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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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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7-06-08 14:50 조회1,368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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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정기(金水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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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정(金水亭)의 옛 이름은 우두정(牛頭亭)이다. 김명리(金明理)가 우두정을 창건하면서 아버지 척약재(金九容)가 이곳의 모습이 소머리를 닮았다고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김맹헌(金孟獻)은 예문관 직제학으로 이곳에서 수학하였으며, 그의 손자 김윤복(金胤福)은 진사에 오른 후 벼슬을 마다하고 우두정을 고쳐 짓고 금수정(錦水亭)이라 개명하였다. 김윤복은 호가 금옹(琴翁)이듯이 시와 거문의 달인이었다. 봉래 양사언(楊士彦)과 금옹은 거문고로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를 연상케 하는 사이가 되고, 양사언은 뒤에 금옹의 사위가 되어 금수정(錦水亭)을 금수정(金水亭)이라 개명하고 넘겨 받았다. 철원부사를 지낸 김확(金矱)이 다시 정자를 복축하고 옆에 별서(別墅)를 지었다. 이후 홍문관 교리 김환(金奐)이 다시 고쳐 짓고, 또 그의 아들 김경복(金慶復)이 다시 고쳐 지었고 상량문은 채팽윤(蔡彭胤)이 썼다. 김택인(金宅仁)이 또 고쳐 지었다. 이때 중수기는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이후 여러 번 고쳐 지으면서 꾸준 관리되어 오다가 한국전쟁 때 별서와 함께 소실된 것을 1986년 포천시에서 중건하고 향토유적17호로 지정하여 현재에 이른다. 별서(別墅)터도 2007년에 발굴하여 경기도 문화재자료135호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복원하여 문온공종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금수정 주변에는 많은 암각문이 있었는데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것만 보면 한석봉(韓石峯)의 해서(楷書) 동천석문(洞天石門), 양사언(楊士彦)의 해서(楷書) 금수정(金水亭)과 초서(草書)로 쓴 증금옹(贈琴翁) 있다. 부도(浮島)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한 웅장한 필체의 초서 경도(瓊島)는 금수정을 중수한 김택인(金宅仁)의 글씨이다. 중국 사신 허국(許國)이 쓴 회란석(廻瀾石)은 일부 떨어져 란석(瀾石)만 남아 있다. 이 밖에 금대(琴臺), 무릉(武陵), 준암(尊巖)등이 있다. 양사언의 금수정(金水亭) 글씨를 탁본보필해서 정자에 현판으로 걸었고 시판글씨는 무호(霧湖) 김수길이 썼다. 금수정을 노래한 시인은 모두 옮겨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정자의 벽면이 좁아 몇몇 분의 시판만 걸었으며, 참고로 금수정을 노래한 시인의 명단만 추려서 기록한다.

 

蓬萊양사언 思菴박순 漢陰이덕형 象村신흠 樂全堂신익성 芝峯이수광 蛟山허균 東州이민구 久堂박장원 景淵堂이현조 西溪박세당 醒齋신익상 農巖김창협 損窩최석항 鳴巖이해조 希菴채평윤 謙齋조태억 恕菴신정하 屛溪윤봉구 艮翁이헌경 樊巖채제공 海左정범조 三山齋김이안 醉吃유숙

西河이민서 惕齋이서구 楚亭박제가 窩窩이원조 眉叟허목 存齋 박윤묵淵泉홍석주 臺山김매순 梅山홍직필 愚山한유 保晩齋서명응 海翁홍한주硏經齋성해응 雷淵남유용 月谷오원 玉洞 이서 星湖이익 果齋성근묵 成齋조병현 蓮坡김진수 心菴조두순 澹人신좌모 橘山이유원 重菴김평묵

驥峯이시성 峒隱이의건 泛虛亭송광연 芸窩홍중성 寄翁남한기

寤齋조정만 石堂김상정 松湖유언술 止庵이철보 등 현사(賢士)

 


2017 7 1 솔내 김영환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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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대부님, 글자 한 자 빠졌습니다.
제5행 - 거문의 달인이었다. → 거문고의 달인이었다.

김광열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광열
작성일

회장님 6월 1일이 아닌가요? 7월은 아직인데요