 있다.

 

지주사공(*우주) 2자 휘吹(취)께서는 양성현감으로 후손이 오창 도산에 세거하고 있고

3자 휘演(연)께서는 그 후손이 연기 내판에 세거하고

4자 휘石+勵(려)께서는 후손이 철원에 집거하고 있다.

 

안렴사공(*사렴) 6자 휘湜(식)께서는 이조좌랑으로 퇴임후 鎭木(진천-목천)지간에 계시고

장자 휘自麗(자려)께서는 직장이시고 그의 장자 휘 (극)께서는 대구교수로 후손이 영동에 세거하고 2자 휘擲(척)은 절세되고 3자 휘 (린) 생원공 후손은 진천에 仍居(잉거)하고 4자 휘麗+ (려)께서는 현감으로 후손이 황간에 거주하고 5자 휘節(절)께서는 녹사로 무후했다.

좌랑공(*식) 2자 휘自荊(자형)께서는 서령으로 후손이 今증평읍(舊청안현 남면 죽리)에 세거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분파되어 주거 내력을 약기한다. 그리고 후기 미수보에 입보자와 미수록 편보자를 합하면 세대수가 근어 2만 무려 10만명으로 추측된다. 이상은 세전집단을 간추려진 것으로 전국 각지에 산재하여 거주않는 곳이 없다. <고충지, 1982>

 

p05.png 1)덕평파

 

안렴사공 사렴(士廉)의 종손 직계가 되는 안원군파(安原君派)는 옛 지명을 따라 덕평파(德坪派)라 부르기도 하는데, 안원군 공량(公亮)의 조부 휘자가 종손(宗孫)이어서 종손 또는 종손파라 하지 아니하고 사손(嗣孫) 또는 사손파(嗣孫派)라 한다. 소윤공 약( )- 지주사공 우주(遇周)- 판교공 환(丸)- 참의공 종손(宗孫)- 참판공 성(城)- 안원군 공량(公亮)- 진천현감 완(浣)으로 이어지는 사손의 가계로 충남 연기군 소정면 운당리·소정리, 천안시 풍세면 미죽리, 공주시 이인면 신영리 등지에 많은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p05.png 2)여주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城(성)---2자 도정공 휘公奭(공석)께서 여주에 거주하여 그 후손을 여주파라 한다.

공석의 후손 중에는 문과급제 1명(영묵), 생원진사 급제 4명 (윤후, 제현, 호원, 호구), 무과급제 11명 (공석, 수남, 주, 지, 익후, 지후, 담, 덕남, 사창, 숙, 호풍) 이 있으며, 사용은 의병장, 광후는 계해책 영국원종훈, 담은 인조호종 정사공신이다.

조선사마방목을 보면 永默영묵1775-은 1816년(순조16) 문과급제 좌승지를 역임하였고, 允厚윤후1591-는 자 이원(貽遠)으로 1618년(광해10) 생원급제, 悌鉉제현1765-은 자 성지(成之)로 1801년(순조1) 생원급제, 好元호원1796-은 자 범수(範壽) 호 백파(百坡)로, 1819년(순조19) 진사급제하고 문장과 효행이 있었으며, 호원의 동생 好龜호구1798-는 자 하석(夏錫)으로 1831년(순조31) 진사급제하였으며

이외에도 파보를 보면 구는 신령현감을 지내고 증호조참판이며, 石+周주는 방어사를 지냈으며, 光厚광후는 와산현령 계해책 영국원종훈에, 益厚익후는 창원부사를, 德男덕남은 현감을 지냈고, 嗣遠사원은 통덕랑으로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고, 楙무는 호 沂齋기재로 효행이 있어 증교관하였다.

好植호식은 지조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부경사를 역임하고, 嗣慶사경은 판관 증공의이며 묘가 영동 양강면 묘동리에 있으며, 王+業복은 첨지중추부사를, 鶴源학원은 중추원의관 陞통정으로 묘가 연기군 전의면 소정리에 있으며, 達源달원은 사헌부감찰을, 好豊호풍은 관찰부주사를 역임하였고, 思容사용은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원주방면 전사하였고 묘는 홍천군 홍천읍 갈마곡 3구에 있다.

여주파는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 당진군 우강면 대포리, 연기군 전의면 운당리, 영동군 양강면 남전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으며, 사손가계 (사익-연국-흥회-태석1908-광식1936-용후1959)는 여주 흥천 귀백리, 공주군 탄천면 안영리에 세거하고 있으며, 昌會창회1919-는 판교공(=환) 감찰공(=종손) 종회장을 지내는 등 종사에 헌신하였다.

 

p05.png 3)양주김포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城(성)---3자 목사공 휘公望(공망)께서는 양주에 거주하여 후에 ♠揚州派(양주파)라 칭하고 또는 ♠金浦派(김포파)라고도 한다. 양평군 저제면 옥현리, 김포군 대곶면 대릉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안렴사공파세보에 의하면 문과급제 1명(공망), 생원진사 급제 2명(綱강,(愉유), 무과급제 1명(璡진)이 있고, 億礪억려는 호潛齋잠재로 지평불사하고 퇴계문인이며 효자정문이 있으며, 유는 교수를 지내고 병자난에 호종강도하고 척화불복취임하여 효종조에 증가선하고 정문이 있다. 서(삼수변筮)는 장예원사평으로 배위 광주이씨는 이극돈의 증손녀이고, 계(심방변戒)는 사계 김장생의 자 김구령의처부이다

태설(泰卨)은 치안국 경감을, 상묵(象默)1938-은 통정 의금부도사 돈녕도정을, 우묵(宇默) 은 통정 육군정위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사손가계(유묵-재성-봉회1941-태람1971)는 양평군 저제면 옥현리에 세거하고 있으며, 종사에 헌신하고 있는 성회(聖會)1938-는 연기군 전의면 운당리에, 용세(容世)1934-는 김포군 대곶면 대릉리에 세거하고 있다.

현재 대종회에 소장하고 있는 최초의 종보 <1580경진보>는 1975년경 용세(容世)1934- 先考이신 金起源 공께서 대종회에 기증한 것이다.

목사공 휘公望 묘갈명 제막식

2003.4.13 안렴사공파 김포종중에서는 안렴사공 6대손이며 김포종중의 파조이신 목사공 휘公望의 묘갈을 복원하였다.

묘갈은 조선조의 대학자이며 영의정을 지낸 이암 宋寅 선생께서 짓고, 글씨는 차자이신 삼수변伊(이)께서 쓰시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이 없어 항상 후손들이 송구스럽게 생각하던 중 김포종중의 회장 성회와 재무이사 건회 등이 주관하여 국립도서관을 찾아 송인 선생의 문집에서 할아버지의 비문을 발견하고 기쁜 마음에 묘갈을 복원하고 후손들을 위해 국문으로 번역하여 해설판을 묘역 옆에 세웠다.

이날 묘갈 제막식에는 후손 70여명과 안렴사공파 원로 고문이신 오창 재화, 회장 재택, 부회장 재균, 회윤 종친과 전 대종회 부회장 성회 종친이 참석하여 더욱 뜻깊은 제막식이 되었다. 또한 회장 성회는 감격에 복받쳐 번역문을 엄숙하고도 자세하게 읽으면 설명하였다.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79호 (2003년 5월)>

 

p05.png 4)문광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 土+遲(지)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장자 사직공 휘公傑(공걸)의 후손이 괴산문광에 살아서 文光派(문광파)라 하고 공걸의 묘는 괴산읍 수진리에 있으며, 후손들이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 청원군 북일면 덕암리 등지에 주로 세거하고 있다.

생원진사 급제 5명(지, 근, 계선, 영기, 규), 무과급제 1명(두근)이 있고, 영기는 율곡 문인이며, 유적유물로는 김만협,김일 효자각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김태룡1905 송덕비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 이곡초), 김태선1925 공덕비 (괴산군 괴산읍 금산리) 등이 있다.

조선조 사마방목을 보면 김근(金近)1602-는 김성길(金成吉)의 아들로 자 지원(知遠) 괴산(槐山)거주 1657년 진사급제하였고 묘는 괴산 청안 지경리에 있고, 김계선(金繼善)은 현신교위(顯信校尉)충무위(忠武衛)/부사직(副司直) 김공걸(金公傑)의 아들로 자 종효(宗孝) 김제(金堤) 거주 1540년 성균진사급제 하였으며 성균관장의를 지내고 묘는 전북 고부 벌말면 조촌리에 있으며, 김규(金珪)1613-는김영기(金永期)의 아들로 고부(古阜) 거주 1654년 생원급제하였다.

天祥(천상)은 판관 통정대부를, 永期(영기)는 율곡선생에게 사사하고 을축 사마급제하여 가선대부 행동지중추부사 불사하였으며, 聲五(성오)는 가선대부 행동지중추부사 증승정원좌승지하였으며 묘는 금구 초처면 신봉리이다. 斗根(두근)은 갑인무과하고 묘는 문광면 문법리에 있으며, 榮俊(영준)은 돈녕도정을 역임하고 묘는 신기리에 있으며,

聖會(성회)의 아들 泰鯨(태경)은 철학박사이고, 泰日(태일)1926-은 괴산잠업협동조합장을, 泰然(태연)은 충주군수를, 泰璇(태선, 호德岩)1925-은 군수를 역임하고 괴산읍 錦山리에 공덕비가 세워졌으며, 洙會1928-는 금화지구전사하여 묘가 국립묘지에 있으며, 泰麟1920-은 지방의회의원을 지내고 在德(재덕)1933-은 괴산향교장의 충민사장의를 지내고 문광면 대명리에 세거하고 있다. 사손가계 (사묵-재교-인회-태일1942-원식1975)는 청원군 북이면 덕암리에 세거하고 있다.

 

   <사직공문중 묘소 참배기> (2004. 8. 5. 안사연 여름캠프 자료)

 

◆2005. 8. 5. 18:20 양덕공 묘소 - 18:25 사직공 묘소 着         

충북 괴산군 괴산읍 수진리 양덕공(제학공파, 휘 時說) 묘소에 참배한 다음 그 위쪽으로 조금 떨어진 사직공 묘소로 올라갔습니다. 사직공 묘역에는 사직공(휘 공걸)을 비롯해 부사공(휘 계안), 장사랑공(휘 원길) 및 의성김씨 통훈대부 김공의 묘소가 있습니다.                          

△안렴사공 → 5子 소윤공(휘 약) → 子 지주사공(휘 우주) → 1子 판교공(휘 환) → 子 참의공(휘 종손) → 2子 현감공(휘 지) → 1子 사직공(휘 공걸) → 1子 부사공(휘 계안) → 1子 부사공(휘 원길)         

                 

맨 위가 부사공(휘 원길) 묘소로 그 아래에 조부인 사직공(공걸) 묘소가 있으니 역장으로 모신 겁니다. 사직공 묘소(합봉)로 올라가 큰절을 올립니다.                         

▲ 사직공 묘소         

헌관 : 용주         

집례 : 용준         

집사 : 용환         

사직공 묘소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1쌍입니다. 상석은 근래에 새로 만들었습니다. 묘표에는 충무위사직 안동김공 휘공걸지묘, 배 숙부인 순흥안씨 해좌라 적혀 있습니다. 주위에 보라색 도라지꽃이 한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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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 부사공(휘 계안) 묘표에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안동김공 휘계안지묘, 배 숙부인 의성김씨 묘부 해좌라 적혀 있습니다. 봉분은 쌍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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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사공 묘소

헌관 : 주회         

집례 : 용준         

집사 : 용환         

 안렴사공 후손이신 용주, 용준, 용환 3형제분이 부사공 묘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3형제분이 함께 하신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그 형제애가 정말 부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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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사공(휘 계안)의 장인인 의성김씨 묘소로 내려와 참배를 올립니다. 묘표에는 통훈대부 행영해도호부 김공지묘, 숙인 의령남씨지묘라 적혀 있습니다. 쌍분으로 문인석 1쌍이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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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김씨 묘소         

헌관 : 항용         

집례 : 용준         

집사 : 주회         

                  

그 아래쪽에는 의성김씨 통훈대부 김양중이라 적혀 있습니다.    

조금씩 산그늘이 짙어지는 걸 보니 조금 지치기도 합니다. 숨가쁘게 달려온 하루 일정입니다. 느린 걸음으로 정담을 나누며 세덕사로 향합니다.         

세덕사에 도착하니 영환 종친을 비롯해 옥회 종친 및 현지 종친 몇 분께서 귀가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일가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 올립니다.         

 

<문광파 묘역 사진> (2005.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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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전경 전면,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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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직공(휘 공걸)의 묘소. 위에 있는 것이 사직공의 子이신 부사공(휘 계연)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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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공 휘 공걸 문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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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공(휘 계안)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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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공(휘 계안) 묘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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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최초의 묘소인 부사공(휘 계연)의 장인인 의성김씨(영해도호부사) 묘소. 외손봉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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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공(휘 계안)의 장인인 의성김씨 묘비석 및 문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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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공의 묘 위에 있는 쌍분>  (부사공 후손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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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분 묘소 위에 있는 단기의 묘소> (부사공 후손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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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에 있는 장사랑(휘 원길)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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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랑공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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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문중 묘역 맨 아래에 있는 의성김씨(金養中) 묘소>

 

*이 묘소는 바로 이자리 앞에 있던 의성김씨 할머니(참판공 휘 언묵의 배위, 영상공 휘 석의 모친)의 친정 후손 묘소이다. 정부인 의성김씨할머니 묘소는 1994년 경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에 있는 영상공(휘 석)의 묘소 바로 위로 이장하였다. 이 묘소는 정부인 할머니가 이곳에 계실 때부터 계속하여 안동김씨 능촌종중에서 벌초를 해 왔고 정부인 할머니 이장 이후 현재도 안동김씨 능촌종중에서 문중비용으로 계속 벌초하며 관리하고 있다.

