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1차-2002. 6. 29. 전남 보성 소재. 재원(문) 제공. 2차- 2002. 7. 31. 항용(제). 발용(군) 탐방. 제공)
<재실 문>(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재실>
<재실 현판> <보성 재실 뒤의 묘소>
<보성 재실 뒤의 묘소>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마을 앞 안동김씨 세장비>
<탐방기>(2003. 7. 31. 발용(군) 촬영, 항용(제) 작성) 7월 31일 거제도를 출발하여 통영, 진주를 거쳐 남해 고속도로로 접어들은 우리 일행은 강진을 향해 달렸다. 순천 송광사가 보고 싶었다. 우리나라 3대 사찰(해인사. 통도사. 송광사)의 하나인 이곳의 광대함에 놀랐다.
이어 보성으로 갔다. 재원 대부님이 알려 주신 대호군공파 재실을 보기 위함이었다.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마을로 들어갔다. 물어물어 몇곳을 헤매다가 찾아가니 마을 입구에 안동김씨대호군공파 세장비가 서있다. 이렇게 반가울 수 가 없다. 먼저 김구선생님 은거지를 찾아야했다. 발용씨가 세장비 뒤쪽 집에 찾아가 은거지를 물었다. 대문의 문패가 김태식씨이다. 틀림없이 일가집이리라. 아니나 다르랴. 60세 정도 되신 분과 통성명을 서로 하니 순간 오래 만나온 옆집 일가사이가 됐다. 이게 바로 한 할아버지의 후손이요 혈육의 정이리라. 급히 떠나려는 우리에게 직접 농사지으신 양봉 꿀차를 얼음 띄워 타 주신다. 꼭 마시고 가란다. 이 마을에는 약 60여 호의 안동김씨가 살았는데 현재는 약 40 여 호만이 살고 있단다. 재력이 큰 인물은 별로 없으나 공부 잘하는 이는 많이 났단다.
따뜻한 정 듬뿍 먹고 김구 선생 은거지 집으로 갔다. 태식씨 집 앞을 지나 약 300m 가량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니 5 채 정도의 동네가 나온다. 맨 윗집 앞에 김구선생 은거지란 표지석이 있다. 집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다. 이 집의 손자가 현재 서울 지방법원의 판사로 있단다. 담장위로 올라가 사진을 찍고 어렵게 차를 돌려 나왔다.
날은 점점 어두워 갔다. 대호군공파 재실을 찾아야 했다. 길 옆에 보이는 재실로 들어가는 길을 어렵사리 찾아 들어갔다. 기웃거리는 우리에게 한 어른께서 연유를 묻는다. 대호군공파 金仁會 어른이시다. 재실 위로는 2기의 산소가 있다는 말에 동작 빠른 발용씨가 어둠에 쫓기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 왔다. 휴- 오늘 할 일은 어느 정도 다 한 셈이었다.
마을을 빠져 나와 큰길로 접어들었는데 멀리서 보는 大路 옆의 휴게소에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발용씨의 예감이 있었다. 맞았다. 휴게소(쇠실 쉼터) 한 옆에는 김구 선생 은거 추모비와 함께 몇 가지 석물들이 잘 정돈되어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휴게소 길 건너에 있던 우리는 한 사람은 도로 중앙 분리대 위를 넘어, 또 한 사람은 분리대 아래로 빠져 넘어갔다. 아슬아슬한 도로상에서의 곡예에 차에 남아 있던 아내와 아이들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어둑어둑한 빛 속에서도 열심히 사진을 찍어 댔다. 언제 다시 오겠느냐는 생각에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