 

<안렴사공파 괴산읍 수진리 문광문중 묘역 조사>  (2005. 9. 12. 항용(제) 제공)  

1. 조사 일시  :  1차-2004. 8. 5.    2차-2005. 8. 27.    3차-2005. 9. 6.

2. 조사자  :  김항용

3. 대담자 : 金善會(충북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 거주. 문광파문중회 회장, 괴산종친회 부회장. 1927년생, 79세). (043)833-3679). 일찍이 30대부터 문중 종사에 임함. 장자(태형)는 현재(2005. 6) 괴산고등학교 교장이고, 차자는 괴산군 문광면사무소의 복지계장이며, 삼자는 고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생질은 현 서울대 사범대학장이다.

4. 대담일  : 2005. 9. 6(전화상으로)

5. 대담내용 종합  

 가. 괴산읍 수진리 수진산 묘역에 대하여

   1)최초 묘역이 조성된 시기 : 부사공(휘 계안)의 묘소를 처음 조성한 때인 1589년(몰년)으로 추정

   2)조성 경위

     가)최초 부사공(휘 繼安, 1502-1589. 수88세)의 묘소가 이곳에 모셔지면서부터 문광파 문중 묘역으로 발전하였는데 본래 이곳에는 부사공의 장인인 의성김씨(통훈대부 행영해도호부 김공지묘, 숙인 의령남씨지묘)의 묘소가 먼저 모셔져 있었다. 그런 연유로 부사공이 이곳에 묘소(장인 묘소 위에)를 쓰게 되었던 것이며, 의성김씨는 후사가 없어 지금까지 부사공 후손들이 외손봉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맨 아래에 제학공파 능촌종중에서 벌초하고 있는 의성김씨 金養中의 묘는 상기의 의성김씨 영해도호부사, 안동김씨 제학공파 참판공(휘 彦默)의 배위이신 의성김씨 할머니와 서로 같은 의성김씨이다.

     나)그 후 부사공(휘 계안)의 묘소 맨 위에 장사랑공(將仕郞公, 종9품-휘 元吉. 1529-1594, 수76세)의 묘소와 그 아래에 아무 표시 없는 묘소1, 묘비 없는 쌍분 등 후손들의 묘소가 있는데 결국 모두 역장을 한 셈이 되었다.

     다)원래 사직공(휘 공걸)은 29세(1482-1510)의 나이로 일찍 별세하여 충북 오창에 묘소를 썼다. 이때 아우인 공예(公藝-승지공)가 괴산의 원이 되어 임지로 올 때 아버지를 잃어 갈 곳이 없는 나이 어린 조카인 부사공(계안, 당시 9세)을 함께 괴산으로 데리고 와서 키우고 가르쳤다. 이로 인하여 부사공(계안)의 손들이 괴산 문광면 신기리, 사리면 이곡리, 청원군 북일면 덕암리 등지에 세거하게 된 것이다.

      라)사직공(휘 공걸)의 묘소는 본래 오창에 있었는데 1985년 경 후손들이 이곳 괴산읍 수진리로 이장을 하였다. 그런데 원래 있던 사직공의 아들 부사공(휘 계안)의 묘소 위로 이장하려하니 너무 자리가 좁아 도저히 묘를 쓸 수가 없자 아들인 부사공(휘 계안)과 사돈인 의성김씨 사이로 이장하게 되었다.

    3)가계 : 안렴사공 → 5子 소윤공(휘 약) → 子 지주사공(휘 우주) → 1子 판교공(휘 환) → 子 참의공(휘 종손) → 2子 현감공(휘 지) → 1子 사직공(휘 공걸) → 1子 부사공(휘 계안) → 1子 부사공(휘 원길

 

p05.png 5) 광기·연풍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지)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3자 참봉공 휘公彦(공언)께서는 목천 광기(현 천안 병천 도원리)에 계시어 후손이 廣基派(광기파)라 하고 일파가 있어 延豊派(연풍파)라 이른다.

산 높고 물 맑은 목천(지금의 병천)은 선인들의 얼과 숨결이 살아 숨쉬는 역사와 충절의 고장으로 충신과 명현을 많이 배출했다. 이 고장에 안동김씨 안렴사공의 후손들이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킨 안렴사 梧隱 金士廉의 6대손인 참봉 公彦공으로부터이다.

<안렴사공파세보> 기록을 보면 생원진사 급제 3명(호겸, 사긍, 재홍=주연), 무과급제 2명(옥, 원묵)이 있으며, 공언, 정휴, 학성은 행장이 전한다. 정화와 정좌는 권상하의 문인으로 권상유와 교유하였으며, 상기는 송시열, 곽시징, 김광수 등과 교유하였고, 정좌는 이병연(추사 김정희와 교유)과 교유하였다.

호겸, 사긍은 거사비가 있으며, 상기는 노은정이, 한국과 명연은 호패가 전한다. 현 안동김씨 대종회장인 태인은 고향 천안 병천면 도원리 광터골에 공적비가 있다.

상기의 필적으로 노은정 현판, 노은정 각자가 있으며, 상기(노은정, 도동서원 상량문), 석범(노은정), 지수(노은정), 태경(대록지 노은정기) 등이 시문을 남기고 있다. 상기, 지수, 호겸은 유고가 있다고 하고, <대록지> 편찬에 지수가 참여하였으며, 18명(공언, 세후, 상기, 정화, 명연, 영, 지수, 명함, 정필, 정좌, 정우, 명복, 학수, 정휴, 석태, 석범, 학성, 용묵)의 기록이 전한다.

 

■ 병천 도원리

천안 병천 도원리는 노은(老隱) 김상기(金相器)의 ♠노은정 뿐만 아니라. 도원 김만중의 ♠도원정, 우암 송시열의 ♠삭성대와 ♠도영암, 신독재 김집의 ♠도원동리비, 한강 정구가 처가인 한씨들의 인연으로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던 ♠강당터, 김옥(金 )이 활을 쏘고 무술을 연마하던 ♠사정대 등 여러 유적이 산재되어 있다. 종손댁은 참봉공(휘공언)의 종택으로 약 500여년된 고택으로 현재 종손 永植씨기 거주하고 있는데, 이곳 광터골은 암소가 누워 있는 형국으로 이 종택이 암소 젖을 빠는 위치로 이의 영향으로 이 문중에는 문장과 학자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도원리 종가댁 사진 자료> (2004. 11. 10. 안사연 탐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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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파 종손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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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 고택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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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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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내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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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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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삼부해운 회장, 대종회장(김태인) 부친(휘 珽會) 묘소>

 

p05.png 6)삼산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 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장자 참의공 휘繼賢(계현), 그의 아들 판관공 휘夢瑞(몽서) 후손으로 三山派(삼산파)라 한다.

 

문과급제 1명(진), 생원진사 급제 1명(진), 무과급제 3명(하기, 만기, 석한)이 있으며, 봉채는 우암 송시열을, 재수는 봉암 채지홍을 사사하였다.

 

公衍(공연)은 군자감정을, 繼賢(계현)은 증참의를, 夢瑞(몽서)는 판관을 지내고 묘는 오근삼산이며, 瑨(진)는 진사와 문과급제후 통정부사를, 志卨(지설)은 음사참봉 불취하고 동중추를, 夏器(하기)는 무과급제, 王+眞(신)은 현감을 역임하였다.

 

志亮(지량)의 2자 相器(상기)는 3종부 志奭(지석)에게 입양되었고, 志奭(지석)은 3종부 (삼수변束)(색)에게 입양되었다.

 

晩器(만기)는 무과급제, 鳳彩(봉채)는 호老梧堂(노오당)으로 우암송시열 선생에게, 在洙(재수)는 봉암 채선생에게 사사하였으며, 錫漢(석한)은 정유무과급제하여 첨추를 지냈다.

 

公衍공연의 사손가계(인묵-재경-창회1939)이며, 泰浩1923-는 미원면장을 역임하였으며, 후손들이 오근 삼산, 제천 수산, 영월, 산청, 하동, 청원 옥산, 청원 미원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p05.png 7)북이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 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장자 참의공 휘繼賢(계현), 2자 진사공 휘應瑞(응서) 후손으로 北二派(북이파)라 한다.

 

p05.png 8)양지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 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장자 참의공 휘繼賢(계현), 3자 삼함당공 휘河瑞(하서) 후손으로 陽地派(양지파)라 한다.

생원진사 급제 3명(하서, 대, 연), 문과급제 1명(연), 무과급제 1명(사민)이 있으며, 하서는 격문이, 연은 사륙문, 도학계몽, 예서가, 재광은 이정표 (동아정경연구회, 1991)가 전한다.

河瑞(하서)는 호三緘(삼함)으로 병자사마 급제하고 묘는 오근산소동이며 임진란을 당하여 쓴 격문이 있고, 玳(대)는 계축진사 급제하고, 璉(연)은 호梧洲로 을묘사마, 신유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文詞에 풍부하여 道學啓文을 저술하고 家禮序를 또 찬하여 세상에 전해온다.

士閔(사민)은 정유무과 급제하고 선전을 지냈으며, 鎭衡(진형)은 효우와 덕행으로 이름이 전한다.

在東1931-은 현령공(=지)파종회장을, 在晟(재성)1947- 국립대 서기관 및 시간강사를, 仁默의 배위 은진송씨는 효열로 본향 유림에서 세운 늑비명이 전한다. 在光1921-은 8선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안동김씨대종회 고문을 역임하였고,

在基1937-는 주택은행장, 안동김씨대종회장을 역임하였으며, 在澤1930-은 현재 안렴사공파 종회장으로 在均 등과 함께 종사에 헌신하고 있으며, 在允1935-은 청주교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在福1928-은 면장, 라이온스회장, 대종회이사, 1988무진보편찬, 창오회초대상무, 지주사공파종회장을 역임하는 등 사회활동과 종사에 헌신하였다.

 

■ 양지리(陽地里)

안동김씨재실 : 산수골에 안동김씨 재실이 있다. 이 가운데 산소동에 있는 승정원 동부승지 김공예(1485-1537)의 묘갈은 조선중종34년(1539)에 처음 세웠던 것을 1915년에 다시 세운 것이고

은행정 마을에 있는 송천서원은 본래 옥산면 환희리 송천 마을에 있었던 서원인데, 조선고종8년 (1871)에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7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어 다시 세운 것으로 김사렴 최유경 이정간 박광우 이지충 조강 이대건 이제신 최석정 이인혁 이효석 남구만 박문수 이종성 김여량의 15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 20일에 향사한다.

양지리는 마을 대부분 지역에 안동김씨가 누대로 세거하는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곳 출신으로 김재광(국회부의장, 8선의원), 김재승(충주시교육장, 음성교육장, 청주시교육장), 김재곤(상당초등학교 교장), 김재억(조선비료 총무부차장), 김재욱(도청 경제과장), 김재기(유선방송협회장, 한국주택은행장, 한국외환은행장, 한국민속씨름협회 총재), 김건회(세무사), 김재찬(신협이사장), 김재성(한국교원대학교 도서관 열람과장,군산대학교 도서관 수석과장,충북대학교 도서관 수석과장,경북대학교 도서관 수석과장) 등이 있으며,

 

p05.png 9) 논산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장자 참의공 휘繼賢(계현), 4자 사마공 휘洛瑞(낙서) 2자 민숙공 휘王+言(언) 후손으로 論山派(논산파)라 한다.

생원진사 급제 7명(낙서, 욱, 언, 세보, 세필, 두수, 세익), 문과급제 3명(욱, 언, 세익), 무과급제 2명(세영, 석형)이 있으며, 낙서는 율곡에게 사사하였다. 언은 민숙공에 시호되었으며, 세익은 충렬사 제문(강화도, 김상용 제향)이 전한다.

<김언 정려문>은 1661년 홍명구의 아들 중보의 주선으로 세웠다가, 허적이 정표 환수하였다가, 세보등 3형제 상소로 다시 좌찬성 추증하였다. <김언 묘갈>은 송시열 찬, 김진상 서, 김진규 두전으로 세웠으며, (김진상은 김언의 사위 김익훈의 손자임) <김언 행장>은 김세보 찬이다. <성천부 관기 금옥 정절묘각과 정문>이 성천에 있다고 전하고, <김언과 금옥의 사당>도성천에 있다고 전한다.

致翕(치흡)은 군수 통정 동중추를, 載鉉(재현)은 호拙窩(졸와)이고 아들 宗濩(종호)는 음사 도사 지부령을 지냈고, 龍澤은 호松隱이며, 泰錫(泰植)1936-은 연기군장학재단이사장을 지냈다. 주요 세거지는 전주, 익산, 김제, 공주, 청양, 서산, 아산 등에 널리 세거하고 있다.

 

p05.png 10) 청천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 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3자 참의공 휘繼貞(계정) 후손이 靑川派(청천파)가 된다. 후손들은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 괴산군 청안면 운곡리 등지에 세거하였다.

사마진사 급제 2명(노헌, 사찬)이 있고, 한말 의병으로 사중, 재성이 있는데, 재성은 최익현, 곽한일과 함께 활동했다. '아차'하고 후회한 아차실 전설이 있으며 (괴산 청천 무릉리 아차실, 김계정의 묘), 세달은 재종속 김언(=논산파)을 따라가 공부하였고, 강백년(김응서의 사위)의 연주가 있다.

사진은 시고문집 26권이 있으며, 재만은 대한경행록 수록, 안동김씨 일문사충사적, 고충지 간행에 참여하였고, 장회는 문산관 등록, 문의문화재단지 조성, 문의향교지 발간에 공로가 있으며, 사달은 40여권의 저서와 200여편의 논문과 평론, 수백편의 수필, 100여개의 비문과 현판서, 수백점의 서화를 남겼다. 장회, 재화, 재만, 창회는 종사에 헌신하였다.

무량들(武陵원) 표석 (원도안 앞뜰), 침류정(枕流亭) (동구 밖 가마소 鍾潭 강가, 백곡 김득신의 침류정10영시운), 무릉리 마을유래비 (괴산 청천 무릉리 아차실, 1996), 춘곡 김장회선생 송덕비 (청원 문의 노인회관 앞, 1999)가 전한다.

魯憲(노헌)은 1806년 병인(丙寅)생으로 자는 여주(汝周) 호는 海睡(해수)로 괴산(槐山)에 거주하다 1880년(고종17) 예조(禮曹), 성균관(成均館)에서 증광(增廣) 진사(進士)급제하였고, 思贊(사찬)은 高宗28 增廣進士 급제하였다. 在聲(재성)은 호松齋로 최면암익현, 곽한일과 함께 창의하여 왜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최익현(崔益鉉)

생몰년 1833-1906(순조33-?)

6세 때 입학하여 9세 때 김기현(金琦鉉)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고, 14세 때 벽계(蘗溪)에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격몽요결 擊蒙要訣》·《대학장구 大學章句》·《논어집주 論語集註》 등을 통하여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으며,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곽한일(郭漢一)

1869(고종 6)∼1936. 의병장. 자는 원우(元佑), 호는 장암(壯菴). 충청남도 아산출신.

1896년 전기 의병항쟁기에 안성방면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과 진위대(鎭衛隊)가 합세하여 공격해옴으로써 아산·예산·청양 등지로 잠행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思翊(사익)은 청안문묘직원을, 在華(재화)1914-는 호海,人+農(해농)으로 증평면장, 초대읍장, 대종회이사, 무진세보편찬고문을 지내는등 종사에 헌신하여 오고 있고, 思萬(사만)1919-은 변호사, 판사,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烈會(열회)1934-는 서울대졸, 교통부 안전과장, 마포구 시민국장을, 忠會(충회)1938-는 충대교수를 역임하였다.

在旭(재욱)1913-은 이사관, 정무차관을, 昌會(창회)1943-는 치의학박사, 서울대치의대 교수를, 善會(선회)1954-는 의학박사, 서울의대교수를, 思興(사흥)1936-은 체육부 감사관, 청소년개발원장을, 昌會(창회)1922-는 대종회 이사를, 思重(사중)은 호雲石으로 문묘직원을 지냈고 묘는 청안운곡에 있으며, 조선말 의병활동에 참가하였다.

在晩(재만)1906-은 호西?, 면장, 지방의회의장, 오은공대종회장, 창오회초대회장, 무진보편찬위원장, 대종회이사를 역임하고 대한경행록에 실려 있으며, 저서로 안동김씨일문사충사적, 고충지, 의례巧迪 등이 있다. 아들 恒會(항회)1942-와 悅會(열회)1944-가 있다.

昌會(連會)1924-는 호谷泉으로 대종회이사를 지냈고, 思鎭(사진)은 묘는 청안운곡에 있으며, 시고문집26권이 소장되어 있다.

 

■ 武陵里(무릉리) 마을유래비 建竪(건수)

-贈공조참의 휘★繼貞(계정)의 묘소로 유래돼

지난 1996년 9월 8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에서는 마을 유래비를 건수하였다. 여기 무릉리는 원래 무량이란 동명이었으나 동리 앞뜰에 무릉원이란 표석이 세워져 있었으며 이 고장은 안렴사공의 6대손 군자감 휘★公衍(공연)의 셋째아들 贈공조참의 휘★繼貞(계정)의 묘소가 이곳에 모셔져 있고 이 묘소로 말미암아 아차실의 전설을 낳게 되었다. 이곳에는 여러 성씨가 살고 있지만 그중 우리 안동김문이 주축이 되고 있다. <대종회보 제55호, 1997. 1>

 

◇무릉리 마을유래비

大冶山(대야산) 主龍(주룡)이 힘차게 내려와 닿은 남향 福地(복지)에 한 폭의 洞天(동천)이 배판되었으니 청룡백호가 겹으로 둘러싸고 앞으로 博大川(박대천)이 호수되어 흘러들며 그 뒤로는 落影山(낙영산)이 안산되어 장엄하다.

창송록죽과 기화요초가 어우러지고 산새소리 맑은 물소리 사계절을 노래하여 선경을 이루나니 옛분들은 이곳을 이름하여 武陵(무릉)이라 하였다. 이는 도연명의 도화원기 중에 나오는 별천지 무릉도원과 방불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 무릉도원은 본시 한 마을이었기로 俗音(속음)으로 통털어 [무량]이라 불리웠으니 원도안 앞뜰에 무량들(武陵原)이란 표석이 세워진 것이나 가마소 강가에 세워졌던 枕流亭(침류정)을 일러 무릉에 소재한다고 한 浪城誌(낭성지) 기록을 보면 이를 분명히 뒷받침하게 된다.

그후 청주면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병합에 따라 아차곡, 우동, 내·외산막을 망라하여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로 편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조 선조 때에 贈공조참의 ★김계정의 묘소가 아차실의 전설을 낳고 入葬(입장)하면서 내외촌에 그 姓孫(성손)이 주축을 이루고 또 여러 성씨가 웅거하면서 인심이 순후하고 미풍양속을 지키어 오니 地靈(지령)을 힘입어 역대로 뛰어난 재질이 배출되었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백과가 풍요롭게 결실되며 그 풍미가 또한 유난히 좋은 것이 특색인지라 이같은 민심과 기운이 영원히 발전하여 명실상부한 이상향이 건설되기를 굳게 다짐하고 염원한다.

말미에 붙이거니 동구 밖 가마소(鍾潭)에는 명종때 충청감사 ★黃瑞(황서)가 침류정을 짓고 무릉도원의 절경을 謳歌(구가)하였는데 그후 우리나라의 위대한 학자요 시인인 栢谷 ★金得臣이 읊은 枕流亭10詠詩韻(침류정십영시운)인즉 무량의 10승경개를 노래한 절창인고로 각 절구의 제목만이라도 여기 기록해 남기고져 한다.

아차채미 종담조어 자봉영월 선암락하 화양방은

峨嵯採薇 鍾潭釣魚 子峰迎月 禪巖落霞 華陽訪隱

화동심춘 장림모우 열수조운 평교목마 단교귀승

花洞尋春 長林暮雨 列峀朝雲 平郊牧馬 斷橋歸僧

서기 1996년 9월 일 건비추진위원회 립

 

■ '아차!'하고 후회한 아차실

여기가 이름이 '아차실!'이야. 이름이 다른 동네 이름하고는 달라. 그 내력이 있어. 여기는 안동김씨(安東金氏)들 세거지지(世居之地)야. 그래 안동김씨들이 여기다가 모이를 쓰는데, 한 스님이 지나가면서 하시는 말씀이 "여기는 천하명당이나, 다만 모이자리를 너무 깊게 파지 마시오. 깊이 파면 장남이 죽을 것이오."

그러거든 그런데 아직도 그러지만, 모이자리는 깊게 파잖아? 그래서 안동김씨 그 양반들이 말을 들어야 하는 그만 듣지 않고 깊게 강중을 파는데, 큰 평평한 돌이 나오더라는 거야. 그래서 그 돌을 들어서 올리니 거기서 커다란 학이 날개를 휘저으면서 하늘로 날아가고 금붕어가 있었는데 죽드라네.

그래서 모이를 쓰던 안동김씨가, "아차!" 고 탄식을 했지. 그래서 안동김씨가 아차했다고 해서 아차실이라구 부른데. <청천면 무릉리, 한기동(남,64세)>

 

김인서(金麟瑞)

본관 안동으로 뽑히어 별좌에 이르렀다. <청주시지, 1976>

 

p05.png 11) 비안송곡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 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4자 휘繼雄(계웅) 후손을 庇安松谷派(비안송곡파)라 한다. 후손이 비안 송곡 (현 경북 의성)에 세거하였고, 현재 단양 어상천 방북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繼雄(계웅)은 묘가 예천 동오 두산에 있고, 그의 아들 麗生(여생)은 묘가 비안 송곡에 있으며, 萬鍾(만종)은 수 호군을 지내고, 鼎三(정삼)은 부호군을 지내고 묘는 오두산에 있다.

-----세거지 답사후 보완계획임-----

p05.png 12) 반탄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 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5자 증참판공 휘繼英(계영) 후손을 )盤灘派(반탄파)라 호칭하고 있다. 후손이 반탄 (현재의 진천군 초평면 연곡리 소두머니마을)에 세거하였고, 연기 동면 갈산리에도 세거하고 있다.

繼英(계영)은 묘가 청원 오창 산소동에 있고, 龜瑞(귀서)는 묘가 진천 초평 반탄에 있으며, 志和(지화)는 진사이고, 榮基(영기)1938-는 지도소장을, 榮做(영주)1938-는 육군대위, 국방부 통신과장을, 鎭國(진국)1928-은 호蓮塘(연당)으로 대종회이사, 육군소령, 평통자문위원, 군자감정공(=공연)파종회장 등 종사에 헌신해 왔다.

-----세거지 답사후 보완계획임-----

p05.png 13) 오근음지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3자 신창현감공 휘 (게) 후손으로 梧根陰地派(오근음지파) 신창공파라 한다. 감찰공(종손) 2자 현령공 휘土+遲는 문의현령으로 그 2자 승지공 휘公藝(공예)께서는 숙부 신창현감공 휘 (게)에게로 입양하였다. 후손들이 목령 하사동, 오창 괴정리 입동, 오창 동성리 동성저수지 등지와 진천 상일송리, 이월 노은리 등지에 세거하고있다.

문과급제 2명(공예, 복원), 무과급제 5명(영, 충립, 태영, 호명, 호원)이 있으며, 언희는 임진난에 오창 목령산에서 순절하였고, 사우(=시묵)는 간재 전우 문하이고,

<김공예 묘갈>은 성세창 찬, 김로 서, 정운학 서 개립하였고, <김홍립 만사>는 일사 이공 찬이고, <?김복원 간찰>은 전남도립 옥과미술관 소장하고 있고, <김복원 묘갈>은 전우 찬이며, <김복원 신도비>는 민병승 찬, 서봉 김사달 서이고, <김형집 묘갈>은 김준영 명이고, <김준영 묘갈>은 박노중 찬이며, <김호영 행장>은 김시묵 찬이고, <김필영 행장>은 박노중 찬이며, <김사우=김시묵 묘갈>은 오창 주성리에 있는데 오정환 찬, 김영회 서이다.

<김재신처 청주한씨 효열비>는 노장우 찬, 서봉 김사달 서로 오창면 창리 엄나무랭이 마을에 있으며, <김덕회 효자비> 비는 오창에 있으며, <김성회 송덕비>는 진천 이월면 송림리에 이정운 서로 세웠다.

복원은 ?간찰(전남도립 옥과미술관 소장)이 전하고, 형집은 조삼재체용도, 호영은 찬유행1권 급질의문답, 명회는 각성 비문 찬술 수십편, 사우=시묵는 유고7권(사장2, 성리설문답3, 경증1, 비문1) =용암유고(김세기 서)가 있고, 복원, 형집은 암행어사 김명진 흠찬한 바 있다.

忠立(충립)은 무과급제하여 만호를 지내고 묘 진천동정이며, 彦禧(언희)는 임진난에 목령산에서 왜적을 살해하고 순절하였으며, 호영은 時默찬 행장이 있고, 유행1권 급 질의문답을 찬하였으며, 弼榮(필영)은 호梧村으로 묘는 인곡에 있으며 誌가 전하고 문학으로 이름이 있으며, 외예손 창암 朴魯重찬 행장이 있다. 好俊(호준)은 묘는 인곡에 있으며, 誌자 전하고 효우로 세상이 이름이 있다. 亨道(형도)는 영, 서림(=광기파)와 더불어 남공철에게 안렴사공 신도비명을 부탁하였고,

승지공 사손가계(昇默-在新-斗會-泰一1934-允植1954-容寬1984)는 오창 복현2구에 세거하고 있고, 斗會(두회)는 지방의회의원, 송천서원 간사, 오은공종친회 간사로 종사에 헌신하였고, 泰瑾(태근)1933-은 연세대졸, 국민은행 지점장을 역임하였으며, 相會(상회)1924-는 제일은행지점장을 지내고 , 文詞가 있었으며, 英會(영회)는 호牧菴으로 한말한학자로 문사가 있으며, 용암유고 발이 있다.

泰元(태원)1937-은 기미대동보편찬위원, 오은공세보편찬수단위원 등 종사에 헌신하였으며

潤會(相德)는 호忍齋로 송천서원 이지복설 향유추천 성균전학2대 향교장의6대 역임하는 등 종사와 유림에 헌신하였다. 明會(명회)는 호雙淸으로 문사가 있어 각성비문 찬술 수십편에 이른다.

泰成(태성)1937-은 충북대교수, 이학박사이며, 泰億(태억)1947-은 한국은행, 君會(군회)1936-는 전북체신청장을 역임하였고, 秉默(병묵)은 호悟晩(오만)으로 우애목독하고 선어시율하였다.

在一(재일)1926-은 호梧山으로 농협부장 대종회이사 문영공종회부회장 안렴종회사무국장 송천서원총무 무진보편찬등 종사에 헌신하였고, 청렴결백하였다. 泰助(태조)1941-는 대한항공에 근무

崙會(윤회)1915-는 호陽村으로 진천경찰서장 대종회상임부회장 1968대종회창립 충렬공재실건립 신도비 유허비각 세계연감(*국중도 소장)발간 안동김씨회관 건립등 종사에 헌신하였으며, 아들 泰東(태동)1941-은 미국 에루엘이오사끼 지배인, 泰慶(태경)1953-은 목사이며

永會의 아들 泰周(태주)1944-는 청주대학교에, 泰喆(태철)1947-은 충남대교수, 泰洪(태홍)1950-은 한서식품, 泰晩(태만)1953-은 포항제철에 근무하고 있다.

在識(재식)1922-은 신창공(=게)파종회장, 무진보편찬 등 종사에 헌신하였고, 斗會1925-는 군수를 역임하였다.

 

■ 양청리

현재 양칭이와 回岩마을로 이루어진 양청1리와 時才마을로 이루어진 양청2리로 분구되어 있으며 시재마을은 時才, 耆在, 詩才라 일컬어졌다. 양칭이 마을에는 문화류씨가 많이 살고, 시재 마을에는 안동김씨가 많이 살고 있어 각각 집성촌을 이룬다.

김재봉 법무사, 김윤회 진천경찰서장, 김재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김인회 청원군 산림과장, 김운회 대한항공 파리지부장, 주성여행사, 김영회 청주전매청 주임, 김성묵 오창의용소방대 대장, 김재학 오창농협 부장, 김재창 서울은행 대전지점 차장 등은 이곳 출신이다. <오창지>

김게(金 )

공은 현감 지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신창현감에 이르렀다. 묘 오근목령산이며 상하봉으로 묘갈(후손 참봉 秉默찬 묘갈 在哲서)이 있다. <오창지>

 

 p05.png 14) 오창탑리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넷째아들 휘보(土+保)는 전라도 무안현감으로 충청도 보령으로 이주하여 보령에서 영주한 일파가 있고, 고향인 오창 농소리(탑리)에 돌아와 세거한 일파도 있다. 보의 장자 휘公達(공달) 후손으로 梧倉塔里派(오창탑리파)로 한다.

청원 오창면 기암리 농소, 진천 만승면 회안,금곡, 진천읍 문덕,원동,태락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土+保(보)는 현감 계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무안현감을, 公達(공달)은 현감을, 明源(명원)은 무과급제를, 在熙(재희)1932 -는 향교장의를 지냈다.

--- 세거지 답사후 추후 보완계획임 ---

p05.png 15) 보령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넷째아들 휘보(土+保)는 전라도 무안현감으로 충청도 보령으로 이주하여 보령에서 영주한 일파가 있고, 고향인 오창 농소리(탑리)에 돌아와 세거한 일파도 있다. 보의 2자 휘公逸(공일) 후손으로 保寧派(보령파)라 한다.

보령 청라면 분향동, 임천동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公逸(공일)은 묘 오창 복현리이며, 趾(지)는 묘 보령 대천면 화산리 원내기이며, 復禮(복례)는 경자 무과급제, 尙南(상남)은 무과급제, 聖會(성회)는 무과 급제, 在穆(재목 =榮穆,초명 魯穆)은 전원 1권이 있으며 통정대부이며 묘 논산 노성면 호암리이다. 益會(익회)는 호 信菴(신암)으로 일명 益漢(익한)이며 종사랑 학교교관을 지내다 배일결사 광복단종사하였으며 묘 임천동이다.

--- 세거지 답사후 추후 보완계획임 ---

p05.png 16) 도산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2자 양성현감공 휘吹(취) 후손으로 陶山派(도산파)라 한다.

吹(취)는 양성현감을 지내고 묘 오은공 묘하이며, 鐵孫(철손)은 찰방을 지내고 묘 옥천 동정이며, 墻(장)은 충무위 어해장군을 지내고 묘 상동이며, 均孫(균손)은 사용, 土+叔(숙)은 헌릉참봉을 지내고 묘 마전 화진면 금곡이다.

百鎰(백일)은 장예원 습독을 지내고 묘 옥천 북면 장계리이며, 峻(준)은 영해부사를 지내고 묘 상동이며, 應祥(응상)은 주부를, 涉(섭)은 진무원종공신에, 千鎰(천일)은 진사급제, 大致(대치)는 통정대부이며 묘 옥천 안내 정방리이고, 昱生(욱생)은 군자감정을, 維寬(유관) 은 장예원 판결사를, 務+女善(무선)은 감찰을, 萬鎰(만일)은 부사용으로 묘 오근 목령산이며, 巖(암)은 임란시 지세포만호로 전사하였다. 彰夏(창하)는 임오진사급제하여 묘 도산이다.

亨燾(형도)는 효행이 있었으며 영과 함께 남공철에게 안렴사공 신도비명을 부탁하였고, 榮時(영시)경자생 배1905생으로 ?족보 간행, 贊周(찬주)는 진사급제하였다.

在夏(재하)1922-는 충북가축병원장, 충북종친회장을 역임하고, 海演(해연)1920-은 연기군종치회장을 역임하고, 1997년 <충렬공의후예들> 간행, 1997년 <김흔장군연기대첩비> 건립, 2000년 <연기대첩비> 건립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慶默(경묵)1917-의 아들 思永(사영)은 진천군종친회장을 역임하고 그의 아들 聖演(성연)1948-은 안렴사공 묘역 조경사업에 기여하는 등 종사에 헌신하고 있다.

김창하(金彰夏, 1663- )

공은 안렴사의 10세손이며 찰방 철손의 현손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오창지>

1663년 계묘(癸卯)생으로 자는 덕채(德彩)이며 청주(淸州)에 거주하다 1702년(숙종28) 예조(禮曹), 성균관(成均館)에서 식년(式年) 생원(生員)급제하였는데, 이때 시험관은 김진규(金鎭圭) 행대사성겸홍문제학(行大司成兼弘文提學), 권상유(權尙游)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이었다.

김철손(金鐵孫)

공은 현감 취의 아들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찰방에 이르렀다. <오창지>

김해연(金海演)

海演(해연)1920-은 연기군종치회장을 역임하고, 1995년 <연기대첩연구> 간행, 1997년 <충렬공의후예들> 간행, 1997년 연기군 서면 국촌리 정좌산 아래에 <김흔장군 연기대첩비> 건립, 2000년 연기군 고당저수지 주변에 거대한 <연기대첩비> 건립에 중추적 역할을 다 하였다.

■<연기대첩연구>의 책자 배본에 즈음하여 (1995.3, 김해연)

지난 3년동안 연기대첩에 대하여 연기군의 용역으로 공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연구조사한 결과를 <연기대첩연구> 라는 제목으로 한 책자에 묶어서 여러 종친에게 배분해 드리게 된 점 감사히 생각합니다.

이 대첩에 대해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등 正史에도 나와 있지만 이번 조사연구로 더욱 자상한 점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일뿐 아니라 학자 중에는 大捷이 아니고 勝捷이라는 이도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완전하게 大捷으로 확립되었으니 더욱 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燕岐大捷(연기대첩)에 대해서는 우리문중 족보에도 나타나 있는 바 고려의 상장군이시며 충렬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흔 할아버님으로 700여년 전에 몽고 및 합단적의 수차에 걸친 침공으로 급기야 나라가 위급 지경에 이르러 충렬왕께서는 강화도로 피난길에 있을 때 이곳 연기 正佐山에서 적을 완전 섬멸, 두 번 다시 침공 못하도록 종지부를 찍은 대첩의 구국명장 이었음에도 8.15해방후 우리나라 역사에 7대 대첩이 분명한데 6대 대첩만을 국사에 편찬 학교역사 교육에 시행하였고 정부에서는 大捷地마다 성역화해서 구국충절을 다한 용장들에게 빛난 얼을 천추만대 받들게 하고 있으면서도 유독 연기대첩은 삭제되어 그 날의 빛을 잃고 금일에 이르렀다 함은 우리들 온 후손된 자의 성의 부족과 한 시대의 인물고갈이라는 점에서 개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천우신조로 지난 93년에 만시지탄은 있으나 우리군 종친회에서 이 사실을 알고 온 종친이 성과 열을 한데 모아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을 만 천하에 밝히고자 노력해 온 결과가 책자로 발간되며 국내 요처에는 물론이고 우리 문중 가가호호마다 보물 가보로 모시게 된 점 감개무량하게 생각됩니다.

이는 오로지 여러 종친들의 물심양면의 끊임없는 협조의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드리는 바이오니 배분에 유루 없으시기 바라옵니다.

1995년 3월

안동김씨 연기군종친회장 해연 배상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5, 김해연)

발간사

역사란 후대에 교훈을 줄 수 있을 때 그 가치가 인정되고 소중한 것이지, 후대에 아무런 교훈을 주지 못한다면 이는 나무렇게나 낙서한 雜記에 불과한 것이리라. 무릇 국가에는 國史가 있고, 가문에는 宗史가 있고, 개인에게는 一生史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 안동김문 특히 연기지역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선조님들께서 어떤 이유, 어떤 경로를 따라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우리 선조님들의 삶의 발자취는 어떠했으며 그 후손인 우리는 선조님들의 거룩하고 숭고한 뜻을 얼마나 소중하게 계승 발전시켜 왔는지를 조명해 보고 종친 모두가 반성할 부분과 더욱 승상할 부분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같이 공유하고, 고민해 보고자 이 소책자를 발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연기지역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종친 모두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선조중의 한 분인 충렬공 할아버지의 둘째 자제분인 흔자 할아버지께서는 고려말 장군으로서 원나라 합단적이 압록강을 건너 침범하여 연기지역까지 침노했을 때 지금의 서면소재 정좌산 대첩에서 섬멸함으로써 나라에 큰 공을 세우신 사실이 <고려사열전>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로부터 7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역사 속에 사장된 채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만시지탄은 있으나 연기군 문화원장, 연기군 노인회장등 지역에 뜻있는 분을 비롯한 종인 모두가 인식을 같이 한 바탕 위에서 학계와 관계 요로에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고, 30여년 전 사학자인 재붕 종친이 연기군지에 발표한 논문과 <고려사> 정사를 근거로 1993년 공주대학교 역사학자 이해준, 윤용혁 교수 등에게 역사적 기록과 현장조사 등을 통한 객관적인 연구를 의뢰하였고 이미 여러 종친께서 소장하고 계신 <연기대첩 연구>라는 논문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각고의 노력으로 이제 국가예산을 할당받아 흔자 할아버지의 대첩지를 성역화하는 기초 작업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또 우리 안동김문은 충렬공의 후예들로 충렬공 12대손인 진천공(=김완) 할아버지께서 소정면 운당리에,

충렬공 현손인 전서공(=김성목) 할아버지께서 전의면 양곡리에,

충렬공 11대손인 진사공(=김함) 할아버지께서 금남면 봉기리에,

충렬공 14대손인 용양위부호군(=?) 할아버지께서 금남면 달전리에 각각 낙향, 정착하신 이래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지금은 조치원을 비롯한 전의면, 소정면, 동면, 금남면 등지에 대단위 집성촌을 이루고 살게 되었던바, 이와 같은 사실이 흔자 할아버지의 대첩지라는 이유가 정착의 큰 동기가 되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에 우리 연기군 종친회에서는 이러한 사실과 종친들이 삶의 발자취를 모으기 위하여 공주대학교 사학과 이해준 교수에게 사적 고증과 사실 기록의 정리를 부탁하였고, 마침내 그 결과가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이라는 연기지역 宗史로 발간되게 되었다.

이 책을 펴내기까지, 4년여 기간동안 수백년 동안이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료와 유적지 그리고 유물 등을 찾아 조사 분석하고 고증을 통해 연구해 주신 이해준 교수와 그 자료조사, 정리를 도와준 학생제군께 연기지역 종친 모두는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 연기대첩 연구를 시작한 이래 오늘까지 자신의 일처럼 성과 열을 다해 주신 연기군 문화원장 장영 선생, 연기군 노인회장 이상은 선생과 임영수 박물관장에게도 감사드리는 바이다. 특히 전서공파 在山 종인은 이 책자를 편집하는데 소요된 재원 500만원을 흔쾌히 부담하면서 전국에 거주하는 전서공 후손에게는 한 분도 빠짐없이 배부토록 요청한 바 있어 더욱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전서공 제종친들께서는 재산 종인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해주기 바란다.

한편 이 결실을 맺기까지 개인적 일들을 물리치고 물심양면으로 헌신한 연기지역 종친회 총무 은회 종친을 비롯한 각지역 이사님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이 지면을 통하여 우리 종친 모두에게 호소하고자 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선조님들의 숭고하고 거룩한 얼과 정신을 이어받아 숭조사상과 그 위업을 계승발전 시키는 데 배전의 노력과 정성이 모아지기를 간곡하게 당부드리는 바이다. 우리 안동김문은 예부터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크고 작은 많은 일을 하셨고 충신의 가문이었음을 다시한번 생각하면서 우리의 자긍심을 더욱 고양시켜 나가기 위해 모처럼 단합된 우리 종친간의 우애와 협력 정신이 자자손손에 길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종친제위에 간곡하게 호소해 두고자 한다.

이 조그만 사업이 우리 종친 모두의 자긍심을 고양시키고 종친의 소중함을 크게 발현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단합하는 계기기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1997. 5

안동김씨 연기군종친회 회장 김해연 배

p05.png 17) 내판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3자 휘演(연)---진사공 致孫(치손)---진사공 土+函(함)으로 이어지는 계열로 통칭 內板派(내판파)라 한다.

演(연)은 묘 오근 일신리 실전하여 연기 금남 봉기리 설단하였으며, 致孫(치손)은 진사로 묘 상동이며, 謹祖(근조)는 선략장군으로 묘 봉기리 이성동이며, 重蘭(중란)은 묘 둔대이며, 球祖(구조)는 생원 선략장군으로 묘 공주 명탄면 봉기동방축이며, 德正(덕정)은 선무랑 이인도찰방으로 묘갈(8대손 재붕근찬, 재황근서)이 있으며, 賢秀(현수)는 무과 봉사로 묘는 실전이다.

 

이 내판파에서는 有載의 가계에서 光會의 아들인 泰龍이 국회의원으로 민주당 대변인을 역임하였고, 有復의 가계에서는 貞默의 아들인 在德이 국세청장, 앞에 소개한 열녀정문을 받은 金基喆(처 밀양손씨)- 金榮聖(처 창령성씨)- 金光默으로 이어진 가계에서는 光默의 아들인 在鳳이 면의회의장을 역임하였고, 그 동생인 在鵬은 향토사 연구에 평생을 바쳐 충남도 문화상과 한국일보가 수여하는 향토문화상의 영예를 얻었다.

在鳳의 아들 演會는 한국도로공사 지사장, 埈會는 경제학박사로 대학교수, 晉默의 아들 在寅은 중고교 교장을 역임한 뒤 안렴사공파 대종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현재 연기부군수인 在高도 이 가계이며, 在國의 자 元會는 충청은행 지점장을 역임하고 있다. 내판 수정골에 사는 재고 역시 종사일에 남다른 정성을 보태고 있다.

 

말파인 봉기파는 셋째아들인 王+奇祖의 후손들인데 재석 재덕이 봉기파의 종사일을 도맡아 수고하고 있다.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연기군종친회>

 

후세의 아들 有載(유재) 묘갈(재붕근찬, 국회의원태룡근서), 둘째아들 有復(유복) 묘갈(★송의섭찬, ★이석영서), 鍾禧(종희) 묘갈(재승근찬, 낙회근서), 榮時(영시) 묘갈(★변영인찬, 후손재연서)이 있으며 ?1914 갑인보 간행에 참여하였다.

基喆(기철)의 배밀양손씨는 효열로 정려되었고, 榮聖(영성)의 배창녕성씨도 효열로 정려되어 정려誌(★조진만찬, ★장태섭서)가 전한다. 鍾哲(종철)은 묘갈(★송의섭찬, ★이석영서)이 있으며, 榮濬(영준)은 관찰부주사, 歷중학교교관으로 천품순수 독행효우하였다. 基周(기주)는 묘갈(★변영인찬, 日+火默서)이 있다.  사손가계(인묵-재복-만회-태열1946-정식1972)는 연기 금남면 영대에 세거하였으며, 光會(광회)는 묘갈(족숙 梧下재붕찬, 불초자태룡서)이 연기 동면 내판리에 있다.

泰龍(태룡)1933-은 12대국회의원 민주당대변인을, 永默(영묵)은 가선대부 중추원의관을, 星會(성회)1917-는 충렬공재실영건추진에 참여하였고, 在憲(재헌)은 중추원의관을, 在德(재덕)1915-은 호無下로 국세청차장 대종회초대부회장을 역임하고 자손들이 미국 라성에 거주하고 있다.

후손들이 충남 연기군 근남면 봉기리 일원과 연기군 동면 내판리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

 

김재붕(金在鵬, 1922- )

14대조 진사공 김함 묘비 서, 유재묘갈, 광회묘갈 찬, 1991년 양세열녀 정려문 뒤에 수성대를 건립하는 등 종사에 헌신하였고, 연기지역 향토사학자로서 1960년대 연기군지에 연기대첩에 관한 논문 발표, 1994년 <연기대첩연구> 간행시 역사적 고증과 관련한 여러 의견을 제시, 2000년 연기군 고당저수지 인근 <연기대첩비> 건립시 연기향토사연구소 고문으로 사실고증 하는등 김흔장군의 연기대첩 연구 및 대첩비 건립에 (안렴)해연, (전서)재산, (익원)은회 등과 헌신하였다.

◇ 在鵬씨 충청남도 문화상 수상, 95년도에는 연기군민대상 수상

안렴사공 19대손인 在鵬씨께서는 지난 1996년도 충청남도 문화상 수상자 선정에서 학술부문에 선정되어 1996년 12월 2일 충남도청 대회의실에서 수상식을 가졌는데 많은 유명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제40회충청남도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또 96년 12월 7일에는 서울신문사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부에서 후원한 향토문화대상 전통문화 부문에 선정되어 수상하였으며, 95년도에는 지역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이 커 연기군민대상을 받은 사실도 있다. 이 분의 약력과 공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약력

1922년 8월 9일생

1943년 3월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45년 11월 조치원 공립고등여학교 교사

1947년 4월 대전공립공업중학교 교사

1989년 9월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 전문위원

1990년 3월 ∼현재 연기군 향토유적보호위원회 위원

1993년 1월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공적개요

30여 년간을 향리에 묻혀 오직 민족사와 향토사 연구에 전념하여 오면서 광개토대왕의 비문연구 및 신라, 고구려, 일본에 끼친 백제사 연구와 연기향토사 연구논문 등 40여편을 발표하여 민족사관의 주체성 확립과 향토사 정립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며,

노령에도 불구하고 충남도 문화재 전문위원, 연기군 향토사 연구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왕성한 연구활동으로 후학의 귀감이 됨 <대종회보 제55호, 1997년 1월>

 

p05.png 18) 철원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4자 휘石+勵(려) 후손으로 鐵原派(철원파)라 한다.

礪(려)는 통정대부 행사헌부지평으로 묘 마전 화진면 금곡이며, 迪(적)은 통훈대부 행상원군수로 묘 화진면 중거동이며, 土+叔(숙)은 헌릉참봉으로 묘 마전 화진면 금곡이며,

壽祥(수상)은 보조공신으로 화담 서경덕 선생을 사사하여 절의를 지켜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淡(담)은 호樂齋 장락정으로 묘 마전이며 임란창의하여 고금도에서 곽재우와 더불어 왜병을 무찌르다 전사하였다. 孝明(효명)은 동지중추를, 成大(성대)는 음통사랑 의금부도사를, 世胄(세주)는 통훈대부 사헌부감찰으로 묘 연천군 군내면이며, 鳳漢(봉한)은 무과 변사 낭청을 지냈다.

사손가계(봉한-재헌-건회-태익)은 강동구 천호3동에 세거하고 있다.

 

♠서경덕(徐敬德) 1489-1546(성종20-명종1)

부위(副尉) 호번(好蕃)의 아들이며 모계는 실전(失傳)이다. 어머니가 공자(孔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그를 낳았다 한다. 나이 7∼8세에 이르자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른의 말을 공경히 받들었다.

1544년 ★김안국(金安國) 등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러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다.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중종과 인종이 죽자 “임금의 상(喪)에 어찌 복(服)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자최삼월(齊衰三月)의 복을 입었다. 황진이(黃眞伊)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朴淵瀑布)·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

 

p05.png 19)영동파

안렴사공(사렴)---안렴사공 6자 좌랑공 휘湜(식) 장자 직장공 휘自麗(자려)---장자 대구교수공 휘 (극) 후손으로 永同派(영동파)라 한다. 안렴사공(*사 렴) 6자 휘湜(식)께서는 이조좌랑으로 퇴임후 鎭木(진천-목천)지간에 계시고 장자 휘自麗(자려)께서는 직장이시고 그의 장자 휘 (극)께서는 대구교수로 후손이 영동에 세거하고 있다.

 

泰玉(태옥)은 대구시 서구에 세거하고 있고, 元會(대구시 북구)의 아들 태화 태근 태우 태정이 있고, 貞會(정회)는 연화동에서 황간향교 전교를 지내고 종사에 헌신하고 있으며 在禮 (재례)는 안양시 안양동에 세거하면서 국회의원 입후보하였고, 國寶(국보)는 대종회 이사를 역임하는 등 종사에 헌신하였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우천리 연화동은 안렴사공 14세손 휘致玉(1742-1827) 선조께서 창설한 마을로 마을 입구에 우천리 유래비(1992)와 마을 안에 안동김씨 재실인 영모재와 그 옆에 안동김공휘치옥추모비(1975)가 건립되어 있다.

 

영동 황간 우천리 유래비 (1992)

이곳 소내마을 형성은 1592년 충주박씨 之(火+允)이 매곡에서 옮겨 이곳에 우거진 다래나무를 제거하고 움막을 짓고 거주한 것이 시초라고 전하여 오고 있으며 소내라 부르게 된 동기는 부락을 수호하는 큰 괴목 두 그루와 선돌 세 개가 있는데 그 나무는 수령 500년가량 되었고 선돌은 남 서 북 방향에 서있어 돌 사이는 약 1KM로 삼각을 이루었고 세 개의 선돌안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소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연화동 마을형성은 1790년 구안동김씨 致玉이 구미에서 蓮花谷 입구에 先考를 안장하고 3년간 시묘를 하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호랑이가 와서 같이 지켜주어 그 고마운 뜻으로 정주케 된 것이 시초이며 연화동이라 부르게 된 동기는 마을 뒷산 생김새가 연꽃이 물 위에 떠있는 모양과 같다 하여 연화동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1895년에 황간현이 황간군으로 개편되어 황간군 서면 우천리라 불리오 오다가 1897년에 황간군이 영동군에 합병되면서 영동군 황간면 우천리라는 행정부락명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牛川里는 동으로 月留峯 남으로 老斤 서로는 回浦(포) 북으로는 慢( 머리)草坪洑(보)가 있고 1972년 경지정리와 1974년 전기를 가설하고 朴鐵基는 76-81년동안 주민들과 힘을 모아 차도로 만드는데 앞장섰다. 1985년 통신시설 개통과 굴곡이 심했던 농로를 1992년에 소득원 도로로 지정 확포장되었다.

6.25 사변때 소내 뒷산은 아군과 유엔군 앞산은 적군 주야 13일간 혈전 격전지였다. 소내 2집 연화동 21집 불에 타고 참전용사 金景會와 盧炳祥은 00지역에서 전사하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항상 잊지 말고 서로 돕고 평화로운 조국의 내일을 위하여 앞장서야 할 것이다.

우천리 성씨를 살펴보면 진주강씨, 안동김씨, 광산노씨, 여흥민씨, 밀양박씨, 충주박씨, 순천박씨, 밀양손씨, 동복오씨, 성주이씨, 전주이씨, 연안전씨등 모여살며 老斤-回浦간 좁은 길 차도로 만들자고 동민 호당 5만원씩 부담하고 <중략>

서기 1992년 12월 일 우천리 주민일동 고향을 도우신 분들 안양 김재희, 김재례, 김철회, 김웅회 대구 김봉준 김창회 김봉회 김장회 서울 김국보 대전 김일회 유래비 찬조자 명단 마을주민 명단

 

p05.png 20) 진천파

안렴사공(사렴)---안렴사공 6자 좌랑공 휘湜(식) 장자 직장공 휘自麗(자려)---2자 생원 김린 후손으로 鎭川派(진천파)라 한다, 안렴사공(*사렴) 6자 휘湜(식)께서는 이조좌랑으로 퇴임후 鎭木(진천-목천)지간에 계시고 장자 휘自麗(자려)께서는 직장이시고 그의 2자 휘린께서 생원 진천현감을 지내시고 진천읍 장관리에 래주하여 후손이 사석리, 장관리, 건송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孝俊(효준)은 무과장원을, 榮照(영조)는 진천종친회장을, 榮萬(영만)은 종사에 헌신, 奉會(慶會)는 현 진천군수를, 相會(상회)는 보건소장을 역임하고, 良默(良男)은 변호사를, 容默(용묵)1922- 부장검사 변호사를 역임하고, 在連(재련)1944-은 대학교수, 在德(재덕)1955-은 과기연연구관을 지냈으며, 善默(선묵)은 6.26전사 동작동국립묘지에 묘가 있으며, 權會(권회)1964-는 변호사, 用默(용묵)은 종사에 헌신하였으며 그 아들 在鴻(재홍)은 1998년 일송정유래비를 서하는 등 仁默(인묵, 세무서 총무과장), 柱會(주회)1965-와 함께 종사에 헌신하고 있다.

 

◇안동김씨

이 지방에는 제학공파, 안렴사공파, 익원공파, 정의공파, 개성윤공파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그중 안렴사공파 후예가 대부분이다.

이에 래주한 연대순으로 기록하자면 고려조의 충신 안렴사 휘사렴의 증손 감찰 휘린이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로 래주하여 사백여년 그 자손이 세거한 이래 많은 충효가 계출하여 번연하고 있다.<상산인맥지>

 

진천현감을 지내신 선조님 세분

(안렴사공파) 린은 문종조(1450-1451) 생원급제하여 진천현감을 역임하시고 진천에 터를 닦으신 진천 입향조이다.

(문온공파) 자균은 명리의 아들 맹헌, 중서, 계우 3형제중 막내 계우의 아들이다. 맹헌은 1426년에 식년시(式年試) 同進士1, 계우는 1436년에 친시(親試) 同進士1로 급제하였다.

(안렴사공파) 완은 공량(公亮, 1472∼1544)의 아들이고, 화산군 우암 주(澍, 1512∼1563)의 백형이고, 충남(忠男, 1530∼1618)의 부친이다.

(안렴사공파) 사긍(思兢)은 1874년(高宗11) 增廣 進士급제하였으며, 회인현감을 지내고 거사비가 전해오며 끝으로 진천현감을 지냈다. 묘는 갈치에 있다.

---김사렴-김 식-김자려-김 린

---김구용-김명리-김계우-김자균

---김사렴-김약-김우주-김환-김종손-김성-김공량-김완

---김사렴-김 약-김우주-김 환-김종손

---김 지-김공연-김훈-김효길-김옥-김세후-김정화

---김한국-김명연-김 영-김지수-김호열-김사긍

 

金尙立(김상립)

린의 후손 안동인이라. 인묘조(1623-1649)에 무과에 올라 정묘호란(1626)에 충절을 지켜 죽다. <상산인맥지> <상산문화>

金克商(김극상)

안동인 안렴사 사렴의 10세손으로 린의 후손이다. 숙종조(1675-1720) 강희병진(1676, 숙종2)에 무과에 올라 부장을 지냈다. <상산인맥지> <상산문화>

金世章(김세장)

린의 후손, 안동인이라, 숙종조(1675-1720) 무과급제하였다. <상산인맥지> <상산문화>

김경익,김경직 (金景益, 金景稷)과 누이 임황(任滉)의 처

경익과 기제 경직, 기매 임황지처 3남매는 린의 후손이다. 본관은 안동이다. 이 3남매는 어머니가 병환에 손가락의 피를 드려서 소생하게 하였으며, 어머니가 종기로 고생하고 있을 때 경직 내외가 입으로 빨아서 낫게 하였다.

營門에서 3남매의 지극한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김경익 등이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을 三孝里라 명명하였다. 3남매가 모두 鄕薦을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그들의 효성을 칭찬한다. <진천군지, 1994> <상산인맥지>

김상환 (金相煥)

효자로 본관은 안동, 안렴사 김사렴의 13대손, 린의 7세손이다.

부모의 병환에 변을 맛보며, 단지수혈로 극진히 섬긴 효자로 營邑에 여러번 알렸다. <상산지> <진천군지, 1994> <상산인맥지>

김기선 (金基先)

본관은 안동이며 김사렴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어머니가 80세로 실명하였는데 앉을 수 있는 수레를 만들어 매일 어머니를 태워 모시고 다녔다. 또 천신에 기도하며 빌어서 오래도록 살았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여모를 살았다. 성묘할 때마다 많은 절을 하여 무릎이 닿는 곳에 상처가 생겼다. 군내 유림들이 글을 올리어 감사의 표창을 받았다. <진천군지, 1994> <상산인맥지>

金榮國 (? - 1951)

군인, 본관은 안동, 金圭源의 장남으로 진천읍 사석리에서 태어났다. 1950년 6.25에 참전하고 1951년 중대장(중위)으로 금화지구 734고지를 사수하다 전사, 대위로 추서되고 미국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진천군지, 1994>

 

◇ 군신 金榮國 대위

---진천읍 사석리 여사부락 뒷산

6.25때 금화지구 734고지 탈환의 신화를 남긴 군신 김영국 대위의 자랄 때의 모습이다. 김영국 대위는 진천읍 사석리 723번지에서 안동김씨 김규원의 6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1년 6월 6일 김영국 중위의 탁월한 작전능력과 용맹이 인정되어 금화고지 전투에 나가게 되었다. 금화지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734고지는 일명 김일성 고지라고도 하는데 탈환하는 편에서 작전상 매우 유리하기 때문에 우리 국군이나 북괴군이 서로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고 하는 곳이다.

이곳에 70명의 소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700여명의 북괴군을 섬멸하였던 것은 김영국 중위의 용감하고 지혜로운 작전 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국군은 3개사단 이상이 사용할 수 있는 군수물자와 무기를 노획하였던 것이다.

그후 김대위는 한국군 창설이래 최고의 무훈을 세우고, 미국 대통령이 보내온 영예의 은성훈장을, 맥아더원수가 김대위의 부친께 전달하였으며, 정부에서는 화랑무공훈장과 6.25사변 종군기장을 수여하였고 유우엔에서는 국제연합을 옹호한 공으로 훈장을 보내왔다. 고 김영국 대위의 묘는 진천읍 금암리 앞산에 있다.

소속 제2사단은 김영국 대위의 출신 사단이다. 제2사단에서는 지금도 김영국 대위를 군신으로 추대하여 그의 얼을 군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진천군지> <진천군 내고장전통가꾸기>

 

■ 건송리

일송정마을 - 안동 김씨가 이 마을에서 200여년간 거주했다고 전한다. 김씨가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하여 동명을 일송정이라 하였다 한다. <진천군청 홈페이지>

 

일송정 유래비 (1998)

일송정 부락의 행정구역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建松里이며 지형적으로는 우리나라 중추 산맥인 차령산맥의 무제봉에서 뻗쳐 나려온 3맥중 중앙산맥이 힘차게 내려오다 뭉친 지점이며 금강상류인 백곡천과 명암천이 흘러 합류하는 지역으로 북측 부락뒤 3면이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 쌓이고 남측 전면은 확 트여 바다와도 같은 백곡저수지 푸른 물이 마치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산수수려한 고장으로 안동김씨의 13대에 걸쳐 약 400여년 세거지지입니다.

고려충신 충렬공 휘方慶의 12대손이며 안렴사공 휘士廉의 8대손인 통훈대부 부호군 및 군자감정 휘廷佶 조상께서 유년시절 임진왜란을 맞아 침구와 詩書등 생활용품 전부를 도난당하자 어버이를 생각하여 왜적장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전하니 시 내용인즉

"동자 나이 12세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어버이를 작별하니 궁중문 안에 근심하는 원추리요, 밤마다 어버이를 생각하는 꿈과 나의 집은 길게 꽃 위를 향하여 날았도다. 남자라면 마당히 탄식할 것입니다." 이 시를 적장이 읽어보니 어린 나이에 어버이를 생각하는 효성에 감탄하여 피난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후 성장하여 국가 고위관직에 오르셨고 조부모 님이 작고하시자 一宋亭 (당시 明信里)에 장례를 뫼시고 서기 1600년경 長管里에서 복잡하고 불편하시어 이곳 일송정으로 최초 개척하신 것이 부락의 창시입니다. 지명은 입구에 한 그루 소나무가 우뚝 서 있어 일송정이라 명명하고 한 그루 소나무가 너무 외롭게 느껴 우측에 槐木 1柱를 심어 좌측 괴목으로 양괴목정을 이루었으니 부락입구의 장엄한 위용은 일송정의 상징이며 역사입니다.

그후 누대에 걸쳐 자손이 번성하였고 국가에 공훈을 세우셨으며 특히 11대손 휘光國 조상께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행용양위 부호군 절형장군 첨지중추부사 등 혁혁한 공을 세우셨고 역대 선조의 敎旨가 잘 보존되어 왔습니다. 전국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는 우리 후손들은 선조의 유훈을 계승하여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더욱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선조로부터 잘 가꾸어 온 일송정이 근세에 이르러 한때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과거 50여호 가구가 농토가 비옥하고 水源이 좋아 농사를 짓고 행복하게 살던 터전이 1943년 일제말엽 백곡저수지 조성으로 농경지와 도로가 수몰되면서 부락민은 농지를 잃고 길도 없어 높고 긴 상산고개를 넘어 鎭川을 다니게 되어 교통이 불편함은 물론 생활대책도 막연하여 대부분이 정든 고향을 떠나 객지로 이주하고 겨우 10여 가구만 남아 부락을 지키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렴사공 6대손 휘孝曾 조상부터 대대로 전래하여 온 부락뒤 대 宗山을 17대에 와서 宗人의 한 사람이 허황된 마음으로 종중에 일언 협의도 없이 비밀리에 타인 청주이씨에게 대종산과 전 종토를 매각처분 탕진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대종산에는 안렴사공 6대손 휘孝曾 묘소를 위시하여 대대 조상 묘소를 뫼신 산으로 후손으로서는 말할 나위 없는 치욕이며 용납할 수 없는 처사이므로 종산을 조속히 반환하기 위하여 17대손 榮俊씨와 榮根씨 두 분이 주축이 되어 산주 李鎬信씨를 찾아가 반환요구를 하였으나 한마디로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속 추진하였지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분이 작고하시자 장자 李弘淳씨를 또다시 18대손 豪默씨, 用默씨, 19대손 在權씨 등이 약관임에도 노심초사 만사를 제치고 밤낮없이 수십차례 찾아가 사정을 하니 자손들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하여 5년 여만에 결국 반환승락을 받았지만 지불할 대금이 전무하여 종인 몇분이 사재를 희사하고 부족하여 사채를 차입 지불한 후 산주 이홍순씨에 재사정 그 명의로 벌채허가를 받아 벌채하여 숯을 구어 판매하여 대체하는 등 전 종인이 피나는 노력으로 대금을 완불하여 소유권이 넘어간지 10여년 만에 다시 이전하니 山主에 그지없이 고맙고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지극히 어렵게 종산을 반환하였습니다.

다시 찾고나니 자손으로 당연히 할 도리를 한 것이며 부끄러움을 면할뿐 아니라 후손이 이용할 수 있으니 떳떳하였습니다. 이런 사정을 전 종인이 깊이 깨닫고 향후 사욕을 버리고 치산보전에 가일층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러한 과오를 방지하기 위하여 3인 공동 소유로 하여 오다가 1994년 一松宗會를 결성, 종중 등록과 동시 전 재산을 종중 명의로 이전등기를 하였습니다.

현재는 다행히 1982년경 저수지 대규모 확장공사로 부락앞 우회도로가 개설되면서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점차 관광지화하고 일송정이 되돌아오는 다시 살기좋은 고장으로 변모하니 이는 실로 조상님이 돌보신 은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조상님의 얼이 담긴 일송정을 가꾸고 가다듬어 더욱 번창 발전시킴과 동시 영구 보전토록 합심노력하여 자손만대에 물려주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998년 3월 9일

안렴사공 19대손 在鴻 書

 

 p05.png 21) 황간파

안렴사공(사렴)---안렴사공 6자 좌랑공 휘湜(식) 장자 직장공 휘自麗(자려)---3자 김려 후손으로 황간파라 한다, 瓘(관)은 생원으로 후손들이 추풍령 인근 경북 김천시(옛 금릉군) 봉산면 광천리 너리골(廣洞)과 김천시 일원, 그리고 충북 영동군 황간면 회포리에 세거하고 있다.

--- 세거지 답사후 추후 보완계획임 ---

<2003. 6. 답사기 중에서>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추풍령IC로 빠져 나가서 추풍령 고개에 올라 서보면 매우 높고 험난한 고개로 알고 있으나 아주 낮은 구릉으로 황간에서 김천가는 국도변이다. 이곳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道 경계지점이다. 이곳 경북 김천시(옛 금릉군) 봉산면 광천리 너리골(廣洞)이라는 곳에 안렴사공파 세거지가 있다

안렴사공(김사렴)---(막내아들 6자) 좌랑공(김식)---(1자) 직장공(김자려) 께서는 아들 세분(김극, 김린, 김려) 이 후사가 이어지는데, 김려의 후손들이 이곳 추풍령에 세거하고 있다. 너리골(한자로 廣洞)이라는 마을이다.

차 한 대가 겨우 다닐수 있는 소로길을 한참을 들어가는 아주 한적한 산골 마을로 도착하여 보니 하늘아래 첫동네이다. 마을 입구부터 마을 뒤 산마루까지 온통 포도밭으로 산골이라 공기도 맑고,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개울물이 어찌나 맑고 힘차게 흘러 내리는지 어는 산골계곡에 들어와 있는 듯 상쾌하다.

이 마을에는 전에는 우리 일가분들이 한 30호 정도 살았는데, 일부는 김천시내 등 대처로 이주하고 현재는 10여호가 세거하고 있다고 한다.

 

p05.png 22) 증평파

안렴사공(사렴)---안렴사공 6자 좌랑공 휘湜(식) 2자 직장공 휘自荊(자형) 후손으로 증평파라 한다

증평파에서는 생원진사 급제 5명(命龍, 寶, 日+舟, 龜錫, 基弼), 무과급제 1명(思興)이 있으며, 羲錫-汝龜-義路-煥極은 효자비, 煥桂는 신도비, 基華는 응봉리 효자비, 汝光은 낙낙와집 이 전한다.

김명룡(金命龍)은 무진(戊辰) 1568년에 태어나 자 여윤(汝允)으로 청안(淸安)에 거주하다 한성부(漢城府), 동학(東學)에서 광해(光海) 10 (1618) 식년(式年) 생원(生員) 2등 0006으로 급제하였고,

김주(金)는 부 김명룡(金命龍) 형 김오(金旿)이고 병오(丙午) 1606년에 태어나 자 여승(汝昇)으로 청안(淸安)에 거주하다 한성부(漢城府), 동학(東學)에서 인조(仁祖) 05 (1627) 식년(式年) 생원(生員) 3등 0040로 급제하였다. 이때 시험관은 이덕형(李德)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이었다.

김보(金寶)는 경자(庚子) 1660년에 태어나 자 중삼(重三)으로 청안(淸安)에 거주하다 예조(禮曹), 성균관(成均館)에서 숙종(肅宗) 41 (1715) 식년(式年) 생원(生員) 3등 0043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시험관은 권상유(權尙游) 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이었다.

김구석(金龜錫)은 부 김인(金寅) 생부 김보(金寶) 제 김인석(金麟錫), 김기석(金麒錫)으로 갑자(甲子) 1684년에 태어나 자 성응(聖應)으로 청안(淸安)에 거주하다 예조(禮曹), 성균관(成均館)에서 영조(英祖) 01 (1725) 증광(增廣) 생원(生員) 3등 0034으로 급제하였고

김기필(金基弼)은 부 가선대부(嘉善大夫)/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 김환주(金煥柱) 제 김기석(金基奭)으로 정사(丁巳) 1857년에 태어나 자 인범(仁範)으로 청안(淸安)에 거주하다 명륜당(明倫堂), 비천당(丕闡堂)에서 과목 일시(一詩)로 고종(高宗) 31 (1894) 식년(式年) 진사(進士) 3등 0130으로 급제하였다.

1900년대초 유학자는 다음과 같다. <유생명부-1928 해동청금록, 1929 조선청금록>

◇괴산군

--김원묵(金元?) 명설(命說) 심헌(尋軒) 안동인(安東人) 안렴사 사렴 후(按廉使 士廉 后) 장의(掌議)

--김재성(金在星) 해초(海初) 우천(愚泉) 안동인(安東人) 안렴사 사렴 후(按廉使 士廉 后) 장의(掌議)

--김일연(金日演) 한명(漢明) 괴은(槐隱) 안동인(安東人) 안렴사 사렴 후(按廉使 士廉 后)

--김공묵(金恭?) 치안(治安) 낙은(樂隱) 안동인(安東人) 안렴사 사렴 후(按廉使 士廉 后)

◇괴산군 원 청안(淸安:충북 청주와 괴산군에 편입됨)

--김상옥(金相玉) 경숙(敬叔) 월은(月隱) 안동인(安東人) 부호군 탄수 정신 후(副護軍 炭? 鼎臣 后) 진원(眞員)

--김흥연(金興演) 공우(公雨) 송계(松溪) 안동인(安東人) 안렴사 오은 사렴 후(按廉使 梧隱 士廉 后) 장의(掌議)

--김기보(金基輔) 좌경(佐卿) 죽재(竹齋) 안동인(安東人) 안렴사 오은 사렴 후(按廉使 梧隱 士廉 后) 장의(掌議)

--김호구(金好九) 성률(聖律) 쌍죽(雙竹) 안동인(安東人) 안렴사 오은 사렴 후(按廉使 梧隱 士廉 后) 도유사(都有司) 내극효친 외공모성(內極孝親 外功慕聖)

--김기필(金基弼) 인범(仁範) 노은(蘆隱) 안동인(安東人) 안렴사 오은 사렴 후(按廉使 梧隱 士廉 后) 도유사(都有司) 진사(進士)

--김사준(金思濬) 여심(汝深) 호은(湖隱) 안동인(安東人) 안렴사 오은 사렴 후(按廉使 梧隱 士廉 后) 장의(掌議)

--김상연(金商演) 몽필(夢弼) 삼락(三樂) 안동인(安東人) 안렴사 오은 사렴 후(按廉使 梧隱 士廉 后) 본군이합 숭봉성묘(本郡移合 崇奉聖廟)

 

好奭은 초명 榮周로 무술8.5생이며, 昌會1927-, 在善(道演)1922-은 1998년 문영공 종회장을 역임하는 등 종사에 헌신하였으며, 도연의 아들 奉會(생부道演)는 현재 증평농협조합장이며, 宰鶴(在鶴)1924-은 충북투자금융사장을 지내고 아들 侊會(光會)는 미가주대교수이다.

尙默1918-은 청주시장을, 聖會는 지방의회의원을 지내고 종사에 헌신하였으며 아들 泰禧는 부면장 泰秀는 군과장 泰球는 대우자동차회장을 지냈다. 在淞(鳳演)은 증평면장을 지내고 종사에 헌신하여 안렴사공파종회장을 지냈으며, 증평엽연초조합 구내와 증평 송산공원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으며, 在國1928-은 농지개량조합장, 在世1940-는 농협군지부장, 莊會1918-는 증평읍장을 지냈다.

첨추공 세공의 후손으로 在寬1947-은 청주대교수 서양화가 국전초대작가로 현재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며, 청주대학교 본관인 청석관 본관에 1999년 청주대 예술대학장 김재관의 작품 <청주대학교 상징물(황소, 소나무, 개구리) 테마 서화작품>이 게시되어 있다.

 

■ 증평 남하리 삼보산

죽리초등학교에서 서남쪽으로 약 1km쯤 떨어진 거리에 우뚝 솟아있는 산이 바로 삼보산(三寶山 : 해발 273m)이다. 지금의 삼보산은 대동여지도에는 삼보봉으로 표기돼 있으며 이 산에서 3가지의 보물이 난다하여 이같이 불려 진다고 한다(천연약수, 금광석, 산골).

첫째 보배는 초정리의 천연약수, 남하리의 탄산약수로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력이 있다하여 복용하거나 여름철에 약수 목욕을 하는 사람이 많다.

둘째로 삼보산에는 금광석이 매장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산은 안동 김씨의 종산으로 안동 김씨 조상들의 묘소가 있어 채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로 이 산에서 나오는 '산골'이라는 광물질인데 북일면 호명리에서 나는 이 산골은 뼈가 골절됐을 때 접골재나 풍치의 통증이 있을때 담배에 섞어서 피운다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 고장의 풍속은 상검색(尙儉嗇 : 검소하고 인색한 것을 숭상하다)을 본으로 하여 근검 절약하는 인심 좋은 충 · 효 ·열을 가훈으로 한 많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낸 고장으로 이 전통을 이어 가도록 선현들이 붙인 슬기가 함축된 산이다. <증평출장소 홈페이지>

 

■ 죽리 마을의 구비전설 (조성완)

◇ 竹里 마을 지켜주는 守護石

죽리마을은 위치상으로 남차리와 남하리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中里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마을이 형성된 유래를 보면 마을마다 전설이나 실물이 보전되어 있다. 이 마을도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中里(竹里)마을은 삼보산에서 산줄기가 내려온 기슭에 마을을 이루었으나 마을을 감싸줄 좌청룡 우백호는 이루질 못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 전 안동김씨가 자리를 잡고 살면서 수호석을 세웠다.

좌청룡쪽은 남자를 상징하는 높이 2m정도에 길고 뾰족한 것을 세웠고, 우백호 쪽은 여자를 상징하는 1.5m정도에 둥글고 넓적한 모양을 세웠다. 마을의 편안함과 후손들의 번창을 위해서 하였다고 한다. 마을에서 협동하여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다.

몇년전 경지정리 사업을 하면서 좌청룡을 상징하는 수호석을 옮기던중 밑부분이 부러져서 높이가 낮아져 오늘에 이른다.

 

◇ 院坪마을의 天祭祀

원평 마을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院집이 있던 마을이다. 院집은 관리들이 공무차 왕래하면서 숙식을 해결하던 국영여관으로 길손들이 많이 왕래하며 들리던 장소이다. 이 마을 입구에는 수령이 400∼500년 되는 버드나무 아래 祭壇(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병자호란 이후에 마을에 괴질이 만연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이에 마을에서는 방역이나 치료를 감당할 수도 없이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마을의 불안을 없애기 위하여 천제님께 고사를 올린 것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매년 정월 14일에 마을 고사를 드린 이후로는 질병이나 마을에 불행한 일이 없어 고사를 지냄으로 인한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천제사를 올리는 사람은 마을에서 당년에 생기복덕한 3명을 선정하여 고향재, 헌관, 축관을 정한다. 고향재는 제물을 장만하고 준비하는 사람이고, 헌관은 제를 올리는 사람, 축관은 축을 읽는 사람인데, 마을 사람들 중에서 미리 정하여 천제사를 올린다.

매년 낭독되는 제문은 안동김씨인 김근연 웃대 조부께서 제문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마을 사람들 개개인 성명을 적어서 축원을 올린다. 마을 고사를 지낼 때 읽는 축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祝文 ---생략--- <증평문화 창간호, 1997>

 

■ 괴산 증평 남하리 금반부락 내력비

고려충신 안렴사 김사렴 공의 후손들이 이 부락에서 조선조 초기부터 살아온 안동김씨 세거지이고 타성도 같이 살고 있으며 인물이 많이

 난 고장이다. 삼강실록 (충효열에 대한 정부표창자 명부)에 실려있는 효자효부가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분은 안동김씨 김환극씨와 그의 처 광산김씨였다. 이 부부는 90세 노환의 부친을 모시면서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고 특히 며느리 광산김씨는 겨울철에 시아버님께서 생선 잡수시기를 원하시나 때는 엄동이라 구할 길이 없는지라 주야로 하늘에 축원을 드리더니 천우신조인지 그후 남편이 시냇가에 가서 어름을 깬즉 생선 십수 마리가 튀어나와 가지고 오니 이웃사람들이 보고 그 부부 효성에 감탄하더라. 그 효심을 후세에 전하고 익히기 위하여 효자효부비를 세웠다.

이 부락의 인물을 열거하면 청안사마소 (생원 진사가 모여서 공부하던 곳)에 배향된 학자로서는 생원 김명용씨, 김주씨, 김보씨, 김구석씨가 계셨고, 진사로서는 고명하신 학자 김기필씨와 금부도사(경찰청 관리) 김오씨, 사복시정(군마를 관장한 관리) 김희석씨, 좌승지(청와대 비서관) 김여구씨, 호조참판(재무부차관) 이며 효자이신 김의로씨, 돈영부사(임금님의 종친들을 관장하던 부서의 관리)이며 효자이신 김환계씨와 열녀 김학수의 처 나주김씨가 계셨고, 청안향교 전교를 한 김흥연씨, 김영연씨와 일생동안 많은 후학들에게 한문을 가르쳐주신 공으로 교은불망비가 서 있고 청안향교 전교와 유도회장을 한 김사옥씨, 또 죽리국교 증평중학교 형석중학교 증평공고 설립을 주도, 단군전을 개축하고 증평엽연초생산조합내에 송덕비가 서 있으며 한국인물사에 오른 증평면장을 한 김봉연씨, 증평읍장을 한 김태경씨, 청주시 건설과장 및 미호천류역 개발사업소장을 한 김군연씨, 단양공고 교장과 충주시 교육장을 한 김재섭씨, 농지개량조합 도지회장을 한 김재국씨, 고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딴 김윤식씨가 있으며 효부로서는 김승연의 처 곡산연씨, 김태경의 처 곡산연씨, 김태주의 처 경주이씨, 정낙영의 처 전주이씨, 전희남의 처 광산김씨, 김정묵의 처 고령신씨, 김태규의 처 한산이씨가 있다.

우리 부락민은 모두가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마을의 유대와 발전모습을 영구히 보전할 것이며 후세인이 본받아 배우고 익히게 하기 위하여 국가문화 시책에 따라 주민의 뜻을 모아 마을내력을 기록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

서기 1992년 9월 14일 남하리 금반부락민 일동 수립

 

■ 경모재(敬慕齋) (1660 조선조 현종)

◇ 경모재는 1700년대에 증평읍 남하리 서당마을에 세운 안동김씨 문중의 재실로 지었다고 하며 한때는 서당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7칸 측면1칸반 맛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괴산군지, 1990>

◇ -위치 :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1구 -소유 : 안동김씨 종중 -수량 : 1동 -재료 : 목조

증평읍에서 율리행 도로로 약 4km 지점 남하리1구 양지촌에서 삼보산을 향하여 약 500m 올라간 서당말이라는 마을이 있다. 약 320년전에 건립하였다고 하는 옛날 기와집으로서 안동김씨 재실이라 칭하나 전에는 이곳에 살고 있는 안동김씨 문중의 서당으로 쓰였다 하여 부락 이름이 서당말이라 하는 것도 이 건물 때문이라 한다.

이 건물은 안동김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서당으로 사용되지는 않고 1년에 자손들이 모여서 조상의 제사를 올리고 종중 회의장소로 이용하며 묘소와 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살고 있다.

이곳이 서당으로 사용시 안동김씨 중에 두 형제가 경모재에서 공부를 하는데 어느 늦은 가을에 스님 한분이 와서 하룻밤 자고 가자고 청하였다. 이를 허락하여 쉬는데 때마침 스님이 병이 나서 앓고 있으므로 형제는 밥을 지어 해 주고 약을 구하여 치료를 하는 등 온갖 정성을 드린 결과 이듬해 봄에 소생한 스님이 하는 말이

"두 분의 은혜가 큰데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승이 약간의 지리를 아오니 두분의 뫼자리를 알려드릴까 하오니 허락해 달라고 하여 승낙을 하자 이어 스님은 두분의 소원을 물으니 형은 자손이 많기를 원하고, 동생은 부자되기를 원하니 스님이 원대로 해주겠다며 묘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스님 말대로 형은 7형제를 두고 아우는 3형제를 두었다. 지금도 형의 자손은 많고 아우의 자손은 적은 반면 부자가 많아 현재에도 형제의 자손이 수백호 살고 있다.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 충청북도의 고서7 괴산군 (2002.12, 충북향토문화연구소)

p27

청안향교(괴산 청안면 읍내리) : 고서 8권

청안면사무소(괴산 청안면 읍내리) : 고서 6권

안동김씨재실(괴산 증평읍 남하리) : 고서 4권, 고문서 6권

p158

<안동김씨 죽헌공파 재실 소장 고서>

⊙ 안동김씨화수록

제1장에는 예사, 제2장에는 선언, 제3장에는 충렬공유허지 선세일사 등을 수록하고 있다. 상편과 하편의 2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소화12년(1937)에 간행한 것이다.

⊙ 門案

무진년에 수정한 문안으로 280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1책의 필사본이다.

⊙ 문안

정유년에 수정한 문안으로 聲正파 30명, 聲律파 6명, 聲呂파 13명, 聲羽파 45명, 聲武파 39명, 聲夏파 25명, 聲振파 21명, 聲聞파 29명, 聲敎파 22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첫머리에는 "세재정유2월을사후예★基早근서"가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 진사공행장

진사 ★金龜錫의 행장이다. 김귀석의 자는 聖應이다. 시조는 고려의 金方慶이다. 이 행장은 숭정기원후4병오11월일통훈대부행사간원정언고령朴浚愚가 찬한 것이다. 또한 宋來熙가 찬한 진사김공묘갈명이 수록되어 있다.

 

p189

<안동김씨 죽헌공파 재실 소장 고문서>

⊙ 手標

무오 5월 2일에 유학 조재형과 조재영이 양가의 山訟 문제로 인하여 작성한 문서로 유학 ★金義佐에게 준 수표이다. 수표는 대차 기탁 약속 등을 할 때 주고받는 증서로 手記라고도 한다. 크기는 73.0*108.0cm이다. (도2-19)

⊙ 試券

과거시험답안지로 82.0*66.5cm이다.

⊙ 敎旨

만력47년(1619) 10월에 유학 ★金命龍이 생원2등 제1인으로 入格하였다는 내용의 급제교지이다. 크기는 38.0*96.0cm이다.

⊙ 敎旨

천계7년(1627) 8월 19일에 유학 ★김주가 생원3등 제10인에 입격하였다는 내용의 급제교지이다. 크기는 37.0*72.0cm이다.

⊙ 原情

청안에 거주하는 유학 ★金義祖 등이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서 연명으로 올린 원정이다. 크기는 74.0*102cm이다.

⊙ 報草

갑인 5월에 청안현의 조성호 金煥益 등이 산송문제로 인하여 巡營에 올린 단자이다. 크기는 74.0*65.8cm이다. (도2-20)

 

■ 안동김씨사 (安東金氏祠)

◇-위치 :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1구 -소유: 사유 (안동김씨 종중)

-수량 : 1동 -규모 : 건평 34평, 맛배집 -재료 : 목조

-시대 : 1805년 (조선순조 5년)

증평읍에서 율리행 도로로 약 4km 떨어진 남하리1구 양지촌에 있다. 이 근방에 대대로 내려오는 안동김씨가 살고 있는데 그의 선조중 金聲武(김성무), 金宏(김굉), 金羲錫(김희석), 金汝龜(김여귀), 金義路(김의로)의 다섯분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1805년 (순조5) 후손들이 건립하였는데 여러대가 거듭됨에 따라 위로부터 4위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현재는 호조참판을 지낸 김의로 위패만 모시고 그분의 효성심과 가정의 화목함을 본받고져 자손들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 소재지 : 증평읍 남하1리 (양지말) -규모 : 정면 4칸, 측면 2칸 -건립시기 : 1805년

증평읍 남하1리 양지말 마을에 있는 안동김씨사는 1805년(조선 순조5) 김성무(金聲武), 김굉(金宏), 김희석(金羲錫), 김여귀(金汝龜), 김의로(金義路) 다섯 명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건립됐다. 이후 위로부터 4위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호조참판을 지낸 김의로 위패만 모시고 있다. 사당의 형태라기 보다는 일반 목조기와집 양식을 하고 있다.<증평의 문화재, 1999>

 

김락춘(金洛春) 字는 聖團, 본관은 安東 按廉使 金士廉의 후손이며 募梧齋 金琦의 손자이다. <괴산군지, 1990>

김락신(金洛新)

字는 命汝, 洛春의 아우이다. 가세가 극빈하여 근검 노력으로 노부의 구미에 맞는 음식과 몸을 편하게 할 의복을 마련하기에 힘쓰더니 연로한 부친이 병이 위중하자 자신도 육순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개월동안 잠시도 병석을 떠나지 않고 시탕하며 병간호에 정성을 기울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여러 동생들을 거느리고 상례를 다하며 4년을 하루같이 성묘했다. <괴산군지, 1990>

 

■ 한사정 (閑士亭)

 -위치 : 괴산군 증평읍 죽리 -소유 : 사유 -수량 : 1동 -규모 : 정면2칸 팔작집

-재료 : 목조 -시대 : 1965년

증평읍에서 청안행 도로를 따라가다 삼거리에서 동쪽 율리행 도로를 따라가면 죽리 원평부락뒤 삼보산 기슭에 있다. 학식이 높은 선비 儉竹(검죽) 선생의 공덕을 추모하는 뜻으로 그 후손과 제자 중 김동휘, 김은수 등이 협력하여 1965년에 건립하였다.

검죽 金好奭(김호석)은 안동김씨로 구한말 증평읍에서 태어나 학식과 덕망이 높아 이 지방의 고결한 선비로서 존경을 받았다. 공은 세상에서 명예와 부귀는 뜬구름과 같이 여겨 오직 학업을 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함에 힘씀으로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380여명에 달하였다. 현 토정의 건물은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2간, 측면2간의 팔작집이다.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변영득의 처 안동김씨 玉蓮(1881-1957)의 節孝碑

절효부 변영득의 처 안동김씨 玉蓮(1881-1957, 안렴사 후, 남하리 생)의 節孝碑는 1978년 청원군 북이면 영하리 탑산에 세웠으며 비문은 성균관전교 상산 연규복이 짓고 글씨는 전일현이 썼다. 건립추진위원장 한충구 립 <비문집 청원의 인풍, 1991>

安得商(안득상)의 처 안동김씨

---안동김씨는 안렴사 김사렴의 후손이고 김재성의 딸로 순흥 안득상의 처이다. 나이 17세에 출가하여 20에 남편이 요절하니 혈육조차 없어 바로 남편의 뒤를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마침 늙은 시어머니가 병들어 오랫동안 누어 있으므로 아픔을 참으며 변을 맛보아 가며 시탕하고 하늘에 기도하였으나 상을 당함에 예로써 3년을 마치고 홀시아버지를 받들기 지성으로 하여 조그만치도 그 뜻을 어기지 않으며 의식범절을 극진히 봉양하니 사람들이 효열쌍전이라 칭찬하였다. <괴산군지, 1990>

■ 단군전

괴산군 증평읍 대동 1003-61에 있는 단군전은 관리에 김봉연, 김도연이 주도하였고, (청천파) 김사달은 편액을 서하였다. 단군전 앞 마당에 세워져 있는 金箕錫 공적비는 1988년 건립위원장 김도연, 고문 김봉연, 이사 김재성 등이 주도하여 세운 것이다.

◇ 증평읍 대동에 자리잡고 있는 단군전(檀君殿)은 1948년 5월 27일 김기석(金箕錫 : 1897-1978)씨 등 지역유지들이 홍익인간의 이념과 경천숭조사상을 길러 민족정기를 빛내기 위해 본전과 담장을 세워 건립 됐다.

1929년 세워진 일본 신사(神祠)가 1945년 8월 16일 해방 이튿날 청년들에 의해 불타 없어진 그 자리에 건립된 단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편액은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 1924-1984)이 썼다. 단군의 영정은 가로 42cm, 세로 82cm의 크기로 평정건(平頂巾)에 흰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단군전은 해마다 10월3일 개천절과 음력 3월15일 어천절(御天節 : 단군이 승천한 날)에 단군전봉찬회 주관으로 제향을 지내고 있다.

 

■ 청안 사마소(淸安 司馬所)

청안향교 옆에 있는 청안사마소에는 (제학공파)김득신 뿐만 아니라 선조님 중에 생원 김명용, 김주, 김보, 김구석, 김흥보, 김기필, 김호철 등 여러분이 제향되어 있고, 현재 청안향교 장의는 인근 사리면에 살고 계신 (제학공파) 金容斗이다. 청안향교 입구에는 비가 여럿인데<유도회청안지부위원장장공성원기념비>는 전교 花山후인 金思玉 찬이고, <도유사연형존성비>는 유도회 청안지부장 金伯卿, 건립위원장 金道演이 세운 것이고, <대소인원과차자개하마비>는 증평농업협동조합장 金奉會가 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곳 청안향교 소장 고서 8권과 청안면사무소 소장 고서 6권에는 증평, 청안 일원 선조님 기록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2003년 5월부터 11월까지 청안사마소는 괴산군청 주관으로 철거한후 신축하고 있다.

-종 목 시도기념물 49호 -명 칭 청안사마소 (淸安司馬所)

-분 류 사묘,제단 -수 량 1동 -지정일 1984.12.31

-소재지 충북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279 -소유자 향교재단 -관리자 향교재단

청안현의 생원과 진사에 합격한 자들이 설치한 자체협의기구이다. 사마소란 조선 중기 지방 생원·진사들의 협의 기구로 대개 사마시에 합격한 자가 50인 이상 되는 곳에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이들의 친목도모와 정치 토론 및 교육 활동 등으로 그 고장 발전에 기여하였으나 점차 수령의 통치에 간섭하고 백성들을 함부로 잡아다 벌을 주는 등 폐단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청안 사마소는 숙종 29년(1703)에 설치하였으며 현감 23명, 생원·진사 91명 등 114명에 대하여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문화재명 청안사마소(淸安司馬所)

사마소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즉 사마방(四馬榜)에 급제한 자가 50인 이상이 나온 읍에 설치되는데, 그 급제자들이 지방유림(地方儒林)으로서 뛰어난 인물이라하여 후배와 후손들이 제사하며 유학을 강론하고 정치를 의논하는 곳이다. 이 사마소는 조선(朝鮮) 숙종(肅宗)때 청안현의 생원, 진사 50여 명이 이미 사마방에 급제하매, 숙종 29년(1703)에 사마소를 설치하였다 하며, 제명록(題名錄)에 등재된 현감 23인, 생원, 진사 91인 등 114인에 대하여 매년 후손들이 춘추에 제사하고 있다. 목조와가(木造瓦家)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집이다.<문화재청 홈페이지>

 

이 사마소에는 문과 8인, 생원40인, 진사40인, 인물3인, 음과2인, 지주22인을 합하여 115인을 제명하고 춘추로 제향하고 있는데,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철폐되었다가 광복후 청안지방의 유림들이 1950년 사마소를 재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괴산군청 홈페이지>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3/05/29

<司馬所(사마소) 소개> (2003. 5. 8. 항용 제공)

1)탐방 일시 : 2003. 5. 8

2)위치 : 충북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청안 향교 옆). 충청북도 기념물 49호

3)탐방자 : 金奎文(제), 金恒鏞(제)

4)내용(사마소 앞 안내판)

*이곳에는 백곡 김득신 선조님이 중앙에 모셔져 있고 여럿의 위패 속에 6위의 확인중인 안동김인이 모셔져 있다(생원 金 口舟, 생원 金命龍, 생원 金龜錫, 진사 金興輔, 진사 金基弼, 진사 金好哲--등 총 7위). 매년 이곳의 제향때는 인근 사리면에 살고 계시며 청안향교 장의이신 金容斗님께서 혼자만 참배하신다고 한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참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 청안향교, 청안사마소 소장 고서

p122

<청안향교 소장 고서>

⊙司馬先生裔孫錄

사마소移築有司案 청안사마소題名錄序를 비롯하여 金光佑-金在源까지 115명의 명단을 수록한 사마록이 실려있다. 사마록에는 직위 성명 자 생년 본향 등에 대해서 수록하고 있다. 말미에는 "素王후42경술동월 일 전청안향교안동후인松巖★金思玉謹識"가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사마소선생자손록

사마소 제선생의 자손들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金光佑-장인래까지를 수록하고 있다. "계묘춘개수정"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사마소선생자손록

金光佑-金明洙까지 사마소 제선생의 자손들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재산목록

토지목록과 대부료기, 그리고 읍내리와 조천리에 소재한 재산목록을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1책의 필사본이다.

⊙孺錄

표제는 [임진3월일중수시 유록]이다. 유학 장수경-★金思元 연규석 등 68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1책의 필사본이다.

⊙淸塘詩社座目

장영환-金榮達까지 80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1책의 필사본이다.

⊙사마록

金光佑-이조환까지 67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는 사마록이 실려 있다. 다음으로 立規가 수록되어 있다. 첫머리에는 최석정이 쓴 "청안사마소제명록 서"가 수록되어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사마록(一)

金光佑-★金基弼까지 106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임오갑후세술자4월일개수정이라고 되어 있다. 첫머리에는 최석정이 쓴 "청안사마소제명록 서"가 수록되어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청안면사무소 소장 고서>

⊙선생안草冊

충청도 청당현 선생안으로 수령의 부임과 이임 날짜 및 체임사유 등이 수록되어 있다. 첫머리에는 건치연혁이 수록되어 있으며, 라세언 으로부터 143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병진11월일수보이조"라는 기록이 있다.

⊙邑先生賻儀完錄

인평군 이보혁이 졸서하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고자 만든 節目으로 운영방법 등에 대해서 수록하고 있다. 부록으로 절목이 실려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나무목변緣)廳契案

표지제목이 낙장되어 書名을 확인하기 어려우며, 계원들의 명단과 追入 상황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座目으로는 차홍기 로부터 수록하고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청당현司선생안

청당현의 수령을 지낸 사람들의 명단을 수록한 것으로 金信珍으로부터 염관우까지 70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송은징이 "청당현사선생안 서"를 썼다. 1책의 필사본이다. (도1-68)

⊙청당(나무목변緣)齋선생안

선생안이 수록되어 있는데, 차태창으로부터 차신집까지 14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광서12년에 新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홍면식이 쓴 "청당(나무목변緣)재선생안 서"가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도1-69)

⊙청당현선생안

라세언 으로부터 이탁응 까지 160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임오년에 개수한 것이다. 수령의 부임과 이임 및 체임 사유 등이 수록되어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도1-70)

⊙(나무목변緣)廳契案

표지제목이 낙장되어 書名을 확인하기 어려우며, 계원들의 명단과 追入 상황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座目으로는 차홍기 로부터 수록하고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청당현司선생안

청당현의 수령을 지낸 사람들의 명단을 수록한 것으로 金信珍으로부터 염관우까지 70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송은징이 "청당현사선생안 서"를 썼다. 1책의 필사본이다. (도1-68)

⊙청당(나무목변緣)齋선생안

선생안이 수록되어 있는데, 차태창으로부터 차신집까지 14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광서12년에 新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홍면식이 쓴 "청당(나무목변緣)재선생안 서"가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도1-69)

⊙청당현선생안

라세언 으로부터 이탁응 까지 160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임오년에 개수한 것이다. 수령의 부임과 이임 및 체임 사유 등이 수록되어 있다. 1책의 필사본이다. (도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